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아버지는 울었다. 왼쪽 팔에 문신을 새기고 온 소년을 붙잡고 울었다. 가출했다가 집에 온 소년은 문태현, 중학교 2학년이었다. 태현은 욕실에 들어가서 철수세미로 문신을 밀면서 울었다. 살은 벗겨져도 문신은 지워지지 않았다. 소년은 생선회를 뜨듯이 살갗을 파냈다. 피가 나고, 진물이 흐르는 팔에 늘 붕대를 감고 다녔다.
“나, 공부할 거야.”
아버지의 눈물을 본 태현은 중1 때부터 같이 놀던 친구들한테 말했다. 태현은 마술과 춤으로 이름을 날리던 아이였다. 주로 밖에서 시간을 보내던 소년은 어느새 심각하게 ‘까진’ 문제아가 되어 있었다. 집에 가서는 평범한 아들, 집밖에서만 다른 얼굴로 살았다.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싸우고. 결국에는 부모님도 알게 되었다.
태현은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결심했다. 모든 교과목이 어려웠다. 특히, 수학은 이해불가의 ‘외계어’였다. 태현은 죽을 듯이 공부했다. 턱걸이로 군산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밤늦게까지 남아서 하는 야자뿐. 사고를 한 번도 안 치고 보낸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말, 태현은 부모님한테 말했다.
“저, 학교 그만 두면 안 될까요? 마술 하고 싶은데 시간이 안 나요.”
“미쳤구나? 미쳤어!”
1주일 뒤, 태현은 학교로 찾아온 부모님을 만났다. 태현이 바라던 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반 친구들이 “야, 너 왜 그래?”라고 물었다. 얼떨떨한 그는 “몰라. 나, 자퇴한대” 하면서 책가방을 쌌다. 검정고시 학원으로 갔다. 태현은 자신을 자퇴시켜준 부모님이 고마웠다. 아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말도 안 된다고 무시하지 않고 믿어준 것에 감격했다.
태현은 열 살 때 친구가 하는 마술을 보았다. 친구는 손 안에다가 조그맣게 뭉친 화장지를 넣고는 사라지게 했다. 태현은 궁금했다. 친구한테 그 비밀을 알려달라고 1주일 동안 맛있는 것을 바치며 졸라야 했다. 알고 보니 간단했다. 다른 데로 한 눈 팔게 하는 거였다. ‘마술사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린 태현은 그 세계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친구들이 몰려다니며 총싸움 하는 방과 후 시간, 태현은 군산 한길문고나 명지서림에 갔다. 마술 책만 파고들었다. 그림과 사진을 보면서 따라해 봤다. 친구들한테도 보여줬다. 관객의 눈을 멀게 하는, 자기가 계속 보고 있다고 뇌가 믿게 하는 ‘미스디렉션’ 종류의 마술을 터득해 나갔다. 열두 살이 된 태현은 부모님을 졸라서 광주에 있는 마술학원에 등록했다.
“제가 이미 알고 있던 마술을 강의하더라고요. 혼자서 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들었어요. 계속 책을 사서 읽고, 또 읽고. 그리고는 해 봤어요. 근데 텔레비전에서 본 마술은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제프 맥브라이드라는 마술사였어요. 카드가 공중에서 막 나타나는 마술을 했는데 ‘저걸 알고 싶다. 저렇게 멋있는 마술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고등학교 자퇴한 태현은 8개월 뒤에 검정고시 시험을 봤다. 합격! 어린 태현이 순식간에 매혹 당했던, 공중에서 카드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카드매니플레이션’도 할 수 있었다. “서울로 가서 진짜 마술사들을 만나보자.”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서울은 넓고, 마술을 잘 하는 사람도 엄청 많을 거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자신의 마술을 보여줘야 할까.
그는 먼저 자신이 돋보일 수 있는 마술을 연구했다. 카드와 CD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마술에 포켓볼 마술을 더했다. 7분짜리 마술 프로그램을 만든 뒤에 인터넷으로 서울의 마술 동호회를 알아보았다. 서울에서 마술하는 사람들은 정모를 하면서 서로의 마술을 보여주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상경, 태현도 그 중 한 곳을 찾아갔다. 열여덟 살이었다.
“어? 너, 마술 잘 한다!”
“예, 저희 동네에서 다들 잘 한다고 해요.”
“동네가 어딘데?”
“군산이요.”
동호회 사람들 사이에 시골에서 올라온 애가 마술 잘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떤 이가 그에게 “여기서 이러지 말고, 마술대회에 나가 봐”라고 했다. 그 때는 마술회사들이 상 탈 사람을 정해놓고 대회를 열던 때, 태현에게 “입상은 꿈도 꾸지 마!”라고 했다. 태현은 고무공 여러 개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빌리아드볼 마술을, 질감도 크고 무거운 당구공으로 했다.
“햐! 쟤 봐라. 괴물이네, 괴물이야. 고무공이 아니야. 빌리아드볼 마술을 당구공으로 해 버리네?”
관객들도, 심사위원들도 술렁였다. 태현은 동상을 받고, 더 큰 규모의 마술대회 출전권도 따냈다. 일본과 한국 두 나라가 하는 대회와 코리아컵 국제대회를 나갔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마술사들이 모인 무대에서도 담대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고, 그가 하는 마술영상들이 돌아다녔다. 태현 나이 열아홉 살, 그 해에 열린 모든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그런데 태현은 슬럼프에 빠졌다. 일본에서 열린 마술대회에서 상을 받고 나서는 무엇을 목표로 도전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끝까지 다 와버린 느낌이 들었어요. 꿈을 이루었는데 그 다음에는 뭘 해야지? 너무나 허무한 거예요” 태현은 혼자 오래 생각했다. 마술사가 되었으니까 진짜로 훌륭한 마술사가 되어보자고.
문태현 마술사는 이은결, 최현우 마술사가 소속되어 있는 회사로 스카우트 되었다. 숙소도 따로 있고, 월급도 나오는 회사. 소속사의 스케줄대로 공연을 많이 했다. 선생님들과 함께 회사의 공연 연습을 하고 나면 새벽 2시, 그는 다시 혼자 남아 연습했다. 자기만의 마술 연습 시간이 절실했다. 그럴수록 출근 시간을 지키는 게 어려워졌다.
“그렇게 1년을 했어요. 마술은 선생님한테 배우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창조해내는 일이에요. 제가 만들고 싶은 마술은 엄청 많은데 회사가 막는 것만 같았어요. 스무 살 때 회사를 고만뒀어요. 고시원 방에 박혀서 1년간 트릭 노트(마술사들은 자기만의 트릭노트를 씀)만 썼어요. 일거리는 계속 있었고요. 프리랜서로 전환한 셈이죠. 마술을 공부로 접근을 했어요. 그래서 탄생한 게 ‘피에로 마술’이에요.”
문태현 마술사는 중학생 때 시인 이상에 끌렸다. 시를 읽으면서 극도의 고독을 느꼈다. 항상 ‘왜 나는 고독할까?’를 생각했다. 마술사가 된 뒤에 그는, 사람들이 “야, 신기하다!”는 마술을 넘어서고 싶었다. 울림을 주는 마술,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마술을 꿈꾸었다. 피에로를 통해 인간이 가진 양면성을 표현했다. 중국에서 열린 국제대회에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마술을 기억했다. 그가 신적인 존재로 추앙해오던 마술사 토미 원더도 만나게 되었다. 국제마술대회 게스트로 초청되어 ‘피에로 마술’을 수 차례 했다. 국내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출연 섭외가 왔지만 막판에는 취소되었다. ‘피에로 마술’에는 담배 피는 장면이 있었다. 그는 “그걸 없애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라고 자신의 작품을 고수했다.
문태현 마술사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 마술사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 사람이 하는 마술에는 애절함이 있었다. 문태현 마술사는 그에게 말 걸었다. 그는 “저는 연기자일 뿐이에요. 이걸(마술 액트) 만들어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마술 디렉터가요”라고 했다. 그 때까지 우리나라에는 없던 역할, 문태현 마술사는 마술 디렉터가 되기 위해 혼자 공부했다.
“마술 디렉터는 마술사를 만들어주는 거예요. 제가 스무 살 때 동갑내기 이정민 씨가 제자로 들어왔어요. 저는 도제 시스템으로 시간을 들여서 가르쳤고요. 7분 동안의 액트(마술 한 편은 6분에서 10분 사이)에 마술사의 체형, 특기, 손 움직임, 평소 생활을 보고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거예요. 그 사람한테 맞는 마술을 입혀주는 거예요. 그 마술사는 계속 활동하면서 점차 자기 스타일의 뭔가를 만들게 되고요.”
그에게 2년간 마술을 배운 제자 이정민 씨는 여러 마술대회에서 1등을 했다. 문태현 마술사는 ‘대한민국 마술 디렉터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돈이 따른 것은 아니었다. 공익근무요원 근무를 하느라 공연은 할 수 없었다. 생활고에 시달렸다. 부모님에게 손 벌리고 싶지 않아서 자잘한 일을 하며 방세를 냈다. 소집 해제만 되면, 날개를 달 것 같았다.
어느 날, 문태현 마술사 집에 느닷없이 이삿짐 차가 들이닥쳤다. 초등학생인 그가 학습 부진을 겪을 때도 “자기만의 배우는 방법이 있어”하며 다그치지 않던 부모님, 그를 자퇴시키고는 마술 세계로 가라고 해준 부모님, 소신이 확고하던 부모님은 어느새 나이 들어 있었다. “왜 자식을 6년 동안이나 그렇게 둬?”라는 사람들 말에 직접 그를 데리러 왔다.
일명 ‘지랄 총량의 법칙’. 우리 모두에게는 일생 동안 떨어야 할 지랄의 총량이 있다는 말이다. 문태현 마술사는 중학교 때 온갖 일로 부모님 속을 썩였다. 그는 부모님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 군산으로 내려왔다. 저항하지 않았지만 원망은 했다. 스물네 살의 마술사, 지방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의 마술 콘텐츠는 평가절하 될 게 뻔했다.
그는 군산에 마술 전문회사 ‘문 팩토리’를 세웠다. 서울에만 몰려있는 문화, 지방의 지자체는 공연을 사 온다. 시민들은 무료 공연에 익숙하다. 서울에서 알아주던, 국제대회에서도 여러 번 상을 탄, 그의 마술 공연도 공짜이기를 원했다. 그는 사람들이 “니네 그렇게 하면, 먹고 살겠냐?” 해도 무료나 저가 공연을 하지 않았다. 시민들에게 차원 높은 공연을 보여주며 버텨냈다.
처음에 회사의 목표는 “돈벌자!” 뿐이었다. 문태현 마술사의 은사 정건희 선생님이 “회사는 이념과 목표, 비전이 있어야 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는 ‘마술을 통한 시민들의 문화의식 향상’을 목표로 잡았다. 그러자 계획도 선명해졌다. 1시간 반 넘는 대규모 마술인 ‘매직 판타지’ 공연을, 객석이 꽉 찬 채로 앵콜 공연까지 했다. 버스킹(거리 공연)을 해서 시민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고, 학생들이 열광하는 마술 캠프를 열었다.
현재 ‘문 팩토리’ 소속 마술사는 7명. 그는 마술사들이 공연하면서 생활이 가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제대로 대접받기를 원한다. 지방이라 힘든 일이 많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도전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마술도구를 연구해서 판매한다. 해외수출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는 군산에 ‘문 팩토리’ 본사를, 서울에 지사를 두고서 여전히 현역 마술사로 활동한다.
몇 년 전까지는 군산에서 직접 마술을 볼 수 없었다. 지금은 확 달라졌다. 주말 저녁에 은파유원지로 산책 갔다가 버스킹 마술과 마주친다. 대도시에 나가야 볼 수 있던 대규모 매직 콘서트를 예술의 전당이나 장미갤러리에서도 본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불을 자유자재로 사라졌다가 불러내던 문태현 마술사,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공연하고 있다.
열 살 때부터 마술사를 꿈꾼 소년은 학교를 자퇴하고 서울로 갔다. 그토록 바라던 마술사가 되었다. 한 발 더 나아가 마술 디렉터가 되었다. 그리고는 꿈을 키우던 동네로 돌아왔다. 예쁜 색시와 8개월 된 아들을 둔 스물아홉 살 마술사 문태현은 멈추지 않는다. 군산에 마술연구소를 세우려는 꿈을 꾼다. 마술 같은 꿈을.
문 팩토리
군산시 중정길 13
063-462-4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