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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을 것 같아서 시작한 일로 먹고 삽니다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5.01.01 11:07:47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183명 중에 남자는 3명. 이순만 군은 군산 서해대학 유아교육과 오리엔테이션에 가서 충격을 먹었다.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며칠 동안 벽하고만 친구로 지냈다. 같은 과에 다니는, 스물세넷 먹은 누나들이 먼저 순만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순만의 본성이 슬슬 드러났다. 재밌을 것 같아서 온 유아교육과, 유쾌하게 다녔다. 과대표도 하면서.

 

“레크레이션이라는 수업 시간에 풍선을 봤어요. 교수님이 긴 풍선으로 우산을 만드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제가 주말에는 예식장에서 알바를 했거든요. 풍선아트 하는 분들이 와서 돌잔치 준비를 하더라고요. ‘저, 이거 학교에서 배웠는데 더 배우고 싶어요’라고 했어요. 저보고 가게로 찾아오래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풍선을 배웠어요.”

 

대학 1학년을 마칠 때쯤, 레크레이션 교수님이 순만을 불렀다. “유치원에서 유아체육을 해라. 네가 좋아하는 풍선도 할 수 있어”라고 했다. 순만은 2학년부터는 야간대학생이 됐다. 낮에는 유치원 체육 선생님으로 일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활동적인 남자 선생님, 아이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일했다.

 

유아체육 선생님은 유치원 수업만 하는 게 아니었다. 유치원 캠프도 따라가고, 운동회도 준비한다. 2003년 10월, 순만은 일정이 빡빡했다. 잠을 통 못 잤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곳곳의 유치원을 돌며 하루 두 차례씩 운동회를 치렀다. 그는 운전하면서 졸고 말았다. 군산에서 전주 가는 도로의 벚꽃 나무 두 그루를 들이받았다. 브레이크도 밟지 않고서.

 

“병원에서 두 달간 누워 있었어요.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아서 물리치료도 2년은 받아야 된다대요. 다리 다쳐서 유치원 체육 선생님도 못 할 것 같고, ‘뭐 먹고 산대?’ 고민을 했어요. 제가 풍선은 자격증까지 있잖아요. 퇴원하고 풍선 하는 데를 찾아갔죠. 월급 안 받아도 좋으니까, 풍선으로 먹고살 만한 수준으로 배워서 내 가게를 차리고 싶다고요.”

 

풍선가게 견습생, 스물두 살 청년. 사장님은 그에게 차비 하라고 한 달에 20만원씩 줬다. 순만은 새로 문을 연 가게 앞에 풍선으로 아치를 만들었다. 큰 행사장에서는 피에로가 되어서 풍선을 나눠주었다. 그는 인터넷으로 저글링 하는 피에로를 봤다. “우와!” 감탄한 순만은 공 세 개로 저글링을 연습했다. 풍선과 저글링 세미나가 있다면, 전국 어디라도 갔다.

 

그 때 끼사(끼 있는 사람들)라는 저글링 동호회를 알았다. 순만은 달마다 서울로 가서 동호회 사람들에게 저글링을 배웠다. 공이나 링, 클럽을 던지고 받는 토스 저글링부터 디아블로(중국팽이 모양), 막대기, 외발 자전거까지. 교통사고로 부수어졌던 슬개골 뼈도 잘 붙었다. 순만은 현역으로 입대했다. 부대에서도 저글링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했다.

 

 



 

2007년, 제대한 순만은 본격적으로 풍선 일을 했다. 월급은 100만원, 스물다섯 살에 결혼해서 생활인이 된 그에게 턱 없이 모자란 돈이었다. 첫째가 태어나고 나니까 생활이 안 됐다. 그는 사장님한테 “힘들어요” 하소연을 했다. 월급은 차츰차츰 올라서 150만원. 순만은 실감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풍선만 해서는 가장 노릇하기 어렵다. 차라리 공장에라도 취직을 하자.”

 

그는 군산 기계공고 전기과 출신. 천안의 전기 판넬 만드는 회사로 취업 나간 적 있다. 도면 보면서 전기선 따는 게 재밌었다. ‘말뚝 박을까’도 생각했다. 일한 지 7개월째, 서해대학 유아교육과 합격통지서가 왔다. 순만은 고3 때, 유아교육과 사람들이 손 유희 하면서 홍보하는 것을 봤다. 재밌어 보여서 원서를 썼지만 잊고 지냈다. 교장 선생님 추천으로 합격이 됐단다.

 

전기와 유아교육 전공은 순만의 구직활동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기소개서에 “저글링과 마술을 연계한 교통교육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써서 군산시 어린이교통공원에 취직했다. 전기시설 관리까지 겸했다. 스물여섯 살 청년 순만이 받는 월급은 180만원. 생활은 빠듯해도 재밌었다. 날마다 연습해서 아이들한테 저글링을 보여주었다. 폭발적으로 실력이 늘었다.

 

 


 

“1년 반 동안 아이들에게 저글링 보여주면서 교통교육을 하다 보니까 성장한 거예요. 그 때 전라북도에서 운영하는 ‘신나는 예술버스’ 공연단을 알게 됐어요. 전에는 ‘군산저글링 외발자전거’ 동호회 하면서 봉사의 개념으로 축제나 행사를 찾아다녔거든요. 저글링을 알리고 싶어서요. 근데 제가 돈 벌면서 저글링 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거죠. 2010년 봄에요.”

 

‘신나는 예술버스’는 평일 낮에 소외계층을 찾아가서 공연을 한다. 1회당 받는 공연비는 30만원. ‘한 달에 몇 번이나 공연을 할 수 있나?’ 예측할 수 없었다.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교통공원은 달콤한 직장. 그러나 순만은 예술버스를 택했다. 재밌을 것 같았다. 생활은 꾸려갈 수 있겠지. 주말마다 예식장이나 개업한 가게에서 풍선 알바를 하고 있으니까.

 

순만은 예술버스를 타면서 저글러 ‘리쑨’이 되었다. 봄가을에는 한 달에 10여 개, 여름과 겨울에는 한 달에 1개의 공연을 했다. 괜찮았다. 저글링은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공연, 전라남북도를 통틀어서 저글링 하는 사람은 리쑨 뿐. 그가 하는 희소성 있는 공연을 이벤트 회사들이 알아봤다. 예술버스 덕분에 리쑨은 여기저기서 초청 받는 저글러가 되었다.

 

“‘그래, 이제 저글링하고 풍선으로 내 사업장을 차려보자!’고 했죠. 전라북도에 ‘희망창업’이 있어요. 청년들을 교육한 다음에 저금리로 대출해 줘요. 저는 ‘삐에로 나라’를 차리고는 저글링 공연에 더 전념했죠. 연습도 진짜 많이 하고요. 사무실을 저글링 체험 카페처럼 만들고 싶었는데 공연이 많아서 사무실로만 써요. 청소년 수련관에서 저글링 수업도 하고요.”

 

저글러 리쑨의 공연은 물이 올랐다. 그것은 더 잘 해보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리쑨은 저글링을 ‘아~주’ 잘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2011년, 둘째 아이 출생 신고를 하고서 일본의 저글링 축제에 갔다. 서울에 사는 저글링 동호회 선배와 함께. 부산에서 일본까지 배를 타고 갔다. 항구에 내려서는 행사장까지 약 50km를 외발자전거 타고 갔다.

 

“일본은 초등학교 3학년 애들도 저글링을 진짜 잘 해요. 먹고 사는 걱정이 없으니까 그런가 봐요. 독일도 그렇거든요. 3개월 코스로 저글링 학교까지 있어요. 그 나라들은 저글링이 운동 경기예요. 스포츠죠. 우리처럼 신기한 쇼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대회도 열려요. 그걸 인터넷으로 볼 수도 있거든요. 근데 직접 제 눈으로 구경하고 싶어서 간 거예요.”

 

2013년 12월, 리쑨은 부산에서 저글링 하는 지인이랑 제주도 동춘 서커스에 일하러 갔다.  거기서 중국 친구들을 보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었다. 그 때 리쑨은 정체기였다. 어느새 저글링 서커스 공연을 하고 다닌 지 4년째, 실력이 더 늘지는 않았다. 아내와 딸 둘을 놓고서 혼자 제주도로 건너갔다. 월급 250만원 중에서 200만원은 집에 부쳤다.

 

공연은 오후에 세 번만 하면 됐다. 리쑨은 오전에 중국 친구들이랑 연습했다. 오후에도 비는 시간에는 연습만 했다. 재밌었다. 고난도 저글링을 하려면 일단 천장이 높아야 한다. 뻥 뚫려있어야 한다. 제주도는 그게 됐다. 그러나 리쑨은 월급을 제 때 받지 못해서 농성하는 중국 친구들 보는 게 힘들었다. 봄이 되자 군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혼자 일한다. 저글링을 배우겠다고 오는 사람들도 있긴 있다. 공 세 개를 자연스럽게 돌리려면 꼬박 일주일이 걸린다. 풍선처럼, 외발자전거처럼, 세상의 모든 일처럼, 꾸준히 해야 실력이 는다. 진지하게 하는 사람이 없는 이유다. 리쑨의 블로그에는 외발자전거를 타고 저글링하다가 넘어지는 동영상이 있다. 숨을 헐떡이며 다시 일어난 리쑨, 독백이 나온다.

 

“나는 모든 것에 실패를 경험했다. 그것을 넘어서는 유일한 방법은 한 번만 더. 나는 모든 것을 실패하고 나서야 모든 것에 성공했다.”

 

그는 때로 공연 하다가 공이나 핀을 떨어뜨리기도 한단다. “사람이니까 실수하죠. 얼른 주워서 다시 하면 돼요”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그가 짠 공연은 서커스와 저글링이 합쳐진 15분, 20분, 40분짜리 프로그램이다. 장소나 관객에 따라서 내용은 조금씩 달라진다. 특히, 야외 공연할 때는 상황에 맞게 프로그램을 뒤바꾸면서 한다.

 

“저글링 도구 중에 불을 붙여서 하는 게 있어요. 사람들은 신기한 것보다 위험한 걸 더 좋아해요. 불을 붙이면, 우와! 해요. (웃음) 뭐 하지도 않았는데요. 불을 입에 넣어서 뿜죠. 10년 전에 풍선 일 하면서 알바로 불 쇼를 배웠어요. 화상도 입어봤죠. 청암산 축제 때요, 바람을 등지고 불을 확 뿜었는데 돌풍이 분 거예요. 팔소매에 불이 붙었어요. 옷 벗어서 금방 껐어요.”

 

영화 최종병기 <활>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남이는 쥬신타에게 활을 쏘며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불 쇼하는 남자, 저글러 리쑨은 “바람은 그저 등지기만 하면 돼요. 안전해요” 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실내 공연장에서는 위험해서 할 수 없는 불 쇼, 밖에서 할 수 있으니까 그것도 참 좋다면서.

 

 


 

리쑨은 군산대학교 유아교육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교통공원에서 저글링으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참 재밌었다. 공연이나 쇼를 보는 아이들도 신나 했다. 유치원에는 달마다 생활주제가 있는데 그걸로 공연을 만들어서 팔면 대박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하고 교육공연 프로그램을 만들러 대학원에 왔다. 그런데 논문 쓰는 게 너무 어렵다며 또 웃었다.

 

“제가 쥐띠인데 밤에 태어나서 겁나 바쁘게 살아요.”

 

날렵한 몸매를 가진 리쑨은 말했다.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는 저글러로 뿌리 내렸지만 여전히 혼자 노는 것도 좋아하는 리쑨. 미니 바이크를 타고 전국을 여행하고, 외발자전거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돈 리쑨. 자전거 타고 땅 끝 마을 가면서 행정구역 표지판이 바뀔 때마다 저글링 하는 동영상을 찍은 리쑨. 왜? 재밌으니까.

 

재밌을 것 같아서 유아교육과에 가고, 신기해서 풍선 일을 한 리쑨. 풍선과 저글링 하는 게  재밌어서 나라 곳곳의 고수들을 찾아다닌 리쑨은 예쁜 아내와 두 딸이 있는 서른한 살 청년. 나는 리쑨과 인터뷰한 녹음을 글로 옮기면서 말끝마다 우하하핫! 웃는 그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덩달아서 나도 많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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