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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폭탄’ 맞고도 자부심은 그대로, “80살 넘드락까지 할 거요”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6.01.01 17:29:15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손남석씨 부부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그날 군산에는 441mm의 비가 내렸다. 단 8시간 만에 쏟아진 양이 그렇다. 어떤 사람은 자동차가 도로 위로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고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라고 혼잣말이 나왔단다. 전기와 물의 공급이 끊긴 아파트 단지도 많았다. 주택가와 상가의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2012년 8월 13일이었다.   

“신문하고 텔레비로만 수해를 봤지, 그게 얼마만큼 힘든 일인지는 몰랐어요. 당하고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마음으로도, 금전적으로도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초토화가 됐당게요. 아무 것도 없어요. 있는 것이라고는 흙하고 뻘뿐이야. 근디 살라믄 뭐라도 혀야 해. 하도 막막한 게 포기할라고 했어요. (한숨) ‘이거 갖고 죽으면 안 되지’ 하고 일어섰어요.”

손남석씨는 13평 짜리 가게를 한다. 도장과 인쇄를 전문으로 하는 ‘일도당’. 이십대 청년시절부터 한 일이다. 손남석씨의 아버지 고 손인기씨는 1943년에 ‘일도당’을 열었다. 그때 군산은 조선 사람보다 일본인이 더 많이 살던 곳이었다. 익산 함라에 사는 20대 청년 손인기씨는 먹고 살기 위해 군산으로 왔다. 글씨를 잘 쓰던 그가 택한 게 도장이었다.  

 

 

“사실, 아버님이 도장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과정은 자세히 몰라요. 필체가 참 좋으셨어요. 아마 타고난 것 같어요. 도장을 하면서 혼자 글씨를 배우셨대요. 오로지 한길만 알고 파고든 양반이셨어요. 자수성가하셨어요. 자식들 대학을 한꺼번에 세 명도 보냈으니까요. 그때는 여기에 시청이랑 법원이 있었어요. 군산의 큰 회사들도 직인은 우리 아버님한테 했습니다.”

아들 넷 중에서 셋째 아들인 손남석씨는 군산 수산고등전문학교 양식과에 다녔다. 1970년대 후반, 군산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살며 재미난 시절을 보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놀면서도 시대 변화는 읽었다. 주식투자 하는 사람들과 땅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가게에 남아 일을 했다.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모두 네 명. 어느 정도 기술을 익히게 되면, 태업을 했다. 남석씨는 아버지 속이 타들어가는 게 보였다. 한때 잘나갔지만 은퇴한, 아버지의 친구들은 ‘일도당’으로 와서 좌담을 나누는 것도 자주 보았다. 60대,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팔팔한 현역이었다. 어느 날 남석씨는 아버지의 기술을 배우자고 결심했다.

“그때 제가 스물네 살이었어요. 아버님 일을 유심히 보니까 수입도 좋더라고요.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젊을 때는 그런 게 안 보여야 정상인데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작심을 해 가지고 파고들었어요. 아버님은 ‘네가 하고 싶으면 해라’고 했죠. 많이 좋아하셨어요. 기술은 같은 집에서 먹고 자면 빨리 배워요. 그게 장점이에요.”

사람들은 “도장 파는 일해요”라고 말하면, 하찮게 보기도 했다. 그러나 남석씨의 아버지는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도 겉 넘지 않도록 기본부터 가르쳤다. 첫 번째는 도장의 ‘면 갈기’. 이름을 새기기 전 도장의 면은 평편하지 않다. 굴곡이 있다. 도장이 잘 안 찍힌다면, ‘면 갈기’가 충실하지 않아서다.

‘면 갈기’는 빼빠(사포)로 한다. 쉬워 보여도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아무리 수평을 맞추면서 갈아도 한쪽으로만 갈아진다. 할수록 가운데가 솟는다. 중앙 부분을 가는 게 기술이다. 잘 될 때까지 계속 배우면서 간다. 오랜 연마를 하고 난 뒤에야 평편하게 갈리는 순간이 온다. 아버지는 마침내 남석씨에게 “됐다!”라고 했다.

 

“그 다음에 칼질을 해요. 머릿속에 글씨체가 다 있어야 해요. 저는 아버님 하는 거를 계속 보면서 배웠죠. 도장 글씨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서체’를 많이 해요. 꼬불꼬불해요. 말하자면, 글씨에 이쁨을 주는 거예요. 꽉 차게 연결을 해 줘요. 지금은 머릿속에 글자가 다 있지만 처음에는 종이에 써서 했어요. 도장 글씨는 거꾸로니까 연습을 많이 했어요.”

1981년 11월, 손남석씨는 이은자씨와 결혼했다. 은자씨는 가게 일과 살림을 겸했다. 도장 가게는 겨울에 크리스마스카드와 연하장을 판매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빴다. 남석씨의 수입도 좋았다. 그는 인쇄 부분을 주로 맡아서 했다. 남석씨 부부의 큰딸이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아내 은자씨는 주위 사람들이 살림을 일으키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남편이 회사에 다니는 집들은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이 있으니까 규모에 맞게 저축을 했다. 주식투자를 했다. 목돈이 모이면 땅을 샀다. 세상 바뀌는 걸 간파하고 업종을 바꿔가며 장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먹고 싶은 것을 먹어가면서 여유 있게 사는 것 같았다. 은자씨는 남석씨에게 다른 일을 해보자고, 땅도 사 두자고 말했다.

“나는 자부심으로 이 일을 한다고! 땅 살 것 같으면 안 해. 기계를 사야지 무슨 땅이야?”  

 

남석씨도 아내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집사람은 돈이 안 모이니까 사는 게 재미없겠다’라고 짐작을 했다. 그러나 계속 일하려면 기계가 필요했다. 도장 파는 기계, 명함 파는 기계, 인쇄 기계를 사 들였다. 할부금이 끝나면, 또 할부로 기계를 들였다. 어떤 인쇄 기계는 현금 1,500만원을 주고 샀다. 당시의 아파트 한 채 값과 맞먹었다. 

은자씨도 남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한눈을 팔지 않는 남석씨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투자해서 돈 벌고, 아파트 사는 것이 눈에 안 들어온다는 것을. 조그만 자영업도 서로 경쟁이 치열해서 다른 사람 것을 빼앗아 와야 하는데 한길만 파는 남석씨 성정에 맞지 않다는 것도. 그래서 은자씨는 남편의 자부심을 지켜주는 쪽을 택했다.

남석씨 부부는 아이 둘에게 대학 공부를 시킬 만큼은 돈을 벌었다. 가게와 살림집이 붙은 38평짜리 집을 살 만큼은 벌었다. 대학 졸업하고 취업 공부하는 아들에게 “걱정 말고 해라”고 할 만큼은 됐다. 그런데 3년 전 수해를 입고서 재기불능 상태가 됐다. 값비싼 인쇄 기계와 컴퓨터, 살림집의 가전제품이 모두 못 쓰게 됐다.

 

“재기불능 상태였어요. 가게 문을 열고 물을 빼야 하는데 못 열었어요. 전동셔터가 고장 나서 나흘간이나요. 비싼 기계가 전부 물에 잠겨버렸다는 뜻이에요. 천 몇 백만 원 짜리 기계를 내다버리고 고물 값 1만원을 받았어요. 그 고통이라는 것은 말 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36개월 할부도 끊고, 빚도 내고 해서 전부 새로 고치고 샀어요.”

가게 서랍장 위에 있던 아버지의 유품은 건질 수 있어 좋았다. 아버지가 수십 년간 썼던 도장 파는 칼은 몇 개나 남아있었다. 무척 세밀하게 팠던 회사나 관공서의 고무인, 그걸 찍어서 스크랩해 놓은 서류도 건질 수 있었다. 남석씨와 은자씨는 한 달 만에 다시 가게를 열었다. 단골손님들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찾아와 주었다.

도장과 인쇄를 겸하는 가게. 예순 살 직전의 남석씨는 일러스트를 배웠다. 오토 페이지나 도스, 파워포인트, 포토샵도 그는 혼자 한다. “주인이 해야 꼼꼼하게 일이 되지요”라는 남석씨는 기능직 직원을 따로 두지 않는다. 아내 은자씨는 “남편은 기술부장, 성격이 활달하고 사람들하고 허물없이 어울리는 저는 영업부장이라고 그냥 불러요” 라면서 웃었다.

“옛날처럼 인쇄가 많지 않아요. 스마트폰이 있어서 청첩장도 모바일로 많이 하잖아요. 그래도 저한테는 차별화된 기술이 있어요. 수제 도장이요. 서울에서 인터넷 보고 일부러 찾아오는 분들도 있어요. 인사동보다 싸고 훨씬 잘 한다면서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기도 하고요. 그래도 수제 도장은 우리 세대에서 끝날 것 같어요. 수요가 점점 없어져요.”

2년 전부터 남석씨의 아들 손정배(32)씨도 가업을 잇고 있다. 법원이 있는 군산 조촌동에서 일도당 분점을 맡아 한다. 정배씨도 도장의 기본인 ‘빼빠질’부터 배웠다. 그러나 미래 세대에 누가 수제 도장을 쓰겠는가. 그 분야의 작업은 배우지 않는다. 대신, 웹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다. 인쇄 광고를 접목해서 나갈 전망이다. 

“옛날에는 아버지들이 ‘너는 이거 하지 말고 공부해라’고 했죠. 지금은 대형마트나 인터넷이 발달해서 동네 장사는 안 돼요. 그래도 기술은 항상 필요하잖아요. 부모들이 자식한테 기술을 물려주는 시대가 됐어요. 힘들게 직장 가라고 덜 해요. 어떻게 보면, 부모 직업 받는 거는 땅 짚고 헤엄치기예요. 작은 가게지만 장비 있고, 명성 있고, 기술만 확실하게 배우면 되잖아요. 큰돈은 못 벌어도, 자부심을 갖고 일 할 수가 있어요.”

 

‘일도당’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보석 진열대. 은자씨가 레이스로 떠 놓은 받침대 위에는 각종 도장이 참 많다. 수해로 입은 빚을 갚으려면 앞으로도 3년을 더 내핍하고 살아야 하니까 은자씨는 “돈 복잡해요. 조금만 사요”라며 말렸다. 그러나 인쇄 디자인도 잘 하고, 법인 도장, 고무인 등을 즉석해서 해주는 기술자 남편의 ‘자재 욕심’을 깨지는 않았다.  

손남석씨 부부는 30년 넘게 같은 일을 해 왔다. 은자씨는 “가끔은 회의가 들어요. 열심히 사는 사람은 사는 게 힘들고, 투기 한 사람이 잘 사는 시대라서요” 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 땅을 사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기계를 사 들였던 남석씨는 아내를 보면서 “땅 안 산 건 조금 후회가 돼요” 라고 웃었다. 그렇지만 자신 있게 말했다.

“내가 이 사람한테 돈은 많이 못 벌어줬어요. 하지만 이 일은 안정화된 직장이지요. 노후 생활을 이 가게로 할 거요. 우리 아버지도 여든이 다 되어서 손을 놓으셨어요. 나도 80살 넘드락까지 할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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