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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생활의 꿈, 먼저 간 아들이 이루게 해 주었습니다.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4.02.01 15:47:5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이다.  운명이 작동한다.  1984년, 서른이 안 된 한 젊은이가 군산에 왔다.  그에게 군산은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객지였다.  그는 영동상가에 자리 잡았다.  젊고 예뻤던 아내와 아동복 가게를 열었다.  6개월 된 아들을 업고 가게에 나와 일을 돕던 아내는, 다음 해에 둘째아들을 낳았다.  부부는 연년생 아이 둘을 업고 안고 일했다.

 

자고 일어나면, 두 아이의 기저귀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아내가 가게에 일 나간 사이, 그는 세탁기에 돌린 기저귀를 옥상에 널었다.  빨래 줄 가득 널린 기저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젊은 가장은 행복했다.  가게도 잘 됐다.  그는 사흘에 한 번씩 서울에 ‘물건’을 하러 갔다.  명절이 닥치면, 하루는 집에서 자고, 하루는 서울 오가는 관광버스에서 잘 정도였다.

 

 

 

그렇게 10년이 갔다. 그들의 가게에 옷 사러 온 손님들에게 “어디서 왔어요?”라고 물으면 대개는 나운동 주공아파트에서 왔다고 했다. 그들 부부는 도전을 선택했다. 상가가 전혀 없는 나운동으로 옮겨왔다.  아동복에서 캐주얼 파는 집으로 바꿨다. 고전했다. 당연했다. 손님들은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옷을 사는데 옷집은 그들 가게 하나뿐이었다.

 

“우리 집 옷이 맘에 안 들면, 택시 타고 시내로 나가야 하잖아요. 아예 안 올라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가장 먼저 작업을 한 것이 상가를 늘리는 거였어요. 이사비용까지 줘서 우리 가게 옆에 있던 ‘우리만두’를 내보내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죠. 가게 몇 개에다 그 작업을 했어요.”

 

그는 지금의 나운 상가를 만들고 이끈 김진철씨다. 브랜드 옷이 막 생기던 때에 그는 중저가 브랜드 옷을 팔았다. “ 아파트 사니까 우리 애는 브랜드 옷을 입혀야지”라는 흐름과 맞아떨어졌다.  전라남북도에서 매출 1위를 하고, 전국에서 손꼽아주는 가게로 성장했다. <섬유저널>이라는 패션잡지에도 김진철씨 부부의 이야기가 두 번이나 실렸다. 

 

 

작은아들이 물놀이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오로지 장사만 알고 살면서도, 그는 연말에 아들 둘과 함께 일맥원(고아원)에 갔다. 아는 식당에 부탁해서 갈비를 재우고, 바비큐통을 챙겼다. 그의 아들들과 일맥원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놀았다. 그는 매년 일맥원을 찾으면서 아이들의 옷차림을 살폈다. 보육원 아이들도 후진 옷은 입지 않고 자랐다. 그게 자신의 아이 일처럼 기뻤다.

 

“저희 가게가 전국에서도 매출 높기로 유명한 점포였어요. 우리가 불우이웃 돕기 얘기를 하니까 본사에서 옷을 보내 줬어요.  옷을 만들면, 런칭할 때 샘플링을 만들잖아요. 그게 엄청 많아요. 그걸 큰 트럭으로 가져와서 일맥원이랑 구세군이랑 다 나눠줬어요. 하도 많이 줘서 창고에 넣어놨다가 계절에 맞게 애들한테 갖다 줬어요.  5년 정도를 그렇게 했어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가게에만 매여 있는 삶이 지루하지 않았다. 늘 열정이 넘쳤다. 사는 데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고2였던 작은아들이 친구들이랑 물놀이 가서 사고를 당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부부는 삶의 의지를 잃었다. 매장에 온 손님들에게 그들의 고통을 들키지 않게, 늘 환하게 웃는 것이 점점 힘들었다.

 

“제가 전원의 꿈이 있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시기가 굉장히 빨라졌죠. 마음을 달래려고, 마음을 붙일 데가 없어가지고, 집을 짓게 됐어요. 땅을 보러 다니고, 조경을 손수 다 했죠. 그 아픔을 잊으려고 일을 엄청나게 했어요. 8년 동안 조경 공사를 했어요.”

 

고향 울진으로 가고 싶었지만 우리 큰애 걱정이 앞섰어요

그는 집터를 찾아 전국을 돌았다. 그러면서 집짓기 공부를 했다. 둘째아이 생각이 사무쳐 와도 어떤 집이 좋을까를 생각했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 경북 울진도 생각해 봤다. 가난해서 지긋지긋했던 곳이지만 형제자매가 살고 있어서 피가 당기는 곳이었다.  물 좋고 산 좋은 전북 장수에 갔을 때는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멀리 갈 수 없었다.

 

“제가 울진에서 자리 잡으면,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애가 부모님 본다고 차타고 6시간 반을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해 봐요. 그게 너무 불안하죠. 제가 처음에 군산에 왔을 때 아무 일가친척도 없고 동문도 없어서, 외로움이 굉장히 심했어요. 혹시라도 제가 울진에 자리 잡으면, 아들이 또 거기로 와서 정착을 하면, 우리 아들도 저처럼 외로움을 탈거 아니에요?”

 

집터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서머싯 몸이 쓴 <달과 6펜스>의 ‘때로는 정말 신비스럽게도 자기가 속하는 곳이라고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찾아내는 수가 있다.  여기야말로 자기가 추구하던 고향인 것이다.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가운데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친숙한 사람들인 것처럼 그들 사이에 섞여서 안주한다’처럼 마음을 의탁할 수 있는 곳.

 

나포에 있는 언덕배기 밭, 나무 한 그루 없었다.  그런데도 김진철· 채수란 부부는 흡족했다.  밭을 정원으로 만드는 데 8년이 걸렸다.  지형에 맞는 나무들을 심었다.  돌로 층계를 만들고, 작은 인공폭포도 만들었다.  화려하지 않은 야생화가 저마다 군락을 이룬다.  2월에 복수초가 피기 시작해서 늦가을 용담초가 질 때까지, 그의 정원에는 꽃이 피어있다. 

 

그들 부부는 집짓기 전에 10년 동안 상가주택에 살았다.  겨울에는 이 갈리게 춥고, 여름에는 징그럽게 더웠다.  그래서 가장 많이 투자한 것은 난방과 단열이다.  주위환경과 햇빛, 바람을 고려해서 친환경적인 집을 지었다.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도 보통 건축물의 10분의 1 이하로 난방에너지를 쓰는 파시브 하우스다. 

 

 


집짓기 공부 3년, 조경 8년, 11년만에 파시브 주택을 짓다

집터 구하면서 집짓기 공부하는데 3년, 조경하는데 8년, 총 11년에 걸쳐 지은 집이다.  오래 준비하고, 설계해서 지었기 때문에 좌절이나 번뇌는 없었다.  다만, 그의 마음에 드는 건축자재를 구하기 위해 서울까지 드나드는 것이 번거로웠다.  그렇게 지어진 집은 여름에는 에어컨을 안 켜도 시원하고, 겨울에는 난방으로 기름 한 방울도 쓰지 않는다.

 

“우리 집에서 제일로 좋은 건 온돌방이에요, 황토방. 짚, 인진쑥, 숯가루, 해초가 들어갔어요.  우리 부부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서, ‘아휴, 잘 잤다’ 손잡고 일어나요.  몸이 정말 개운해요.  버섯 농사 짓고 난 폐목으로 난방을 하거든요.  버섯이 참나무잖아요.  수명 다한 나무를 쓰죠.” 

 

김진철씨가 집을 짓는 동안에 아내 채수란씨는 계속 가게를 지켰다.  전에는 그녀가 하는 일은 무조건 잘 됐다.  그녀가 “우리 이거 하자”고 일을 벌이고, 남편이 뒤치다꺼리 하면서, 하는 가게마다 성공시켰다.  그런데 둘째 아이를 사고로 보내고 나서는 무엇을 해도 다 안 됐다.  현상유지도 어려웠다.  그래도 10년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붙잡고 있었다.

 

“제가 우리 큰아들 6개월 때 가게 시작해서 그 애가 서른 살 때 손을 딱 놨거든요.  30년이라는 세월이 짧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미련이 없어요.  2010년에 방통대 들어가서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요.  우리 집 지은 걸로 <지금까지 살아온 집을 에너지 측면에서 분석>이라는 논문도 쓰고요.  올 2월에 졸업해요. 지금은 기타, 서예를 배우려고 하고요.”

 

아이 먼저 보내고 사는 건 다 덤, 봉사하며 살 거예요

그들 부부가 나포에 집 짓고 전원생활을 할 수 있는 건 가업을 이은 아들 김우람(32세, TNGT운영)씨 덕분이다. 혼자기에 더 강하게 키웠다. 군 제대하고 복학하기까지 6개월이 남았을 때 우람씨는 가장 고되다는 서울 문정동의 한 점포에서 판매 일을 했다. 반 지하 원룸에서 생활하며 밑바닥부터 배웠다. 돌아와서 학교 다니면서도 매장 일을 계속 했다.

 

모든 것이 평온해 보여도, 김진철씨 부부는 명절 때마다 허전했다. 다행스럽게 우람씨가 예쁜 나래씨를 만나 결혼해서 빛나를 낳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부모님 집에 온다. 꽃 중의 꽃은 사람 꽃, 김진철씨 집안은 손녀 덕분에 환해졌다. 더 온화해졌다. 그들 부부는 “우리 아들 장가 잘 들었어”라는 자랑을 참지 않았다. 예쁘게 사는 아들 부부를 대견하게 여겼다.

 

“제일 미안한 것이 애들하고 보낸 시간이 없어요. 해 준 게 없어. 추억도 없어요. 그냥 장사밖에 몰랐으니까. 제일 후회스러운 게 애들한테 공부 많이 시킨 거. 우리가 밖에서 장사하니까 일찍부터, 서너 살부터 미술학원 보냈어요. 우리 손녀는 걸음마 하면, 저하고 메뚜기 잡고, 개구리 잡으면서 키울 거예요. 자연을 벗 삼아서 크게 할 거야.” 

 


잘해 준 사람일수록 “나는 해 준 게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말은 아프다.  김진철씨는 자식에게 더 주고 싶다.  그가 세상을 떠나도, 자신이 살던 집에 아이들이 와서 살도록, 철근을 많이 써서 집을 지었다.  요즘, 그는 아내 대신 아이들 유치원과 학교 행사에 다니던 때처럼, 버섯농사를 신나게 좇고 있다.  삼식이(하루에 세 끼 먹는 남자)로 당당하게 산다. 

 

우리는 한겨울의 무채색 정원을 함께 걸었다.  채수란씨는 “우리 애한테 말한 적 있어요. ‘엄마는 가게 안 하면, 봉사할 거라고요’. 하고 싶은 공부도 끝났으니까 이제 실천해야죠.  애가 가고 나서 사는 건 다 덤이잖아요”라고 했다.  눈 내리면, 집은 더 아름다워진다며 다시 오라고도 했다.  나를 배웅해 주는 김진철씨 부부 뒤로, 그들의 눈물을 닦아준 집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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