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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 빵집이 ‘이성당’만 있는 게 아닙니다.”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4.12.01 09:42:1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빵집은 뉴욕이나 런던 같은 이국의 도시 이름을 달고 있었다. 번화한 곳에만 있었다. 붕어빵 굽는 것도 구경거리인 시골 아이들에게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사회생활을 해서 돈을 버는 언니나 이모들은 동생이나 조카들을 데리고 빵집에 갔다. 아이들은 윤기가 흐르는 빵을 한 입 먹고는 “오메, 매급씨 녹아부네이” 신기해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연애의 메카는 터미널 옆이나 역 앞에 있는 빵집. 교복 입은 언니 오빠들이 처음 만날 때는  빵집에 갔다. 추억이 깃든 동네 빵집들은 우리나라 구석구석마다 들어선 프랜차이즈 빵집에 밀려 문을 닫았다. 군산은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기능장의 이름을 내건 빵집, 아버지의 대를 이어 아들이 하는 빵집이 건재하다. 

 

군산 영국빵집 파티시에 정요한 씨의 어린 시절에는 빵 냄새가 스며있다. 그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도 나온 빵집 아들이다. 안집(살림집)과 빵집은 붙어 있었다. 칭얼대거나 울면 부모님이 달려올 거리, 유치원생 요한은 달걀프라이를 직접 해 먹었다. 밥 차려주지 않는다고 투덜댄 적 없다. 냉장고를 열어서 혼자 만들어 먹는 아이로 자랐다.  

 

밤 11시, 야자 끝나고 집에 온 고등학생 요한은 바로 제 방으로 가지 않았다. 빵집 직원들을 퇴근시킨 부모님은 또 일을 했다. 군산 시내의 한 고등학교 매점에 날마다 햄버거 200개씩을 만들어 보냈기 때문이다. 자정 넘은 시간, 다음 날 새벽에 납품할 햄버거를 만들었다. 큰아들인 요한은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부모님 곁에서 일손을 도왔다. 

 

“요한아, 너는 이 일 하지 마라. 힘드니까 절대로 하지 마.”

 

요한의 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는 군산대학교 해양시스템공학과에 입학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미분 적분을 공부하며 2학년까지 다녔다. 고민이 많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요한은 학교에 복학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평생 해온 일을 이어가자”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반대하는 어머니 마음을 헤아렸다. 정식으로 선을 긋고서 “저도 빵 만들겠습니다” 하지 않았다. 요한은 철판부터 닦았다.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허드렛일을 했다. 두 번째로 하게 된 일은 빵 성형. 반죽을 해서 빵 모양을 만들어 구웠다. 그 자리에까지 가는 데 1년이 걸렸다. 어머니 마음도 누그러져 있었다. 아버지는 요한에게 말했다. 

 

“너 호주에 가서 살아 봐라. 거기는 기술자 대우가 좋으니까 가서 한 번 해 봐라.”

 

스물네 살, 요한은 워킹 비자를 받아서 호주에 갔다. 농장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그는 기술자, 시드니에 있는 한인 제과점에 취직했다. 새벽 3시에 출근해서 낮 12시까지 근무, 시간당 12달러를 받았다. 밤 8시면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 다민족이 모여 사는 호주, 빵 보는 눈이 넓어졌다.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빵 문화를 알아갔다. 

요한은 1년 뒤에 아버지의 빵집이 있는 군산으로 왔다. “호주는 소주 값이 비싸잖아요” 농담을 던진 그는 곧바로 진심을 실토했다. 기술자를 인정해주는 호주, 그런데 요한은 좀 외로웠다. 방세를 나눠 내는 친구도 옆에 있었지만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이 그리웠다. 영어를 유창하게 못하는 것도 돌아올 이유가 되어주었다. 

 

 


 

“제가 호주에 가기 전에는 빵집 아들로 일했어요. 근데 거기 가서 남의 집 생활을 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달라지더라고요.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건 똑같은데, 돌아와서는 저도 빵집 직원처럼 일했어요.”  

 

그렇게 빵집 직원이 된 요한은 “이게 내 천직이야” 막 가슴이 뜨거워진 적은 없었다. “괜히 한다고 했나?” 일하면서 회의에 빠진 적도 없다. 친구들 만나서 새벽 2-3시까지 노는 날도 있었다. 아침 7시에 출근하는 것은 꼭 지켰다. 요한이 빵을 만든 지도 4년, 아버지는 그에게 “서울에 있는 좋은 제과점에 가서 일을 해 봐라”고 했다. 

 

 


 

빵 만드는 사람들은 제과제빵 기능사 시험을 본다. 그 다음에는 기능장 시험을 본다. 최고의 자리는 명장, 시험으로 뽑지 않는다. 국가에서 지정해준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제과제빵 명장이 10여 명 있다. 요한은 스물여섯 살 초봄에 서정웅 명장의 제과점으로 일 배우러 갔다. 요한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온 사람들과 함께 숙소 생활을 했다.    

 

“‘서울에 오길 잘했구나’ 그런 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밥 먹는 시간 빼고는 하루에 15시간씩 서서 일하니까요. 새벽 5시에 나가서 저녁 7시, 늦으면 밤 9시에 끝났죠. 숙소에 들어가면 자죠. 바로요. 한 달에 두세 번만 쉬어요. 근데 서울 제과점에서는 다들 버텨요. ‘명장님 밑에서 일했어’ 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큰 제과점, 좋은 사람 밑에서 일했다는 건 그만큼 기술자로서 인정을 받는 거니까요.” 

 

서울은 제품의 가짓수부터 다양했다. 먹는 문화도 고급스러웠다. 배우는데 공력이 많이 들었지만 그만큼 기술을 배울 수 있어 좋았다. 한편으로 요한은 서울의 큰 제과점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눈여겨봤다. 빵 만드는 각종 기구들까지 세심하게 봤다. 그렇게 1년을 일했다. 창업을 고민하는 동료도 있었지만 요한은 또 다른 제과점으로 가서 배우고 싶었다. 

 

그 때, 늘 요한을 격려하며 더 큰 세계로 나가라고만 했던 아버지가 “내려와서 함께 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쌀과 밀보다 식이섬유가 월등하게 많은 군산의 특산물 흰찰쌀보리(꽁당보리)로 빵 만드는 것을 연구하고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요한은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것도, 서울의 큰 제과점에서 배우는 것처럼 의미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는 날마다 밀가루 반죽 80kg을 했다. 반죽은 그 날의 날씨나 습도에 따라 달랐다. 수많은 변수를 겪고 난 뒤에야 요한의 몸에 반죽이 베어들었다. “아,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구나”를 깨우쳤다. 빵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 이 빵을 굽는 동안 다른 빵을 준비하고 만들어야 한다. 잡념이 끼어들면 안 된다. 각기 다른 빵들을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딱딱 맞게, 맞물려가면서 일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 그게 빵 만드는 기술이었다. 

 

“제 손에 일이 익었다 싶었을 때가 8년 차였어요. 기술자 대접을 받으려면 적어도 10년은 해야 되고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그 때까지 잘 못 버텨요. 일이 워낙 힘드니까요.”

 

빵집에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이 될 때까지 12시간 이상씩 일한다. 직원들은 1주일에 한 번씩 쉰다. 빵집 아들이면서 빵집 기술자인 요한 씨는 빵집 직원처럼 쉬지 못한다. “장사는 손님하고 약속이다. 손님들이 모르고 왔다가 빵집 문 닫았다고 돌아가게 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철학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업을 잇는 요한 씨는 말했다. 

 

 


 

“군산의 이성당은 전국적으로 너무 유명한 빵집이죠. 줄 서서 먹을 만큼 맛있으니까요. 저도 동네의 맛있다는 빵은 다 먹어봐요.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 ‘우리 집 빵이 최고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야 우리 집 맛을 개선하죠. 군산 살면서, 1시간씩 기다려서 팥빵을 사 먹지는 못하죠. 그래서 저희 집으로 오시는 분들도 많고요.” 

 

그는 아침밥으로 빵 하나를 집어먹는다. 그와 결혼한 지 네 달된 아내는 “야, 빵집 하는 친구 있으면 소개 좀 시켜 줘”라고 말하고 다녔을 만큼 빵을 좋아하는 사람. 그는 그녀에게 특별한 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생일 때는 레몬치즈 케이크를 만들고, 선물로 산 팔찌를 장식한 적도 있다. 그러나 입덧 중인 요한 씨의 새색시는 빵도 잘 먹지 못한다. 

 

하루 12시간 이상 빵 만드느라 바쁜 요한 씨는 아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많이 미안하단다.  그래도 빵 만드는 일을 선택한 지난 10년을 후회한 적 없다. 여전히 빵을 만들며 살고 있을,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비관한 적 없다. 다만, 요한 씨 자신이 하는 제빵 일을 다른 이들에게 ‘강추’ 하지는 못한다. 그는 말했다. 

 

“이 일이요? 자신 없으면 하지 말라고 하죠. 버틸 자신이요. 기술 배울 때가 진짜 힘들어요. 한국 문화가 기술을 전수 받을 때 고되거든요. ‘내가 너에게 이걸(기술)을 가르쳐주니까 너는 이 정도까지는 해야 돼’ 이런 게 있어요. 하대를 많이 견뎌야 해요. 그래야 기술자가 되거든요.”

 

제빵을 배우는 청춘들은 많아도 끝까지 직업으로 삼는 이는 드물다. 몸은 고되고, 고생한 만큼 돈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근성을 가진 기능사들은 서울로 간다. 요한 씨는 나고 자란 동네에 남았다. 아버지의 일을 대물림 했다. 나는 생각해 봤다. 요한 씨 같은 젊은이들이 늘어나면, 대기업 프랜차이즈도 힘을 잃을 수 있다. 일본처럼 대대로 가업을 이은, 갖가지 음식점들이 성업 중일 테니까. 

 

영국빵집

전북 군산시 신풍동 1001-11

063-466-3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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