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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봐줄테니 유학 다녀와라”, 시어머니가 이뤄준 꿈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5.11.01 11:37:22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무대 올라가자마자 뭔가 공기가 달랐어요. 편안하지가 않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어요. 무대에 서면 긴장은 조금씩 했어요. 그래도 연주를 망칠만큼 떤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입시 때는 완전히 달랐어요. 결과 나오고 나서 부모님이랑 선생님은 충격에 빠졌어요. 이럴 리가 없다고요. 저는 알았어요. 많이 떨었으니까요. 갑자기 무대공포증이 생긴 거예요.” 

전주예술고에 다닌 윤정은 첼로 전공. 손에 굳은살이 생길 만큼 연습했다. 주말마다 학교에서 열리는 ‘위클리’ 연주회 무대에 섰다. 서울에 가서 레슨을 받았다. 대학에서 주최하는 콩쿠르에 나가서 1등을 한 적도 있다. 지도하는 선생님이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느는구나”  칭찬도 많이 했다. 그러나 윤정은 입시에 실패했다. 인생이 끝난 것 같았다.  

윤정은 미숙아로 태어났다. 첫 돌 때에 앉지도 못하고 엎어져 있었다. 빈혈이 몹시 심한 아기였다. 유치원 가는 날보다 병원에 가는 날이 더 많았다. ‘뺑뺑이’로 당첨된 군산 부속초등학교. 입학 업무를 하는 사람이 윤정의 어머니에게 “애가 너무 조그만데, 학습 능력까지 떨어져요. 한 해 더 집에 데리고 있다가 입학 시키세요” 라고 권유했다.

1월생인 윤정은 꽉 찬 여덟 살. 어머니와 같이 학교에 다녔다. 윤정이 교실로 들어가면, 어머니는 내내 복도에 서 있었다. 윤정은 하고 싶은 게 하나도 없었다. 학교 갔다가 병원에 들르고, 집에 와서는 누워 있었다. 텔레비전 보거나 색칠공부 하는 게 다였다. 어머니 아버지는 오직, “건강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

“어때? 진짜 좋지?”
 
플루트를 배우던 언니 주아가 윤정에게 음악을 들려주며 물었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 첼로 연주 소리는 힘없이 누워있던 초등 5학년 윤정을 일으켜 세웠다. 태어나 처음으로 호기심을 느꼈다. 연주 소리는 윤정을 편안하게 안아주는 것 같았다. 윤정은 어머니한테 “첼로는 어떻게 생겼어요?”라고 물었다. 어머니도 잘 모르는 악기라고 했다.

다음 날, 어머니는 윤정을 데리고 군산에 한 곳 뿐이던 악기전문점에 갔다. 윤정은 첼로를 처음 보았다. 가녀린 자신보다 훨씬 웅장하고 큰 첼로, 가격은 50만 원. 얼마간은 집안 살림에 타격을 줄만큼 큰돈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딸에게 첼로를 사주었다.  윤정을 가르쳐주기 위해 첼로 선생님도 집으로 왔다. 

“그냥 좋았어요. 활을 당기면 나는 소리도 신기하고요. 선생님이 저보고 첼로에 재주가 있대요. 뭔가 잘 한다는 소리를, 엄마도 저도 처음 듣는 거잖아요. 더 잘 하고 싶었어요. 선생님은 좀 무서운 편이었어요. 제가 몸이 약하니까 더 강하게 하셨던 것 같아요.”

윤정은 신문에 난 ‘전주예고 입시 공고’를 봤다. 중 2때였다. 그 학교에 입학하는 게 꿈이 되었다. 첼로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준비해 온 애들이 가는 학교야. 너처럼 체력 약한 애는 견딜 수가 없어” 라면서 말렸다. 그러나 윤정의 아버지 어머니 생각은 달랐다. 딸아이가 처음으로 해 보고 싶은 거니까 준비를 하자고.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 전까지 윤정이 첼로 연습하는 시간은 길어야 하루 30분.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가려면 달라져야 했다. 윤정은 체력을 키워준다는 온갖 보약을 먹으면서 하루에 3-4시간씩 연습했다. 몸이 힘들어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다. 스스로도 연주 실력이 느는 게 느껴졌다. 안정적인 점수를 받아서 합격했다. 처음으로 이룬 성취였다.

“예고에 가보니까 어려서부터 한 친구들은 수준이 달랐어요. 우리 학년에 첼로 전공이 여덟 명인데 그 중에 두 명은 굉장히 뛰어났어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저는 늦게 시작했으니까 더 열심히 하고 싶었어요. 학교가 전북 완주 외곽에 있는데 반딧불이가 보일 정도로 청정했어요. 덕분에 빈혈도 많이 좋아져서 활기차졌고요.” 

예고 학생들은 쉴 새 없이 시창청음, 실내악 같은 음악 관련 수업을 받는다. 실기 위주로 공부한다. 적응 못 해서 일반고로 전학 가는 친구도 있다. 윤정은 정규 수업 끝나고 다시 오후 9시부터 자정까지 3시간씩 연습하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친구랑 둘이 연습하다가 연습실에서 잠들어 버려서 기숙사가 발칵 뒤집어진 날도 있었다. 

평생의 은사인 민기숙 선생님도 예고에서 만났다. 선생님은 고3 윤정에게 “대학 입시에서는 악기도 어느 정도 좋아야 해” 라면서 선생님의 선생님이 썼던, 100년 넘은 악기를 빌려줬다. 감히 만지지도 못할 만큼 비싼 첼로였다. 민기숙 선생님은 “나는 악기 두 개니까 네가 입시할 때까지만 써”라고 했다. 그랬는데 윤정은 원하는 대학에 못 갔다. 

“윤정아, 대학은 네 얼굴이 될 수 없어. 좋은 대학 나왔다고, 음악을 끝까지 하는 건 아니야. 어느 대학을 다니든지, 첼로를 계속 하는 게 중요해. 끝까지 가.”

민기숙 선생님은 말했다. 윤정은 그 말뜻을 몰랐다. 다만, 입시에 온 힘을 쏟아 부어서 재수할 엄두를 못 냈다. 전주대학교 음대에 진학했다. 윤정은 1학년 1학기만 다니고는 휴학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은 더 아팠다.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니야’라는 생각만 들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간 친구들을 만나러 가서 놀았다. 연주회도 많이 봤다. 

“과 친구들이 저보다 못하는 것 같았어요. (웃음) 건방졌어요. 근데 민기숙 선생님(윤정이 다니는 대학에도 출강함)이 ‘이제 고만 하고 내려 와’ 그러시더라고요. 복학해서는 선생님한테 테크닉적인 기술보다는 연주 정신을 많이 배웠어요. 지치지 않고, 끝까지 하는 거요. 친구들이랑 열심히 했어요. 4학년 때는 앙상블 피아토(호흡)를 만들었고요.”

두 개 이상의 악기가 모여서 연주하는 게 앙상블. 윤정과 친구들은 오보에, 피아노 두 대, 바이올린, 첼로로 구성된 연주회를 열었다. 꽤 비싼 대관료와 드레스, 악보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개인 지도를 하고, 햄버거 가게에서 알바를 했다. 앙상블 연주회 끝나고서는 “1년은 한두 번은 계속 하자”고 약속했다.

 

대학을 졸업한 윤정씨는 학생들 개인지도를 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최세운씨를 만나 결혼했다. 맞는 드레스가 없는 만삭 때도 연주회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윤정씨의 음악인생은  끝났다. 스물아홉 살 봄, 아기를 낳자마자. 아기는 제 엄마한테만 매달렸다. 밤중에도 수 없이 깨서 울며 보챘다. 24개월까지 그랬다. 첼로를 연주할 마음의 여유도, 시간도 사라졌다.

인기 떨어진 대중 가수들은 밤무대라도 선다는 말이 있다. 돈 때문만은 아니라고.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 받기 위해서란다. 윤정씨도 무대에 서서 박수 받을 때 사랑받는 느낌이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서 행복했다. 그러나 엄마가 되면서 첼로 활을 잡을 시간조차 없었다. 늘 쪽잠만 자니까 신경이 곤두섰다.

“겸이 세 살 때 유학 기회가 왔어요. 오스트리아에 있는 음대였어요. 저를 아는 교수님이 ‘윤정아, 갈래?’ 하는데 ‘애기가 안 떨어져서 못 가요’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어요. 그런데 눈물이 너무 많이 나는 거예요. 가고 싶어서요.”

윤정씨의 남편은 “걱정하지 말고 갔다 와”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갈 수 있어? 애기가 나만 찾는데?” 하며 포기했다. 다음 날, 여수 사는 시어머니가 군산 올라와서 애기 돌봐줄 테니까 공부하러 가라고 했다. 서른한 살에 오스트리아로 간 윤정씨, 오롯이 첼로만 했다. 음악에는 공통어가 있으니까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도 따라갈 수 있었다.

결혼하고 나서 몇 년 만에 갖는 혼자만의 시간, ‘처음 만나는 자유’처럼 온전히 만끽했다. 아기 걱정이 됐지만 자신한테만 집중하려고 했다. 강의와 첼로 연습만 있는 빡빡한 생활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몸도 크게 아픈 적 없었다. 윤정씨는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졸업 연주회까지 무사히 마쳤다. 

“애기 걱정 하지 마라. 얼마나 잘 노는지 몰라. 너 없어도 되겠다.”    

시어머니는 늘 그렇게 전화를 했다. 윤정씨가 돌아와 보니 겸이는 여전히 손이 많이 가는 아기, 어머니가 고생 많이 했다. 윤정씨가 하는 일도 여전했다. 초등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가르치고, 개인 레슨을 하고, 당진 세한대와 군산 서해대에 일주일에 한 번씩 출강한다. 그래도 좋아하는 첼로를 연주해서 먹고 사니까 흡족하다고. 

거의 10년간 꾸려온 앙상블 ‘피아토’도 여전하다. 멤버들이 결혼하고, 아기 낳고 기르는 동안 객원 연주자를 쓰며 서로 기다려준다. 잘 하는 부분은 북돋우고, 부족한 부분은 메워준다. 서로의 음악적 취향을 존중해준다. 애틋하게 함께 간다. 관객의 호응까지 좋은 날에는 너무 짜릿하단다. 물론, 윤정씨의 무대 울렁증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박수 치는 관객들 얼굴을 보면 다 애기 얼굴이에요. 웃는 모습이 너무 감동이죠. 그래서 다 가정 있고, 애기 있고, 살림하면서도 무대에 서요. 앙상블은 멤버들이 너무 잘해도 깨질 수 있어요. 음악적 해석이나 뉘앙스를 자기 식대로 고집하면요. 반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연주자들이 하는데 진짜 아름다울 때가 있어요. 정서적으로 교류하고 양보해서 음악을 만들어 내니까요. 그게 앙상블의 묘미예요.”
윤정씨는 “고등학교랑 대학 때, 첼로만 해서 후회될 때가 있어요”라고 했다. 인문학적인 깊이가 없어서 슬럼프에 빠지면 오래갔다고. 그래서 책을 많이 읽었다. 음악 말고, 다른 세상을 보려고 그림도 보러 다녔다. 결혼하고 아기 키우는 아줌마가 되니까 비로소 감성도 풍부해졌단다. 슬픔도 더 짠하게 슬프고, 벅찬 기쁨도 아는 연주자가 되었다고. 

연주회를 하려면, 대관료만 해도 수백만 원이 든다. 따로 레슨도 받아야 하고, 의상도 마련해야 하고, 수입해오는 악보도 사야 한다. 멤버들끼리 그 돈을 갹출하는데 못 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머지 멤버들이 조금씩 더 내기도 한다. 4년 전부터는 전라북도에 문화예술기금 신청을 해서 선정이 됐다. 대관료를 지원 받아서 한결 가뿐하게 연주회를 준비한다.   

그러나 앙상블 ‘피아토’는 무대가 없는 무대에서도 연주한다. “우리 연주하러 가자”고 하면, “얼마 받는데?”라고 묻는 멤버가 없다고 한다. 좋은 뜻을 가진 곳에서, 음악을 필요로 한다면, 그냥 가서 한다고. 나는 장평위(발달장애성인 평생교육기관 설립위원회)가 연 감사의 밤 행사에서 ‘피아토’의 앙상블 연주를 처음 들었다.

발달장애 아이를 둔 부모들이 눈물로 세우고 있는 학교. 반가워하고, 박수 치며 격려하는 그날 밤, ‘피아토’의 연주는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거의 1시간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날 그녀들이 받은 개런티는 저녁밥 한 끼. 연주 마치고는 장평위 식구인 것처럼 밥 먹는 윤정씨가 보였다.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나는 두 달 뒤에 그녀를 만나고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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