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공고 다녔는데 취업 나가서 좌절, “미용밖에 할 게 없어서 절박했죠”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⑮ 서른 살 미용사 최종복
“푸하하핫! 원래 그렇게 자신한테는 엄격한가요?”
내가 미용사 최종복씨에게 두 번째로 한 질문이었다. 인터뷰 시간은 오후 9시, 나는 먼저 저녁밥 먹었냐고 물었다. 그는 “다이어트 해요. 저녁은 안 먹어요”라고 했다. 겨울이라 더 살찌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인다고. 일하면서 거울을 볼 수밖에 없는데 “제 볼에 살 붙은 거를 도저히 못 보겠더라고요”하면서 웃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항상 다이어트를 한다고.
중학교 다닐 때, 종복은 공부를 어느 정도 하는 편이었다. 담임선생님도 “네 성적이면 인문계를 가야지”라고 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 종복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기로 마음먹고 지냈다. 군산에도 기계공고가 있었지만 종복은 익산에 있는 전북기계공고 전기과로 진학했다. 거기는 국립학교, 다 공짜였다. 학교운영지원비 3만원만 내면 됐다.
“학교에서 전기회로도 보고 연결하는 걸 배웠어요. 납땜도 하고요. 기공(기계공고)은 전기 기사나 기능사 같은 시험을 무조건 봐요. 자격증 따서 천안으로 취업을 나갔어요. 전기하고는 상관도 없는, 김치냉장고 박스에 스티로폼 넣는 일을 했어요. 철야로요.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평생을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1주일 동안 일한 돈 33만 원을 받고 나왔어요.”
종복에게는 네 살 많은 미용사 누나가 있었다. 그는 고1 때부터 “미용 배우고 싶어”라고 했다. 누나는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반대했다. 어머니는 전기나 잘 배우라고 했다. 취업 나가서 좌절하고 온 종복, 식구들은 “미용은 안 돼!” 하지 않았다. 학원비와 재료비는 약 1백만 원. 종복은 공장에서 벌어온 돈에 나머지는 어머니 카드로 할부를 끊었다.
미용학원 자격증 반은 6개월 코스. 커트나 파마, 신부화장, 핑거웨이브도 잘 됐다. 종복은 재미있었다. 배우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그는 학교 다닐 때도 친구들 머리를 왁스로 손질해주는 걸 좋아했다. 미용학원 수업 끝나고는 알바해서 어머니의 카드 값도 갚아나갔다. ‘미용밖에 할 게 없어’라는 생각이 절박했다. 그는 이론과 실기시험을 한 번에 붙었다.
“고3 8월에 합격하고 한 미용실에 취직했어요. 바닥 쓸고, 손님 샴푸하는 스텝으로요. 하루 12시간 일하고 받는 월급 50만 원, 뉴스에도 나오잖아요. 기술직은 기술을 가르쳐주는 거니까 돈을 많이 안 줘요. 그게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 미용실은 손님들 연령층이 대체로 높았어요. 저는 젊은 손님들 만나서 트렌드를 배워나가고 싶은데요. 한 달만 일하고 나왔어요.”
종복씨가 지금 일하는 곳은 군산 명산동에 있는 ‘팀 헤어’, 그가 두 번째로 취직한 곳이다. 햇수로 10년째 근무한다. 이직을 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종복씨는 “스텝 일을 시작하면 받는 돈은 다 비슷해요. 한 달에 50만 원부터 시작했어요. 근데 여기는 원장님하고 실장님이 좋았어요”라고 했다. 그는 진득하게 일을 배워갔다.
종복씨는 스물한 살에 입대했다. 경기도 포천에서 장갑차 조종사로 복무했다. 그때는 멋있지만 제대하고 사회 나와서는 별로 도움 안 되는 일이었다고. 부대에는 ‘깍쇠’가 필요했다. 미용 일을 1년 반 동안 하다 간 종복씨는 한 번도 가위를 잡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배우는 단계의 사람일 뿐, 손님 머리를 자르는 정식 디자이너가 아니었으니까.
“군대 갔다 와서 바로 ‘팀 헤어’ 원장님한테 갔어요. 서울로 가서 미용할 거라고 했죠. 근데 원장님 설득에 넘어갔어요. 서울 가면, 손님도 못 잡고, 돈도 못 벌고, 돈도 못 모은다는 현실적인 얘기를 많이 해 주셨죠. ‘디자이너 되려면 몇 년이 걸리는데 어떻게 견디면서 생활할 거냐?’고 묻더라고요. 제대하고 보름 만에 ‘팀 헤어’로 다시 출근했죠.”
스물셋, 종복씨는 여전히 미용실 스텝으로 일했다. 대개 미용실 원장들은 스텝들에게 인색하다. 근무 시간이 길고 월급을 적게 줘도 되는 스텝, 그들이 미용 일을 빨리 배워서 재빠르게 이직해 버리면, 미용실 처지에서는 손해다. 종복씨가 일하는 미용실은 그러지 않았다. 종복씨는 단계를 밟아서 손님들 파마와 염색을 해주는 ‘중상(커트만 하지 않음)’이 되었다.
“저는 가위를 빨리 잡았어요.”
손님 머리를 파마하고 염색하고 커트까지 하게 되면 디자이너다. 스물여섯 살에 종복씨는 헤어 디자이너가 되었다. 월급도 많이 올랐다. ‘언젠가는 내 샵을 열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수입의 50%는 무조건 저축했다. 단 하루 쉬는 일요일에는 고등학교 때부터 길거리 농구를 하던 친구들이랑 만나서 운동을 했다. 꾸미는 것을 좋아해서 옷 사러 다니기도 했다.
“디자이너가 됐지만 실수도 많았어요. 고등학교 남학생 손님 귀를 가위로 ‘찝은’ 거예요. 피가 많이 났죠. 매직파마 하는데 손님 머리가 좀 꼬실라졌어요. 손님이 느끼기에는 엄청난 거라서 울고 나갔고요. 머리가 짧은 남자 손님한테 새치머리 염색을 하는데 이마까지 바른 거예요. 그 약은 며칠 지나야 없어지는데요. 제 밑에 애가 그렇게 했는데 제 책임이죠.”
그런 실수를 할 때마다 ‘팀 헤어’의 정순호 원장은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다. 겪어봐야 실수 없이 잘 할 수 있다”고 했다. 자기 귀에서 흘리는 피를 보고 간 학생 손님도 머리가 길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종복씨는 자신감이 떨어졌다. 다시는 미용 일을 못 할 것 같았다. 매번 그런 마음을 극복하는 것도 일이었다. 시나브로 종복씨를 보고 찾아오는 손님이 늘었다.
“넌 미용 일에 열정이 없다!”
트렌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늘 공부하고 연구하는 정순호 원장은 종복씨에게 말했다. 그를 위하는 애정과 걱정이 담긴 말이었다. 그 전까지 종복씨는 다른 미용실에서 일 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는 문득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모아둔 돈도 있으니까 조그맣게 자기 가게를 열면 괜찮을 거라고. 종복씨는 처음 미용을 배우던 때처럼 설렜다.
“스물여덟 살 때에 ‘팀 헤어’를 그만뒀어요. 가게를 어디다 낼지 알아보고 다녔죠. 그러던 중에 친구들이랑 쉬는 날에 농구를 했어요. 상대편 선수와 부딪혔는데 제 발목뼈 세 개가 다 부러졌어요. 딱 1년 쉬었어요. 평생 쉴 거를 다 쉬었죠. 병원하고 집만 오갔어요. 1년에 수술을 두 번이나 했으니까요. 제대로 못 걷고, 진짜로 장애를 입을 줄 알았어요.”
담당 의사는 “본인 하기에 달렸어요. 재활 열심히 하세요” 라고 했다. 물리치료사가 손으로 다친 근육을 만져주는 도수치료를 받으면 효과가 빨랐다. 한 번 받을 때마다 3-4만원, 의료보험 적용도 안 됐다. 종복씨는 근력운동 하는 밴드를 사서 집에서 혼자 했다. 절뚝거리면서 월명공원 수변 산책로를 돌았다. ‘뭐, 다친 티는 덜 나게 걸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우울했다. ‘팀 헤어’에 갔더니 한세영 실장이 “염색이나 하고 있어라” 하면서 머리 색깔을 밀크브라운으로 바꿔주었다. 기분이 확 달라졌다. 심경의 변화가 생길 때마다 미용실에 와서 머리 자르고, 파마하고, 염색하는 여자들 마음을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제대로 준비도 않고 미용실부터 차렸으면, 지금쯤 돈 까먹고 폐인 됐을 거야” 냉정한 평가를 하게 됐다.
남 탓을 하지 않고, 스스로를 ‘디스’하는 자체평가는 여운이 길다. 웃기면서 슬프다. 종복씨는 발목뼈를 다쳐서 미용실을 열지 못했다. 당연히 망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돈은 까먹었다. 생활비 하고, 가끔씩 친구들 만나면서 1년에 8백만 원을 썼다. 그에게는 힘들게 모아야 하는 큰돈이었다. 한편으로는 멀쩡하게 걷게 됐으니까 고마운 마음으로 출근준비를 했다.
“(웃음)다이어트를 했죠. 다치고 나서 오른쪽 다리를 못 움직여서 살이 쪘으니까요. 하는 일이 없으니까 배고픈 줄도 몰랐어요. 잘 챙겨먹지도 않았는데 몸무게가 늘었더라고요. 다리 근육이 짝짝이라 걷기를 많이 하면서 2주일동안 탄수화물을 아예 안 먹었어요. 그래서 살을 쫙 뺐죠. 8kg을 줄이고 나서 다시 ‘팀 헤어’로 출근했어요.”
올해 서른 살, 헤어 디자이너 최종복씨는 기술향상에 신경 쓴다. 한 달에 두 차례씩, 8개월 코스의 미용 아카데미에 나간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이 군산에 내려와서 하는 강의다. 자정 무렵에야 강의가 끝난다. 그는 정순호 원장의 권유 덕분에 서울로 교육을 받으러 갈 때도 있다. 일본인 강사한테 커트할 때 질감 처리와 움직임, 볼륨, 테크닉을 배운다.
교육받은 새로운 기술은 바로 종복씨 것이 되지 않는다. 그가 쌓아왔던 스타일이 있어서 천천히 바뀌어간다. 종복씨는, 그의 미용 기술처럼, 그의 인생도 느릿느릿 흘러온 것 같다고 했다. 대충 살지 않았지만 파이팅 넘치지도 않았다고. 요즘에는 정순호 원장이 말해주던 열정을 생각하는 일이 잦다. 어느새 고민은 ‘내 샵을 열 때는 언제인가’로 확장된다.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여자는 자신이 가장 매력적이었던 시절의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는 실수를 저지른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일까. 온갖 일을 겪은 아줌마라도, 파마가 잘못 나오면 집에 돌아와 혼자 눈물을 쏟는다. 자신의 머릿결이나 두상, 스타일에 객관적이지 못하다.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미용의 세계, 그래도 종복씨는 말했다.
“저한테는 미용밖에 없어요. 다른 길은 없어요.”
최종복 <팀헤어>
군산시 명산동 7-9
063-443-2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