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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가수 아니지만 행복하게 사는 뮤지션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5.01.01 11:01:15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며칠째 보일러를 켜지 못한 월세 방은 냉골이었다. 냉장고에는 댓병짜리 소주 한 병뿐,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현만은 빈속에 소주를 마셨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위장이 뒤틀리면서 아팠다. 현만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갓 스물한 살이 된 군산 청년은 서울에 와서 눈 뜬 채로 코를 베이고 말았다.

 

군산대 미대 1학년이었던 현만은 그림만큼 음악을 좋아했다. 매주 서울로 가서 디제이 수업을 받았다. 파티 플래너 일을 하는 한 선배가 “야, 너 잘 한다. 아주 올라 와. 서울에서 디제이 할 곳을 마련해줄게”라고 했다. 현만은 휴학하고 상경해서 방을 얻었다. 1년 동안 알바해서 모은 돈 3백만 원을, 그 선배에게 장비 값으로 건넸다. 선배는 연락을 끊었다.  

 

혼자 좀 앓은 현만은 빌딩 청소 알바를 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부모님한테 손을 벌리지 않은 그는, 일 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친구들이 “너 서울에서 뭐 하냐”라고 물으면, “클리너야” 라고 대꾸했다. 두 달 뒤, 현만에게도 봄이 왔다. 디제이 공부하면서 알게 된 형님이 클럽을 소개시켜 주었다. 현만은 퍼포먼스 디제이가 되었다.

 

 


 

그토록 바라던 디제이 생활, 날마다 꽤 많은 돈까지 벌었다.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었다. 홍대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면 사람들이 흥겹게 호응해 주었다. 그런데도 문제가 생기다니, 곡이 써지지 않았다. 안락한 생활에 젖어서 군대도 가기 싫어졌다. “안 되겠다.” 그는 클럽에서 1년여 동안 번 돈 3천만 원을 악기 사려고 ‘묻어두고’ 입대했다.

 

제대하자마자 현만은 서울에서 열린 디제이 대회에 나가 상위권에 들었다. 몇몇이 현만에게“지방 출신 애가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드네” 라고 하는 것도 알았다. 그는 나고 자란 군산에서 하나라도 이루어 보자는 결심을 했다. 스무 살 때, 피아노 학원 원장님이 “이렇게 못 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해서 3개월 만에 그만 뒀던 피아노를 시작했다. 독학으로.

 

“무슨 일인가를 평생 할 거라면, 20대 중후반에 시작해도 늦은 게 아니에요. 저도 제대하고  악기를 시작했어요. 기타랑 베이스 기타, 젬베 같은 타악기 4-5 종류, 각종 전자 악기를 7년 넘게 익혔어요. 그러니까 악기가 언어처럼 나왔어요. 전에는 따라 치는 게 다였는데 제 생각을 음악으로 표현하게 되더라고요. 악기끼리 서로 통하는 원리를 알게 됐어요.”

 

음악 하면서 군산대 미대에 복학한 현만은 집에서 완전히 독립했다. 부모님은 “음악 해서 생활이 돼? 공무원 공부 해” 라고 했다. 그는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학교 공부를 성실하게 했다.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다. 크고 작은 일거리들을 맡아서 생활을 꾸려나갔다. 사람들이 배 타고 선유도에 도착하자마자 보는 ‘선유도 지도’도 현만 작품이다.

 

 


 

그는 뮤지션 ‘션만’으로 자작곡 힙합 앨범을 냈다. 생활은 그대로. 상가 벽에 그래피티 작업을 하고, 다른 음악인들의 곡을 만들거나 앨범자켓을 만들었다. 한 케이블 방송사에서 원래 있던 동요들을 다른 장르로 편곡하고, 새 동요도 작곡해 달라고 했다. 현만은 3개월 동안 40곡을 만들었다. 그 곡들은 한국전파진흥원이 뽑은 올해의 선정작이 되었다.  

 

“그 작업 끝나자마자 일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날도 너무 추웠어요. 전에는 아슬아슬해도, 이일 저일 하면서 유지를 했거든요. 3개월 버티고 나니까 10원 한 푼도 없는 상황이 온 거예요. 제가 ‘좀 참고, 덜 쓰고 살면 되지’ 라는 생각이 있어요. 근데 아예 없으니까 암담했어요. 음악을 계속 하려면, 먹고 살 일을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13년 3월, 스물아홉 살 현만은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됐다. 선배의 디자인 회사에 취직했다. 인쇄물을 디자인하고, 현수막을 만들고, 플라스틱 배너를 잘랐다. 하루 종일 커트칼질만 하는 날도 있었다. 밤 10시 넘어서 일이 끝나기도 했다. 칼날에 손이 베여서 음악 연주는 하지도 못하고, 쓰러지듯 자는 날이 늘었다.

 

낮에는 회사일, 밤에는 음악인으로 산 지 10개월. 현만은 목이 아팠다. 몸도 축 처졌다. 군산의료원에서 임파선 암 초기 진단을 받았다. “왜 하필 나야?” 원망보다는 치료비 걱정이 앞섰다. 일 해서 번 돈은 악기 사는 데 거의 다 썼다. 부모님한테 말씀 드리기는 싫었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누나한테 의논했더니 “건강하기만 해” 하면서 도와주었다.

 

천만다행! 수술하지 않고, 약물로만 치료가 가능했다. 그러나 직장생활은 불가능. 현만은 항생제 주사를 맞으면서 3개월 동안 주로 누워서만 지냈다. 같이 작업실을 쓰는 여자 친구 남민이(28, 미술작가)씨가 간호를 해주었다. 현만은 모든 것이 고마웠다. 막연하게 ‘서른 살에는 어떻게 살까?’ 고민했던 것도 길이 보였다.

 

“사실, 지난 10년 동안 늘 불안하고 흔들렸거든요. 앨범 작업하면서도 잘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 컸고요. 항상 정확한 목표만 뒀어요. 그게 안 되면 좌절했고요. 아프니까, 사람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이렇게 끝나면 안 되겠다. 얼른 나아야지’ 생각을 했어요. 한 번 사는 인생, 오늘 하루하루만 생각하니까 음악에 매진할 힘이 생겼어요.”

 

항암제 주사를 다 맞고 나니까 서른 살, 현만은 작곡을 열심히 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의 페이스북인 ‘사운드 클라우드’ 에 스무 곡쯤 올렸다. 전 세계 브랜드에 음악을 설계해주고 중계하는 회사 ‘뮤직맵’에서 현만의 곡을 쓰겠다고 했다. 곡은 세계 곳곳의 아디다스 매장에 깔릴 예정이다. 소울뮤직만 다루는 해외의 음악 프로그램에도 현만의 곡이 나왔다.

 

 


 

현만은 서울에 있는 회사 ‘스테디 사운즈’ 소속이다. 군산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는 그는 서울에 올라간다. 디제이 ‘슈퍼부기’, 랩퍼 ‘소닉’, 드러머 ‘사수안 27’과 무대 공연을 한다. 11월에도 이태원에서 직접 디제이 하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퍼포먼스 무대를 선보였다. 군산에서도 무대 공연을 하고, 봄가을에는 버스킹 공연도 제법 했다.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록밴드, 재즈, 힙합을 했어요. 요즘에는 흑인 소울뮤직을 하고요. 동요나 게임음악 만드는 일도 해요. 아프고 나서는 음악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한테 레슨도 적극적으로 합니다. 음악은 제가 살아가는데 큰 활력이에요. 저한테 배우러 오는 분들도 음악을 통해서 그랬으면 좋겠고요.”

 

현만은 좋아하는 음악을 평생하기 위해 돈 안들이고 사는 방법을 좀 안다. 대학 때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알바를 많이 했다. 목수 일하다가 철근에 다친 적도 있지만 테이블 같은 건 쉽게 짤 수 있다. 시멘트 공장에 다녀서 공사 하는데 두려움도 없다. 일찌감치 부모님한테 독립한 ‘생활음악인’ 다운 자세, 악기가 고장 나도 수리를 맡기지 않고 혼자 고친다.

 

 


 

악기는 현만에게 언어와도 같다. 어디서든, 누구와도 통할 수 있는 말. 악기 수가 늘어나기는 해도 줄어들지는 않는다. 난방 할 돈이 없고, 먹고 싶은 걸 못 사먹어도, “팔았다가 다시 사자”고 하지 않는다. 대신, 젊은 남자들의 로망인 자동차가 없다. 그의 여자 친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여름에는 덥게 겨울에는 춥게 다닌다. 함께 대중교통을 타고서.

 

현만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 ‘션만’이 되겠다는 욕심은 없다. 한 때는 수많은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며 꿈을 꾼 적도 있다. 그러나 확률이 너무나도 낮은, 로또와도 같은 허상을, 오래 바라보지는 않았다. 유명한 뮤지션은 아니지만, 음악 하는 일이 즐겁고, 음악 덕분에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아프고 나니 분명해졌다.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한다.

 

“제가 청소년들 만나서 진로 상담도 해요. ‘좋아하는 거 하려면 힘든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요. 책임이 필요하죠.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의식을 가지면요, 그 때부터는 많이 흔들리지도 않아요. 밀고 나갈 힘이 생겨요. 저도 힘든 일 겪고 나니까 음악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어요. 자기 일에 애정이 깊어져요.”

 

지난해부터 현만의 부모님은 “네가 좋아하는 것, 해볼 수 있는 데까지 해 봐라”고 격려해준다. 뮤지션 ‘션만’의 연주음악 앨범도 곧 나온다. 그의 작업실에서 녹음작업을 마쳤다. 괜히 불안하게 여겼던 서른 살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음악이든, 생활이든, 잘 해 나갈 자신이 붙었다. 그는 현재 혈액 수치도 정상, 임파선 종양도 보이지 않는다. 완전 건강한 뮤지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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