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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두 명뿐, 독일의 오스나부뤽(Osnabrueck) 시립오페라 극장 상임지휘자 송안훈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4.09.01 10:09:26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저는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고 싶습니다.”

고3 학생 송안훈은 말했다. 1996년 12월 마지막 주말 저녁, 당시 텔레비전 인기 프로그램 <1318 힘을 내>에 출연했을 때였다. 대학 수능 시험 보기 직전에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군산여고 어떤 학생이 안훈 학생을 짝사랑한대”하며 찾아왔다. 여학생의 용기 있는 ‘선빵’ 고백에 안훈은 피아노 연주로 화답했다. 그 모습은 전국 방송을 탔다.

 

얼마 뒤, 출판사 시공사의 이학종 이사가 안훈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너를 만나고 싶구나.” 덕분에 안훈은 지휘자가 되겠다는 꿈을 계속 끌어안고 갈 수 있었다. 전남대 음대 피아노과에 다니면서도 서울에 자주 올라갔다. 이학종 이사는, 안훈이 원하는, 서울에서 열리는 각종 심포니오케스트라 공연 티켓을 보내주었다. 

 

“그 때 음악회 보러 서울을 안 다녔으면, 저는 평범하게 음악 하는 사람으로 살았겠죠. 피아노 학원 하면서요. 지방 도시에만 머물지 않도록, 저한테 계속 도전의식을 키워주신 게 시공사 이학종 대표님이에요. ‘잠자리 없으면 우리 집에 와서 자라’고 하셨어요. 세종문화회관 처음 갔을 때는 솔직히 눈물이 났어요. 새로운 세상이었죠. 대학 4년 내내요.”

 

안훈은 음악 신동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군산 열대자 시골에서 봄이면 보리이삭을 구워먹고, 여름이면 들판을 쏘다니며 놀던 남자 아이였다.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안훈이가 교회에서 반주라도 하면 좋겠어”라는 소박한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둘째아들 안훈은 동네 피아노 교습소에 갔다. 그 때가 초등학교 5학년, 2년 동안 피아노를 쳤다.      

 

‘초딩’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중1 안훈, 친구들이랑 까불고 장난치다가 피아노 학원 2층에서 떨어졌다. 양쪽 손목뼈가 다 나간 큰 사고였다. 두 달간 하고 지낸 깁스를 풀어보니 손목뼈가 잘못 맞춰져 있기까지 했다. 팔목에서 손이 곧게 펴지지 않았다. 비뚤어져 있었다. 당연히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됐는데 그게 아쉽지 않았다.  

 

안훈은 군산 중앙고 2학년 여름에 몸이 아팠다. 의사는 별 거 아니라고 했다. 터지기 직전에야 복막염인 줄 알았다. 안훈은 한 달 동안 입 안에 호스를 끼고 지냈다.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누워서만 병원 생활을 했다.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먹고 살 걱정까지. “지휘자 하면 어떨까? 나는 피아노도 칠 수 있어” 라는 생각을 하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제가 자란 열대자는 버스가 1시간에 한 대 다니는 촌이잖아요. 몰랐으니까 용감했어요.  퇴원하고 피아노 학원을 다녔어요. 피아노 체르니 30번 정도 치면, 어느 학교 음대라도 들어갈 줄 알았어요. 콩쿠르 우승한 친구를 쳐다보면서 치지 않고, 가까이 있는 애를 목표 삼아서 ‘일주일 뒤면 쟤처럼 하자’고 생각했어요. 학원에 있는 애들을 다 따라잡기 전에 선생님이 ‘너는 입시 하기 힘들겠다’고 했어요. 학교 음악 선생님도 그러시고요.”

 

안훈은 그냥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학교 음악실을 쓸 수 있게 허락부터 받았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짬 내서 10분이라도 치고 봤다. 음대 다니는 대학원생한테 주 1회씩 개인 레슨도 받았다. 음악 전공을 반대하던 부모님도 안훈의 설득에 넘어가서 레슨비를 대주었다. 고3 때는 밤 11시에 집에 와서 새벽 3시까지 피아노를 쳤다.

 

 

  

 

전남대학교 음대에 간당간당하게 들어간 안훈. 베토벤과 쇼팽이 전부이던 군산 열대자 촌놈은 처음으로 작곡가 스칼라티를 알았다. 새로운 작곡가들을 알아갈 때마다 행복했다. 음악과 피아노에 대해서 배워가는 재미가 컸다. ‘만약에 서울로 대학을 갔다면, 난다 긴다 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포기했을 지도 모르지’라는 생각을 했다. 

 

2001년 2월. 안훈 나이 스물네 살, 대학 졸업하자마자 백수 신세. 복막염 수술 흉터로 군대도 못 갔다. 군산에 돌아와서 어르신들한테 음악 가르치는 봉사를 했다. 안훈이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고 고민하면서 걸을 때에 발밑에는 개불알꽃이 피어있었다. 점점, 몸에 감기는 바람이 부드러워졌다. 햇볕도 따스해졌다. 봄이 와 버렸다.

 

“그 날은 날짜까지 기억해요. 4월 13일이었어요. PC 방에서 ‘유학’을 쳐 봤어요. 인터넷이 막 발전하던 때라서 수많은 정보들이 올라오고 있었어요. 독일은 학비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독일 유학’을 쳤어요. 데트몰트(Detmold) 한인교회 사이트가 나오는 거예요. 이메일을 보냈어요. 독일로 유학가고 싶은데 좀 도와달라고요.” 

 

 


 

다음 날에 한인교회 목사님은 ‘빨리 서류를 보내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안훈은 곧장 전남대로 가서 요구하는 모든 것을 팩스로 보냈다. 4월 15일, 그 서류는 데트몰트 음대에 접수되었다. 마침맞게 원서 접수 마감 날이기도 했다. 한 달 뒤에 안훈의 집에는 초대장이 날아왔다. 독일의 음대에서 보내온 우편물, 독일어라서 읽을 수도 없었다.

 

안훈은 그 초대장을 다시 목사님한테 이메일로 보냈다. ‘나오기만 하면 되겠네요’라는 답장. 그 때서야 두려움이 일었다. 농사짓는 부모님은 “우리가 어떻게 유학자금을 대냐? 그 돈으로 차라리 피아노 학원을 차리는 게 낫지 않겠냐?”라고 했다. 안훈은 “돈을 버리더라도 가서 해보고 싶어요”라고 맞섰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 부모님은 말했다.

 

“6개월의 시간을 줄게. 안훈아, 합격 못하면 다시 돌아와라이.”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내려서 파다본(Pardabon)공항까지 가는 국내선으로 갈아탔다. 군산 공항보다 더 작은 파다본 공항에는 한밤중에 내렸다. 마중 나오겠다던 목사님은 없었다. 전화를 거는 방법도 몰랐다. ‘사기 당한 건가? 일단 자고 보자’ 가져간 침낭을 펴는데 한국 사람이 “송안훈?”하고 말을 걸어왔다.

 

“그 때 6개월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내고 갔거든요. 150만원 들고 갔어요. 한국 돈으로요. 그 쪽에서 통장을 개설할 생각으로 많이 안 가져갔어요. 돈도 없는데 비행기 표는 편도로 끊었어요. 돌아올 비행기 표를 끊어놓으면, 깡이 안 생기잖아요. 스물네 살 때는 그런 마음으로 뭐든지 해 볼 나이였어요.”

 

안훈은 곧바로 어학원이 있는 빌레펠트(Bielefeld)로 갔다. 독일 말을 할 줄 알아야 학교에 다닐 수 있다. 아침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어학 공부만 했다. 낮에는 독일사람 페터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2시간씩 가르쳐주었다. 1970년대에 페터는 한국 여행을 온 적 있다. 한국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길 가다 안훈을 봤을 때에 먼저 말을 걸었다.

 

“너 어디서 왔어?”

“한국.”

“독일어 배울래?”

“좋아!”

 

‘개뻥’이 아니다. 안훈은 3개월 만에 독일 말이 들렸다. 말문도 트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지휘과는 소수의 학생만 뽑는다. 합격 못 하면 독일을 떠나야 한다. 안훈은 뒤셀도르프 (Düsseldorf) 국립음대 피아노과 시험을 봤다. 합격했지만 당장은 자리가 없었다. 학교에 입학해야 비자 문제가 해결된다. 그는 국립음대가 아닌 카셀 (Kassel) 시립음대로 갔다. 

 

 


 

그 무렵, 군산에서 농사짓던 부모님도 ‘투잡’에 나섰다. “안훈이 뒷바라지를 할라믄 장사를 합시다. 한 5년 정도는 도와줘야제”라고. 부모님은 열대자 안에 ‘맛가’라는 냉면집을 열었다. 어머니는 음식 솜씨에 자신이 있었다. 가게는 입소문을 탔다. 예상보다 빨리 자리 잡았다. 안훈 덕분에 부모님도 열대자의 내로라하는 냉면집 사장님 부부가 되었다.       

 

안훈은 걱정을 덜고 공부했다. 카셀 시립음대 피아노과에서 바라던 지휘과로 바꿀 수도 있었다. 한 학기 뒤부터는 뒤셀도르프 국립 음대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학교를 두 군데 다녔다. 이동 수단은 기차, 교통비가 비싸서 값이 싼 기차를 골라서 탔다. 3-4시간씩 걸렸다. 나중에는 양쪽에 다 집을 구해서 살았다. 2년 반 만에 학교 두 군데를 마쳤다. 

 

 


 

그는 자신을 더 다그쳐 나갔다. 곧바로 세계적인 음악학교 라이프찌히(Leipzig) 국립음대 지휘학과에 합격, 4년 만에 학사와 석사, 그리고 연주학 박사를 마쳤다. 그 위 과정이 마이스터 클라스(Meisterklasse konzertexsamen)인데 2년 동안 매달 생활비로 1천유로(우리 돈 150만원)가 나온다. 안훈은 동양인 최초로 그 과정을 밟았다. 졸업하고는 동양인 최초로 그 학교의 지휘 강사가 되었다. 독일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에도 나왔다.

 

“원래는 라이프찌히 국립음대에 계속 강사로 남고 싶었어요. 학생 가르치는 게 너무 재밌었으니까요. 근데 비자가 걸렸어요, 제가 강의 하는 시간이 10시간 45분이었어요. 비자청에서는 11시간부터 비자를 내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극장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죠. 지금은 오스나부뤽(Osnabrueck) 극장에서 카펠 마이스터(상임 지휘자)를 하고 있어요. 오페라 지휘를 140회 했어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저마다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것을 모으는 게 지휘다. 더구나 독일은 지금까지 클래식 음악을 이끌어온 국가인데 자신들의 오페라 극장에 동양인 지휘자가 온 것이다. 거꾸로, 독일인이 우리 국립 국악원에 상임 지휘자로 왔다고 하자. 뭔가 어색하다. 카펠 마이스터 송안훈은 그런 생각들을 변화시키는 게 어려웠다. 1년은 고생했다.  

 

 


 

이제는 250년 역사를 가진 오스나부뤽 극장의 시스템을 눈여겨 볼만큼 여유가 있다. 극장은 총 4개의 심포니오케스트라, 오페라하우스, 무용, 연극 팀이 있다. 1년 치 공연 스케줄은 책으로 만든다. 헛돈을 안 쓰려고 연주회 팸플릿은 만들지 않는다. 독일인의 일상에는 공연 문화가 스며있기에 하루 서너 번의 극장 공연은 잘 돌아간다.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역사가 된 거다.

 

독일. 현재 '시립'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정식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사람은 두 명. 그 중의 한 명인 송안훈, 무작정 독일로 건너가서 카펠 마이스터가 되었다. 14년 째 살고 있는 타국. 올 때마다 확확 달라져 있는 한국보다 익숙하다. 살기에도 좋다. 복지도 잘 되어 있어서 보험 들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언.젠.가.는. 돌아오고 싶다. 고향 군산으로.

 

“길 가다가 갑자기 ‘커피 마시고 싶어’ 그러는 행동 안에 클래식이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군산 예술의 전당을 지나다가 ‘오늘 공연 뭐 하지?’ 궁금했으면 좋겠어요. 800억을 들여서 만든 극장을 잘 활용하고 싶어요. 영화관이나 카페에 자리가 있듯이, 예술의 전당에도 항상 공연이나 연주가 있어야 해요. 한국은 고등학생도 연주 때 떠들어요. 독일은 다섯 살 애들도 조용하죠. 교육 차이예요. 우리나라도 할 수 있는데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거예요. 그런 시스템을 배워서 한국에 풀어놓는 것, 그게 제 꿈이에요.”

 

올 여름, 그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군산 청소년 오케스트라 공연을 봤다. 첼로 협연 하는 학생이 눈에 띄었다. 따로 만나자고 했다. 그가 당장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 그러나 군산이라는, 우리나라라는, 우물 밖 세계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줄 수 있다. 어린 학생을 가로막고 있는 우물 뚜껑을 들어 올리는데 엄청난 괴력이 필요치 않다는 것도.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지휘자는 단 한 명이었다. <노다메 칸타빌레>에 나온 ‘치아키 센빠이’. 피아노를 쳐서 유치원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노다메는 치아키 센빠이를 ‘알아보게’ 된다. 지휘하는 치아키 센빠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면서 확 달라진다. 그토록 싫어하던 콩쿠르에 나가고, 본격적으로 음악과 겨루기 위해 유학을 간다.

 

지휘자 송안훈에게는 치아키 센빠이 같은 천재성이 없다. 마성의 미모도 없다. 열대자 촌에서 뛰어놀다가 늦게 피아노를 시작해서 지방의 국립대학을 졸업한 청년. 그가 지휘자라는 막연한 꿈을 붙잡고서 20년간 내달린 여정은 사람 마음을 움직인다. 내가 수없이 컴퓨터 화면으로 돌려보기 한 치아키 센빠이를 넘어선다. 카펠 마이스터 송안훈, 그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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