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영미가 가장 좋아한 시간은 저녁, 아버지가 퇴근하는 때였다. 가장 좋아한 계절은 겨울, 목수 일이 없는 아버지가 집에 있는 때였다. 아버지는 겨울마다 바나나빵 장사를 했다. 영미는 아버지 곁에 있었다. 바나나빵에 들어가는 달걀을 열 판씩 깼다. 시린 손을 연탄불에 갖다 대면, 손에 묻은 달걀물이 노릇노릇 익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영미는 ‘생물학적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주 어려서 헤어졌다. 영미 남매는 아버지와 살았다. 영미가 초등학교 때, 아버지와 재혼한 ‘그 여자’가 들어왔다. 그 여자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몽둥이질을 했다. 영미는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대당했다. 잘 먹지 못해서 가냘픈 10대 소녀는, 매 맞을 때마다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 체육복이랑 준비물 사야 해요. 3만원 필요해요.”
김제 덕암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초, 영미는 한 달째 앓고 있던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영미에게 10만 원 짜리 수표 한 장을 줬다. 산송장처럼 야윈 몸을 이끌고는 공사 현장으로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몇 시간 뒤, 영미는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가 가진 현금 전부를 영미에게 주고 갔다는 것도.
영미 남매는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나서 고모한테 갔다. 일찌감치 혼자 몸으로 아이 둘을 키우고 있던 고모는, 서른네 살에 아이 넷이 되었다. 업종을 바꿔가며 삼겹살집, 통닭집, 해장국집, 호프집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식구 다섯 명이 가게에 딸린 방에서 먹고 잤다. 돈 없어도, 고모는 자식들을 푸짐하게 먹였다. 하루도 가게 문을 닫지 않고 일했다.
“고모랑 살면서 마음이 넉넉해지니까 뒤늦게 사춘기가 왔어요. 옛날에는 항상 주눅 들어서 살았는데 제 목소리를 내게 된 거예요. 고모한테 반항했어요. 괜한 일로 한 달 동안 말도 안 하고, 같이 밥도 안 먹었어요. 고모가 ‘내가 졌다, 졌어! 영미야, 그러니까 밥 먹어’ 하면서 품어주셨어요.”
고모는 한없이 너그럽지 않았다. 영미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각종 증명서를 내야 했다. 고모는 조카를 동사무소 앞까지만 데려다줬다. 서류 떼는 일은 영미 스스로 하게 했다. 사춘기 여자 아이는 그런 일이 부끄러웠다. 어물어물 말하면 시간만 더 걸리니까 “기초생활수급자 증명서!”를 입에 붙게 연습했다. 신속하게 서류 발급을 했다.
영미는 공부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고1 때 담임 박미정 선생님은, 그녀가 돈 안 내고 급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학비도 안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른 학교로 전근 가서도 책을 보내주었다. 영미는 그 선생님 덕분에 국어 공부에 눈을 떴다. 다른 과목도 조금씩 잘하게 됐다. 국립이라 학비가 싼, 군산대학교 국문학과에 합격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
대학에 다닌 적 없는 고모가 영미의 대학 입학금을 대주었다. 매달 5만원씩 용돈까지 챙겨줬다. 학교 다니면서 틈틈이 고모 가게 일을 돕던 영미는 방학 때는 알바를 두 탕씩 뛰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밤새 라면을 끓이고, 오전에는 관공서에서 일했다. 낮에 집에 들어가서 4시간만 자고는 다시 고속도로 휴게소로 출근했다.
새내기 대학생, 영미는 대학신문사 포스터를 보고 설렜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선배들에게 글쓰기부터 배웠다. 원고지 1매당 2500원, 한 달에 받는 원고료가 30만원일 때도 있었다. 알바 안 해도 될 만큼 큰돈이었다. 많은 시간을 신문사 일에 쏟아 부었다. 학교에서는 2학년 이상의 학생기자들에게 전액장학금을 주었다.
“진짜 열심히 했어요. 3학년 때, 제가 편집장이 될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근데 제 동기가 됐어요. 제 안에 욕심이 있었나 봐요.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이유 없이 배가 아팠어요. 너무 아파서 사흘 동안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고 웃기죠.”
영미는 4학년 때 편집장을 했다. 신문은 1년에 15회, 한 달에 2회 발행할 때도 있었다. 일이 고되니까 학생기자들은 쉽게 그만뒀다. 그녀는 신문사에서 살았다. 8쪽 짜리 신문을 세 명이 만든 적도 있었다. 날짜 잡고, 인터뷰 하고, 글 쓰는 게 힘들었다. 책임감 때문에 도망칠 수 없었다. “교통사고 나서 입원했으면 좋겠다”면서도 끝까지 신문을 만들었다.
졸업을 앞둔 가을, 군산 <서해교차로>에서 일하는 장희용 선배가 찾아왔다. “생활 정보신문이지만 네가 쓰고 싶은 기사는 계속 쓸 수 있어”라면서 근무 조건과 급여를 얘기했다. 지방의 다른 신문사보다는 대우가 좋았다. 회사의 수익 구조도 안정적이어서 기자가 영업 안 해도 되는 점에 끌렸다. 영미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출근했다.
일주일에 한 명씩,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만나서 글을 썼다. 76년 동안 일기 쓰는 할아버지, 수십 년째 LP판을 수집한 사람, 돈은 많이 벌지 못하지만 자기 일을 꿋꿋하게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맛 집 탐방 기사를 쓸 때는 음식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금처럼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기 전의) ‘복성루’나 ‘빈해원’ 기사를 썼다.
“회사에서 저는 비매출 부서 직원이에요. 광고 빈 틈마다 들어가는, ‘아름다운 사회’ 칼럼이나 건강 상식 같은 생활 기사를 발췌해요. 전국 교차로협의회에서 글이 내려오거든요. 신문은 월, 수, 금에 3만부씩 나와요. 배포함이 약 500개 있거든요. 생활정보 신문이니까 직원들이 배포하고, 새벽에는 신문 안 훔쳐가게 감시도 해요. 일은 정확하게 끝나요. 오후 6시에 ‘칼 퇴근’ 하죠.”
박영미 기자 스스로 밤 9시까지 근무하는 날도 있다. 군산 서해대학 김영혜 교수가 부동산 특강을 하는 날이다. 좋은 이웃되고, 좋은 집주인 되고, 좋은 세입자 되라고 하는 무료 강의, 약 200여 명의 시민들이 다녀갔다. 그녀는 강의를 통해서 변해갔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살면, 자신만 불행해진다는 것. 가진 게 많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도.
“교차로에서 대략 200여 명의 인터뷰 기사를 쓰고 나서 제 얘기를 쓸 수 있게 됐어요. 어렸을 때 학대 받은 거랑 고모 얘기를 쓸 용기가 생겼어요. 예전에는 다 감춰놓기만 했거든요. 제 글을 쓰게 되면서부터 사는 게 기대가 돼요. 5년간 연애하고 결혼하는데 제 일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고요. 아기 낳고 나면, 더 따뜻한 시선이 생기겠죠.”
박영미 기자는 <오마이뉴스>에 친딸처럼 키워준 고모 얘기와 내 집 마련을 한 달 남겨두고서 돌아가신 아버지 얘기를 썼다.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그녀 얘기를 써 보내고 있다. ‘내 이야기를 너무 파는 건 아닌가?’ 걱정하면서도 마음이 후련하고 뿌듯하단다. 물론, 상품으로 받은 각종 생활용품과 가전제품, 한복 세 벌은 혼수에도 큰 도움이 됐다.
올 1월, 박영미 안효선 부부는 둘이 모은 돈으로만 결혼했다. 넓은 아파트도 없고, 비싼 가구도 없다.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게 돈이다”는 말에 흔들린 적 있어도 금방 중심을 잡았다. 신혼살림 차리고 나니까 가진 돈은 ‘0’, 그래도 미래를 낙관한다. 열심히 일해서 5년 뒤에는 땅을 사고, 10년 뒤에는 조그만 집을 지어서 시어머니와 같이 살 계획이다.
“고모가 제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죠.”
그녀의 이야기는 ‘기승전고모’로 끝났다. 직장 다니면서도, 주말에는 일당 5만 원짜리 된장 푸는 알바도 했다. 고모를 보고 자란 덕분에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단다. 공모전에 소설 ‘우리 고모’를 쓴 적도 있다. 낙선! 그러나 ‘따뜻한 고모를 만날 수 있었다’라는 심사평만으로도 감격했다. 그녀는 고모의 큰딸, 텔레비전과 돌침대, 냉장고를 선물해 드리고 결혼했다.
“지금은 주로 제 얘기나 고모 얘기를 써요. 어렵고 힘들게 산 덕분에 도움이 많이 돼요. 제가 나이 들면 어떤 걸 쓰게 될지, 글쓰기로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지 기대돼요. 대학신문사에서 처절하게 글을 쓴 덕분에 제 생각대로 글을 쓸 수 있어요. 학생기자 하면서 중국과 필리핀도 갔다 왔고요. 제 처지에 외국 나가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거든요.”
박영미 기자가 쓴 글의 1차 독자는 남편 효선씨다. 그도 한 때는 기자였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글이라도 ‘매의 눈’으로 읽는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도 잘 했다. 상처받은 그녀는 효선씨를 붙잡고 언쟁도 했다. 그런 시절을 거치면서 그녀의 글은 좋아졌다. 확! 효선씨도 “박영미, 날로 글 잘 쓴다”고 말한다. 그녀가 쓴 글을 읽으면서 울기도 한단다.
직장생활 8년 차, 박영미 기자는 사람들을 만나서 글을 쓰는 일이 좋다. 깊고 넓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확신한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글을 써서 혼수로 장만하지 못한 김치냉장고를 상품으로 타리라는 것을. 언젠가는 사람들 마음에 울림을 주는 작가가 되어서 더 큰 세계로 나가리라는 것을. 오늘, 박영미 기자가 읽고 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