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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사람은 ‘빨개벗었다’고 하지 않고, 누드라고 하는 거야.”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3.11.01 16:55:43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미국사람 훠드 미혜 김(MiHae K. Ford)은 1981년까지는 군산사람 김미혜였다. 스물한 살 미혜는 이모네 집에서 열린 파티에 갔다가 이모부의 직장 상사인 미국 공군 장교 브라이언을 만났다. 그 때까지 미혜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첫 데이트 때 둘은 영어사전을 끼고 만났다. 브라이언이 해 지는 버스 차창을 보며 가르쳐 준 첫 미국말은 Sunset(일몰)이었다.

 

그 때는 미군과 함께 걸으면, 대놓고 욕하던 때. 한국말을 모르는 브라이언은 사람들이 욕해도 웃으며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했다. 미혜는 브라이언에게, 속을 뒤집는 다양한 한국 욕을 가르쳤다. 그러고도 둘은 데이트할 때 나란히 서지 않았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걸었다. 집에 오면 미혜 아버지가 둘의 사이를 반대했다.

 

브라이언은 영국사람, 어릴 때 꿈이 미 공군이었다. “아! 그 집 아들”이라면 다 알던 명문가 청년 브라이언은 달랑 뱃삯만 들고 미국에 와서 공군이 되었다. 그 때가 19살. 그리고는 줄곧 미국사람이 되어 살았지만 어릴 때 영국에서 배운 예절은 몸에 지니고 살았다. 미혜 아버지가 따라주신 술도, 한국 예법대로 두 손으로 받아서, 고개를 돌리고 마셨다. 

 

그래서겠지. 미혜 할머니 상을 치르고, 절에서 49재를 모실 때는 브라이언도 자리를 같이 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궁금했다. 생과 사의 중간상태에서 중음신이 되어 떠도는 할머니를, 좋은 곳으로 보내드리는 제사에 참여한, 몹시 어울리지 않는 백인남자의 정체가. 그래서 누구냐고 물었다. 미혜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 사위 될 사람이여.”

 

 


 

그들 부부는 1980년대 초에 3년 동안을 군산에서 살았다. 스무 살 좀 지나서 새색시가 된 미혜에게 친정엄마는 “평생 살 사람이다. 너 아껴주는 사람이 최고다”라고 말했다. 그 말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나이였지만 그녀는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브라이언이 입을 내복을 온돌방 바닥에 넣어서 덥혔다. 군복을 빳빳하게 다리고, 군화를 반짝반짝 닦아놓았다. 

 

“미혜,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해.”

브라이언의 말대로 새색시 미혜는 하고 싶은 걸 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놀기. 태권도 유단자 되기. 그래도 새신랑 브라이언이 퇴근하는 오후 3시에는 무조건 장을 봐서 집에 왔다. 연탄불 아궁이 하나로 미국식 식사를 차렸다. 이 시절에 미혜는, ‘내 알 바 아니던’ 우리나라 역사와 풍속까지 브라이언에게 배웠다.

 

“미혜! 사람들은 외국에서 산다고 하면, 대단한 걸로 알아. 그냥 사는 방식이 다른 거야. 미국 가서 살아도 미혜의 몸과 정신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마. 대신, 미국 생활에 적응을 해야 해. 미혜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해. 하다 보면 강해질 거야.”

 

1983년, 미국 플로리다로 아주 살러가는 비행기 안에서 브라이언이 한 말이다. 미혜는 곧바로 미술 대학에 진학했다. 미술 실기 수업을 못 알아듣는 미혜 옆에는 브라이언이 앉았다. 교양 과목들은 미혜가 수업 시간 전체를 녹음했다. 브라이언 자신도 그림과 유아교육을 전공하면서도, 밤마다 수업 녹취내용을 풀어서 미혜에게 가르쳤다. 

 

미혜는 하루에 3시간씩만 자며 그림 그리고 공부했다. 미국인들은 영어도 못 하면서 ‘올A’를 맞는 그녀가 신기해서 “넌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공부하니?”라고 물었다. “결혼해서 온 거야”라고 말하면, 그들의 태도는 싹 달라졌다. 한국도 미국도 사람 사는 곳, 편견으로 상처를 주었다. 성적 좋은 미혜를 칭찬하며 “한국 사람은 너처럼 다 독종이니?”해도 외로웠다.

 

군산에서는 부부 싸움할 때 “한국여자는 미안하단 말 못 해?” 라고 했던 브라이언은 미국에서는 달랐다. 한국과 딴 판으로 몹시 넓고, 오직 여름만 있는 플로리다에서, 미혜가 의지할 사람은 브라이언 뿐. 그는 아침이면 먼저 음악을 켜서 미혜를 깨우고, 마당에서 꺾은 꽃 한 송이와 아침밥을 침대로 갖다 주었다. 목욕물을 받아주고, 차에 에어컨을 켜놓고 기다렸다.

 

 


 

브라이언 미혜 부부는 어머니 칠순 때 영국에 갔다가 프랑스로 건너갔다. 브라이언은 아내가 파리 곳곳의 예술작품을 꼭 봐야한다고 여겼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었지만(이후 3년 동안 카드빚을 갚음), 택시를 타고 몇날 며칠을 둘러봤다. 스물다섯 살 미혜는 해변의 사람들 보고 “naked(빨개벗은), naked!" 하면서 충격 먹은 걸 표현했다. 브라이언이 말했다.

 

 


 

“미혜, 그림 그리는 사람은 ‘빨개벗었다’고 하지 않고, 누드라고 하는 거야.”

미국으로 돌아와 공부하고 그림 그리던 미혜는 또 다시 경악했다. 화가 던 앤드류(Don Andrews)는 ‘머리카락이 발끝까지 닿는 동양에서 온 미인’ 미혜에게 누드모델을 제안했다. 미혜는 펄펄 뛰었지만 남편 브라이언은 “미혜, 당신은 예술하는 사람이야. 누드모델이 되는 것은, 예술에 기여하는 한 방법이야” 라고 했다.

 

브라이언이 태어난 유럽에서는 햇볕이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동화책에 나오는 해도 따뜻한 노란색이다. 그들은 해를 통해서만 공급되는 비타민 D가 부족하다. 햇볕 아래서 옷을 벗는 게 이상하지 않다. 반면, 동양의 해는 강렬한 빨강, 피부를 태워버릴 만큼 위력이 있다. 그러니 ‘빨개벗는’것은 위험하다. 브라이언은 그런 문화적 차이를 미혜에게 말했다.

 

미혜는 기꺼이 누드모델이 되었다. 화가 던 앤드류가 모델료를 주겠다고 했을 때, 브라이언은 돈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화가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그의 작품을 미혜와 브라이언에게 주었다. 오늘날, 미혜의 누드를 그린 던 앤드류는, 명성 있는 화가가 되어 있다. 그래서 미혜 브라이언 부부가 갖고 있는 던 앤드류의 그림은 값이 꽤 나간다.

    

 


 

그렇게 미국에서 20여년, 훠드 미혜 김은 화가로 자리 잡았다. 중간에 한국에 와서 2년을 살다 간 적도 있다. 그런데도 한국의 식구들이, 사계절이, 웅장한 산의 능선이 그리웠다. 한국의 미대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늘 “미혜, 하고 싶은 것은 모두 해”라고 말하던 브라이언은 “한국 가서 살자”고 했다. 그 때가 2000년, 지금까지 그들 부부는 군산에 살고 있다.

 

“저 나무 이름이 뭐예요?”

미혜 부부를 만난 날, 브라이언은 내게 메타쉐콰이어 나무 이름을 물었다. 브라이언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듯한 그의 영어 말씨는 또박또박했다. 영국식 고급 영어의 표본이라고 하는 휴 그랜트의 발음(그가 주연한 <노팅힐>을 50번 듣고 읽었음)보다 더 와 닿았다. 브라이언의 말씨는 영어를 할 줄 모르던 미혜와 살면서 자연스럽게 그리 됐을 것이다. 

 

차 마시면서도 미혜 손을 잡는 브라이언, 그는 미혜 배려를 지독하게 했다. 미혜가 대학에 다닐 때, 부부는 두 달 예정으로 군산에 왔다. 그런데 브라이언은 한 달 먼저 갔다. 두 달 동안 실컷 논 미혜가 미국 집에 가 보니까 브라이언은 대장암 수술을 한 뒤였다. 행여, 미혜가 브라이언의 투병을 알면, 즐겁게 놀지 않고 올까 봐 혼자서 꿋꿋하게 감당했다. 

 

그들 부부가 군산에 온 지 13년. 미혜는 전북대 미대를 졸업하고, 대학원도 마쳤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나운2동 동사무소에서 아줌마들에게 영어도 가르친다. 완벽해지려고 치열하게 영어 공부했던 미혜는 “남의 나라 말이니까 틀리는 게 당연해” 라고 격려해준다. 군산을 속속들이 잘 아는 브라이언도 군장대학과 서해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얼마 전, 훠드 미혜 김은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를 했다. 고흐, 고갱, 샤갈 같은 화가들 그림 밖에 모르는 나는, 국화꽃 속에 ‘빨개벗은’ 여자들이 있는 미혜 그림이 좋았다. 키 큰 나무들이 빼곡하게 서 있는데 빛이 새어나오는 그림 앞에서는 오래 머물렀다. 홍수로 불어난 개울물을 보고만 있어도 속도가 느껴지고 멀미가 나듯, 아스라한 빛은 여운이 남았다.  

 

한국에 돌아온 지 3년째이던 2003년부터 미혜는 여러 미술 대회에서 입선하고, 상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훠드 미혜 김이라는 이름이 내걸릴 때마다 말하기도 했다. “남편 브라이언이 뒷바라지를 해 줬기 때문에 미혜가 화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거야”라고. 그러나 브라이언은 분명하게 말한다. 

 

“미혜가 진지하게 파고들어서 자기 일을 성취한 것뿐이야.”

나는 기원전 500년대,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를 생각했다. 그는 한 때 자신을 신이라고 여길 정도로 ‘자뻑’ 이 심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웃나라 페르시아 공주 아미티스와 정략 결혼했는데 사랑에 빠졌다. 아미티스는 친정 동네 메디아(지금의 이란)의 산과 계곡을 그리워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공중 정원을 만들어 왕비 고향의 풀과 나무들을 옮겨왔다. 

 

브라이언은 아내를 위해서 군산의 은파 유원지를 플로리다로 옮겨주지 않았다. 미혜도 ‘브라이언이 어떻게 해 주겠지’ 기대만 하면서 세월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브라이언은 미혜가  자신을, 나고 자랐던 군산을, 그리워했던 한국의 산들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길을 알아봐줬다. 그녀는 그 길을 스스로 다지며 걸어서 화가 훠드 미혜 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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