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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힘들고 외로운 거 아니네”... 그가 뜨겁게 그림 그리는 이유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5.02.01 15:46:53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군산대학교 미술학과 1학년 승택은 누구와도 친구를 먹었다. 전공 수업은 빠져도 교양 수업은 무결석을 고수했다. 다른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으니까. 날마다 학교 중심가에 서 있었다. 그 날 눈이 마주친 학생이랑 하루를 놀았다. 학교 근처의 자취방 중에 승택이 안 자 본 방은 없었다. 낯선 도시에 와서 누리는 대자유, 모든 것이 신났다.

 

승택은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다. ‘둘리’ 만화를 보고서는 따라 그리기를 좋아했다. 뭍에서 시집온 그의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 승택에게 사랑을 쏟아 부었다. 승택은 또래 사내아이들처럼 장난꾸러기, 옷을 험하게 입었다. 그래도 그의 어머니는 미싱으로 독특하고 예쁜 옷을 만들어 입혔다. 승택이 타 온 상장은 코팅해서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그는 제주 중앙고 1학년 때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멋도 많이 냈다. 소지품 검사할 때마다 걸리는 헤어 젤, 그는 카메라 필름 통에 숨겨서 갖고 다녔다. 승택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비행기를 타고 뭍으로 나와서 익산 원광대학교 실기대회와 광주 비엔날레에 참가했다. 제주에서 대학 다니고 제주 여자 만나서 제주에서 살아갈 미래를 바꾸고 싶었다.

 

 



 

국립 대학교와 공항, 승택이 군산에 온 이유다. 옷차림이나 행동, 생활 스타일이 톡톡 튀던 승택은 군 생활 하면서 변했다.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이 절실했다. 계급이 높아지면서 승택은 자기 자리를 깔끔하게 꾸몄다. 제대하고 1년간 공사장이나 주유소에서 일할 때도 그랬다. 자기 공간이나 사람 관계가 깔끔해야 일상이 정돈된다는 것을 알았다.

 

“제대 후에 친구들하고 좀 멀어졌어요. 힘든 일이 있으면, 남자애들은 술 먹잖아요. 근데 술 마실 때는 좋은데 헤어져서 돌아올 때는 쓸쓸하더라고요. 공허함이 더 커졌어요. 자연스럽게 술자리를 절제하게 됐어요. 내일 생활도 해야 하니까요. 친구들은 이해를 못해요. ‘야, 인마 나와!’ 하면 나가야 하는데 점점 안 나갔으니까요.”

 

3학년으로 복학한 승택은 학과 공부를 열심히 했다. 졸업할 때까지 모든 과목에서 'A+'를  맞았다. 미술학원에서 알바해서 번 돈으로 공모전마다 작품도 출품했다. 같이 그림 그리는 친구들은 쩌렁쩌렁한 상을 받는데 승택은 늘 뒤로 밀려나 있었다. 잘해 봐야 입선이었다. 그는 자신의 화풍에 대해 의심하고 연구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미대생들은 졸업 작품 할 때 가장 긴장한다. 밤새 작업한 친구들이 빠져나간 이른 아침의 텅 빈 작업실, 승택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남들한테 더 인정받고 싶었다. 외로움을 안 타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더 화려해 보이려고 애썼다. 속으로는 혼자라고 느낀 적이 많았다. 승택은 꾸미지 않은 자화상을 작품으로 냈다.

 

“미대 들어와서 7년 만에 제 그림 스타일이 정해진 거예요. 그 전에는 열심히 그렸지만 저만의 뭔가는 없었어요. 제 얼굴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이런 걸 졸업 작품으로 해도 되나?’ 하는 의문은 들었지만 밀고 나갔어요. 전시회에 온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면서 엄청 재밌어 했어요. 그 때 굉장한 희열을 느꼈어요.”

 

승택의 그림은 입소문을 탔다. 사람들한테 추천을 받아서 서울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에서 두 번이나 전시회를 가졌다. 지역방송의 텔레비전 다큐 프로그램에도 나왔고, SBS에서 군산 특색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승택의 작업실과 그림이 나온 적도 있다. 그의 작품이 팔렸을 때는 “내 얼굴로 작품을 계속 해나가야겠다”는 자신감이 높아졌다.

 

 


 

대학을 졸업한 승택씨는 군산대 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작업실도 얻고, 규모가 큰 미술학원에 강사로 취직을 했다. 승택씨의 앞날은 꽃처럼 피어날 것 같았다. 웬걸! 각종 미술대회에 끊임없이 학생들을 입선시켜야 하는 학원 강사 일, 승택씨는 빠르게 메말라갔다. 뜻대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학교 조교로 근무하려던 계획도 어긋나고 말았다.

 

 


 

“제가 지금 후회되는 게 6년 동안이나 학원 강사로 일한 거예요. 제 아까웠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다 흘려보낸 거잖아요. 그 때 그림을 열심히 그렸으면 어땠을까 생각하죠. 차라리 다른 걸 도전해 봤으면, 지금 경제적으로 덜 힘들겠지 생각도 하고요. 그 귀한 시간들을 돈만 쳐다보고 학원에서 일한 게 진짜 아쉬워요.”

 

불운은 떼 지어 오는 법. 어느 날, 승택씨의 작업실 집주인은 나가라고 했다. 그는 여태껏 해왔던 작품들을 들고 갈 데가 없었다. 그래도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전주에서 활동하는 화가들이랑 교류도 하고, 전시회 ‘아띠전’도 열었다. 학원 일을 하면서 군산에서 전주를 오가는 것은 지구와 달만큼의 거리, 승택씨는 지쳐갔다.

 

지난 봄, 승택씨는 6년 간 일했던 미술 학원을 그만뒀다. 서른세 살 승택씨는 그림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친구들은 직장을 다니거나 결혼을 했다.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수입이 생겨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림을 두고 고민하던 20대 시절로 되돌아갔다.

 

‘그림을 계속 그려야 하나? 그림을 안 그리면, 뭘 하면서 살아가지?’

 

벚꽃이 핀 4월, 사람들이 흩날리는 꽃길을 걸을 때에 승택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3개월이 그냥 흘러갔다. 한 여름, 고향 제주에서 열리는 ‘청년작가전’ 초대를 받았다. 낮에는 직장인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그림 그리는 또래 작가들을 만났다. 승택씨는 “나 혼자만 외롭고 힘든 건 아니구나” 위로를 받았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제주에서 어머니가 해 주는 집 밥을 먹으면서 승택씨는 열정을 되살렸다. 제주 중앙고 다닐 때 함께 그림을 그렸던 친구 부균성씨가 “내가 잘 돼서 네 작품 꼭 사줄게”라고 말했다. 술김에 하는 말이라도 마음이 뜨거워졌다. 승택씨가 그림을 그리면서 고민하고 산 세월들은 하찮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군산으로 돌아왔다.

 

승택씨는 구시가에 화실을 연 친구 김명준씨를 찾아갔다. 화려하고 감성적인 그림을 그리는 그는 정적이면서 깔끔한 그림을 그리는 명준씨에게 공동 작업을 하자고 했다. 앤디워홀과 바스키아(흑인 피카소라 불림)처럼 함께 발전해 가자고 했다. 서로 “그림도 그리고, 전시회도 갖자. 아직 젊으니까 재미있는 그림을 많이 그리자”고 약속했다.

 

“저도 빨리 제 화실을 열고 싶어요. 그림에 대한 열정이나 감수성을 사람들한테 많이 전파하고 싶어요. 그림 배우러 와서 ‘저, 그림 못 그려요’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림을 못 그리는 건 없거든요. 자기가 얼마나 좋아하고, 얼마만큼 자기의 감성을 집어넣느냐에 따라서 그림은 달라져요. 좋아지죠. 저는 사람들이 그림 그리면서 행복하도록 돕고 싶어요.”

 

승택씨는 자화상뿐만 아니라 오방색을 쓴 불화도 그린다. 우리 눈에는 한 가지 색으로 보이는 빛깔들도 사실은 여러 가지 색이다. 그걸 표현하려고 야수주의풍의 그림을 그렸다. 승택씨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캔버스에 바로 물감을 섞어서 그린 게 보인다. 물감을 팔레트에서 섞지 않고, 캔버스 위에서 중첩을 많이 하니까 그림은 거친 느낌이 났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그림을 그리게 될까 봐 걱정이 됐다. 연애를 안 한 지도 벌써 2년째, 그래서 그림이 더 칙칙해지는 것은 아닐까. 승택씨는 차분한 그림을 연구했다. 떠오르는 게 여자 그림과 꽃 그림. 그래서 그는 요즘 캔버스에 순한 붓질을 한다. 아름다운 여자들을 그리고 있다.

 

“‘필’ 받으면, 몇 시간 동안 서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그릴 때가 있어요. 아버지는 아직도 저를 이해 못하세요. 어머니는 저에 대해서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즐거워하세요. ‘네가 언젠가는 빛을 볼 거야’ 라면서 응원해 주세요. 처음에는 제가 그린 코딱지 그림이나 성적인 상징이 있는 바나나 그림을 싫어하셨는데 지금은 매력 있다고 하시고요.”

 

승택씨는 의뢰 받아서 작품을 그리기도 한다. 그가 다니는 ‘고향도 치과’에도 그의 그림이 걸려있다. 치열이 고르지 못한 그의 이가 갖가지 색깔로 드러난 그림. 이 젊은 예술가는 일상을 빡세게 산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서 운동하러 간다. 돌아와서 밥 해 먹고, 집 정리를 하고 나서 그림을 그린다. 올 2월, 그는 원하는 화실을 구해 들어간다. 승택씨는 말했다.

 

“사람들이 전시장을 나와서도 ‘그 그림 재밌네’라고 말하는 작품이 있어요. 저는 그런 작품을 그리고 싶어요. 제 이름은 몰라도 좋아요. 제가 죽고 나면, 제 그림들이 창고에 보관되지 않고, 원하는 사람한테 가서 빛을 봤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전시회를 많이 열고 싶어요.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그 중에는 제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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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3 18:21:22) rec(368) nrec(378)
글이 너무 초딩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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