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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공교육, 우리 돈을 안 내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4.01.01 13:27:3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자식이야.”

‘엄친아’, ‘엄친딸’을 기르는 부모일지라도, 언젠가는 말하게 된다.  자식한테 뻗은 손을 거두지 못하는 게 부모의 운명이다.  미숙아로 태어나서 장애가 된 아이, 건강했다가 갑자기 뇌손상을 입은 아이, 자기만의 세상에서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자폐장애 아이도, 자식이다.  그 애들을 키우는, 발달장애성인 평생교육기관 설립위원회(이하 장평위) 엄마들을 만났다.

 

“부모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을 포기 못해요.  내가 죽어갈 망정, 시설에 보내고 싶지 않죠.  그래서 장애성인 평생학교를 만들려고 하죠.  명화학교(특수학교) 졸업하고 나면, 갈 데가 없잖아요.  어렸을 때는 부모가 데리고 다닐 만해요.  근데 애들은 크고 말을 안 듣지, 우리는 나이 먹으니까 체력 떨어지지.  너무 힘들어요.  우리가 60-70대 되고, 애들이 40-50대 되면, 어떻게 감당을 하냐고요?”

 

“우리 애가 스물여섯 살, 돈 벌어야 할 나이잖아요.  지적장애 1급이어서 지금도 제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씻겨서 옷 입혀서 잠자기 전까지, 계속 돌봐요.  잠들고 나서도 신경 써야 해요.  자다가도 일어나니까요. 항상 거실에서 셋이 자요.  저희는 6층에 살면서도 안전망이 다 있어요.  여름에도 안 열어요.  방충망을 밀면 떨어져 버리니까요.”

 

성규는 명화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엄마”소리를 못 했다.  열여덟 살인 지금은 건강한 아이 같다.  그러나 자면서도 경기를 한다.  밤에도 엄마가 항상 옆에 있어야 한다.  준석이는 중1, 아직 말을 못 한다.  자다가도 일어나서 앉는다.  하룻밤에도 열 번 이상을 앉은 채 졸고 있다.  준석이 엄마도 깊은 잠을 잔 적 없다.  모두들 아이들을 기르면서 그렇게 살아왔다.

 

아기들은 태어나 얼마동안은 잠을 잘 못 잔다.  우리 큰애는 24개월이 될 때까지 그랬다.  지독하게 울었다.  일 끝나고 데리러 갈 때마다 나는 아기 울음소리 듣는 게 괴로웠다.  막 도망쳤다.  그러다 보니까 달리기를 잘 하게 돼서 마라톤 하프 코스를 뛰었다. 병원 응급실도 갔다.  무당이 와서 굿도 했다.  나는 우는 아기 옆에서 냄비뚜껑을 던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너는 전생에 일제 강점기 시대 독립 운동가였어?  일본놈들이 잠 안 재우는 고문을 했냐?  무릎 꿇고 동지들의 은신처를 말했어?  그래서 잠 안 자는 사람으로 태어난 거냐고?”

 

육아에 치이는 엄마들은 아기들한테 “어서 커라. 어서 커”라고 혼잣말을 한다.  아기는 자라 유치원에 가고, 친구가 생긴다.  어느 때부터는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방문을 닫는다. 이제는 아침마다 깨우는 게 전쟁 치르듯 격렬하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몸이 자라도, 엄마 손길 안에서 산다.  식구들이 언제나 긴장하고 살펴야 한다.

 

처음에 장애인식 개선은 지체장애에 맞춰져 있었다.  정서적으로 다른 발달장애 아이들을 보면, 정신장애랑 구별을 못 했다.  정신병원에 넣어놓고 보니까 서로 양상이 다른 게 보였다고 한다.  발달장애가 있는 어떤 아이들은 1초에 형광등이 몇 번 깜빡이는지도 느낀다.  소리도, 우리가 듣는 데시벨의 범위를 넘어서까지 들을 수 있으니까 귀를 막고 괴로워한다.

 

자폐장애 아이들은 다 자랄 때가지도 머리 깎는 게 힘들다.  죽음의 공포를 느낄 만큼 기계 소리를 크게 듣는다.  아이들은 서너 살 정도만 돼도, ‘이건 안전하구나’라고 인지를 한다. 발달장애 아이들은 백 번, 천 번, 만 번을 학습하고 나서야 마음을 연다.  받아들인다.  그 애들의 뇌에는 잡은 걸 논다는 개념이 없어서, 공 던지기도 지독하게 학습해야 익힌다.

 

일반인들은 그게 이해가 안 된다.  그 애들의 감각은 남다르다.  태영이는 꼬마일 때 맨 손으로 고드름을 쥐고 다녔다.  사람들은 “장군감이다”라고 덕담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가운 것을 느끼는 감각에 이상이 있었던 거였다.  정훈이는 한 여름에도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렸다.  그 상태만을 고집했다.

 

템플 그랜딘이라는 동물학 박사는 자폐장애가 있다.  그녀는 스스로 꼭 끼는 기구를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안정을 찾았다.  자폐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계속 왔다 갔다 한다.  뱅글뱅글 돈다.  모서리만 찾아 만진다.  손톱이 부서져라 두드린다.  그게 아이들한테는 의미 있는 행동이다.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안정을 찾는 거다.

 

“<쿠슐라와 그림책 이야기>라는 책이 있어요.  그 애가 지능이 낮았는데 엄마가 계속 그림책을 읽어줘요.  그래가지고, 애가 거의 정상에 가깝게 되는 거예요.  저는 우리 태영이를 그렇게 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태영이는 책을 찢어.  안 봐요.  드라마도 안 봐.  요 근래 태영이를 이해하게 된 건데 걔는 인지가 안 되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되니까 재미가 없잖아.”

 

고등 3학년 태영의 엄마 김은아님이 말하자 송영숙님은 “나는 지금도 우리 정훈이를 이해 못 해”하면서 웃었다.  다른 엄마들도 웃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장평위 엄마들이 얼마나 속을 태워가며 울었을지, 나는 모른다.  그녀들과 겨우 두세 시간 보내고서는 짐작조차 못한다.  똑같이 자폐장애지만 100인 100색의 세계를 가진 아이들, 그녀들은 말했다.

 

 

 

“우리 애들 이야기는 3박 4일을 해도 안 끝나요.”

2011년부터 장평위 엄마들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도 다닐 수 있는 평생학교를 준비해왔다.  올해 10월에는, 400명이 모여 ‘장애성인 평생교육 활성화를 위한 토론회’도 열었다.  법으로 제도화 하자는 것에 깊이 공감하는 자리였다.  2013년 11월 18일에는 군산시의회 강성옥 시의원의 발의로 ‘발달장애성인 평생교육지원조례’가 제정되었다.

 

우리나라 지자체 중 유일하게 장애성인 평생학교를 군산시장이 만들게 했다.  지자체장이 교육자와 운영위 지원도 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 놓았다.  그 동안 장평위의 염원은 사상누각이 된 적 많았다.  담당 공무원만 바뀌어도 정책은 흔들렸다.  이제는 법적인 근거를 두고  추진할 수 있다.  군산시가 앞장서서 공교육으로 가는 길을 열게 된다.

 

평생학교를 운영할 세세한 규칙은 나오지 않았다.  롤모델은 있다.  영등포구청에서 위탁한 ‘사람사랑 나눔학교’다.  거기서는 발달장애성인들한테 3-4년간 직업교육을 한다.  그들이 운영하는 도시락 공장, 슈퍼, 카페에서 일하게 만든다.  생활 속으로, 사회 속으로 내보낸다.  군산 장애성인 평생학교의 최종적인 목표도, 아이들이 직업을 갖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우리 일에 관심을 갖는 게 뭘까요?  ‘이거, 우리 세금 들어가는 거 아니야?’  세금이죠, 세금.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오고, 학교가 지어질 때, 장애 아이를 둔 우리 세금도 들어가죠.  ‘우리 애들 학교를 세울 때, 당신들 세금이 들어가는 거예요.  이거는 서로 나누는 거지요’ 그럼 또 물어요.  ‘학비는? 학비는 어떻게 할거냐고요?’

 

저소득층은 군산시가 담당해야죠.  나머지는 우리가 학비를 내고 다닐 거예요.  필요하면 기부금도 내고요.  그렇게 학교 운영이 되게 할 거예요.  돈을 안 내겠다는 목적이 아니거든요.  우리 아이의 안정되고, 평화롭고, 지속적인 교육을 위해서 공교육을 얘기하는 거예요.  돈을 안 내려고 공교육으로 가자는 게 아니거든요.” 

 

정훈 엄마 송영숙님의 말에 나는 안도했다.  장애학교가 들어오면, 집값 떨어진다고 못 짓게 하는 데모장면부터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모든 아이들에게 무료 급식을 한다고 했을 때 펄펄 뛰던 사람들도 이제는 딴지 걸지 않는다.  ‘장애성인 평생학교도 그렇게 자리 잡아 가겠지’ 하며 안심한 순간, 장평위 회장 홍현주님이 나한테 물었다.

 

“어때요? 장평위에 대해서 들어보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쓰고 살았다.  어릴 때, 시골 살 때는 동네마다 ‘바보 형’이 있었다.  그 애들에게 돌 던질 때도 있었지만, 그냥 같이 놀았다.  학교에 가도, 학년에 한두 명은 아픈 친구가 있었다.  친구가 경기를 하면서 쓰러져도, 우리는 소리 지르며 도망가지 않았다.  한참 지나면 괜찮아지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일상생활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마주칠 일이 별로 없다.  장애에 대해 모르면서 혐오하는 사람들은 늘어난다.  발달장애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들을 보면, 흘끔흘끔 쳐다본다.  그러니 주로 집안에서만 머문다.  여행 할 기회가 생겨도 망설이다가 포기한다.  엄마들은 아이가 스무 살이 넘어도, 온전하게 자기만을 위한 하루를 보낸 적이 없다.

 

장애 아이를 그 부모한테만 짊어지라고 하는 것은 가혹하다.  사회가 진정성을 다해 빈곤과 노후· 불평등한 교육을 해소하기 위해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당사자들은 실감한다.  이제 막 싹을 틔운 장애성인 평생학교, 그들만의 학교라고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내 언니의 아들이, 우리 이웃의 딸이, 아무리 늦더라도 자립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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