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내 이름은 글루미 썬데이(우울한 일요일). 세상 재미가 집 바깥에만 있는 줄 알고 돌아다녔다. 어쩌다 주말을 집에서 보내면,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세월 앞에 영원한 것이 있당가. 나도 이제 집에 있는 게 좋다. 남편은 원래부터 그랬다. 중3인 큰애는 방 문 닫고 노는 걸 좋아하니 말해 무엇 하리오. 여섯 살 먹은 꽃차남만이 “나가자고!”하며 압박한다.
춥고 갈 데 없는 겨울, 주말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 갔다. 박물관 로비에 걸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우리 꽃차남의 마음을 파고들지 못한다. 박물관은 그저 놀이터, 코까지 시린 날에도 박물관 마당에서 투호를 던져야 한다. 투명 엘리베이터를 타고, 1930년대를 재현해 놓은 근대생활관에 간다. 그러고는 군산의 옛 건물 색칠놀이를 한다.
봄이 오고 꽃이 피고. 나는 배신자가 되었다. 근대역사박물관은 싹 잊었다. 날이 더워져서야 ‘박물관 마당에 분수 켜졌나? 물놀이 가야 하는데’ 라는 계산적인 생각을 했다. 벌써 여름, 오랜만에 식구 넷이서 박물관에 갔다. 래퍼처럼 “집에 언제 가요?”만 읊조리는 큰애와 “우리 같이 신나게 놀자”고 지시하는 꽃차남 사이에서 나는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남편은 “좋은 데가 생겼어” 하며 장미갤러리로 우리를 이끌었다. 내가 “오호, 딱이야. 딱!” 인정하는 데는 아이들이 저절로 근사하게 행동하는 곳이다. 형제가 사소한 걸로 트집 잡아서 싸우지 않는 곳,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이며 초집중 하는 곳,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곳. 땀 흘릴 수 있는 곳, 스스로 만족해서 배시시 웃으며 끝낼 수 있는 곳.
‘새이빛’은 박물관 옆 장미갤러리에 있는 천연염색과 생활소품 체험공방. 우선, 향기가 좋았다. 일 하는 사람들이 일옷으로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도 화사했다. 우리 아이들은 쑥스러우니까 눈으로만 공방을 염탐했다. 바느질로 꽃수를 놓아 다포를 만드는 신세계적인 모험은 하지 않았다. 안전을 택해서 향초와 방향제를 만들었다.
“엄마, 다음 주에 여기 또 와요. 그 때 나 공부(체험) 두 개 할 거야.”
꽃차남의 말을 모른 척 하면 나는 들볶인다. 내 노화만 앞당겨진다. 그러니 다시 올 수밖에. 사실 나도 알고 싶은 게 있었다. 주말에 나와서 여행자들에게 규방체험을 하게 돕는 그녀들은 휴일특별수당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도 표정들이 환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놀자’가 삶의 목표인 나는 그녀들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며칠 뒤, 나는 혼자서 장미갤러리에 갔다. 바깥출입이 쉽지 않은 옛 여인들이 규방에 모여서 바느질로 생활용품을 만드는 것에서 비롯된 문화. 천연염색한 천으로 한복과 이불을 만들고, 남은 조각으로 조각보와 보자기, 바늘집 같은 소품을 만드는 규방공예. 모르는 사람들은 “저거 만들어서 쓸 수나 있겠어?” 할 거다. 새이빛 대표인 이혜숙 선생님이 말했다.
“규방공예는 서양 바느질하고 달라요. 서양 바느질 땀은 안 보여요. 다 숨잖아요. 우리나라 바느질은 바느질 땀이 다 보여요. 그니까 비단색실로 장식효과를 낼 수 있었죠. 기본적으로 감침질이 다 들어가요. 옛날에는 천 두 장을 잇는 작업을 할 때, 나오는 시접을 감싸 넣는 쌈솔기법을 썼어요. 감침질을 안팎으로 두 번 해서 시접이 모두 숨어지고, 겉과 안에 바늘땀이 나와요. 정갈하고 예쁘죠. 그러니까 규방공예는 조금만 바꿔줘도 고급스럽게 쓸 수가 있어요. 멋을 살려가면서요.”
이혜숙 선생님은 젊은 시절부터 막연하게 바느질을 좋아하고 있었다. 전주까지 가서 한복 짓기를 배우고, 규방공예를 접했다. 나중에는 군산 여성회관이나 농업기술센터에서 바느질을 직접 가르쳤다. 지금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은 수강생과 강사라는 인연에서 출발했다. 2011년도에 이미 규방공예 전시회도 열만큼 실력을 갖추었다.
규방공예는 사범 자격증이 있다. 정해진 기간 동안 수업을 듣고 바느질을 해야 얻을 수가 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렇게 내 것을 바치다 보면, 바느질이 주는 기쁨을 알게 된다. 작품이 하나씩 늘 때마다 사랑스럽다. 완성된 작품에 말을 거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내가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그녀들, 그래도 물었다.
“이 일을 하려면 문턱이 높나요? 그래도 미적 감각은 좀 있어야 하지요?”
“(이구동성으로 단호하게) 아니에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천연염색한 천을 많이 쓰고, 실크나 면을 쓰기 때문에 재능이 없어도 돼요. 색실을 얹히면, 다 예뻐져요.”
머릿속이 조금 어지러웠다. 중학생 때 A4 용지만한 천에 감침질, 홈질, 시침질, 공그르기 같은 바느질을 한 줄씩 해야 했다. 도무지 이해를 못한 나는, 소처럼 일하고 와서 일찍 잠든 엄마를 깨워서 바느질 해 놓으라고 울고 불며 난리를 쳤다. 그 뒤로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굴었다. 바늘에 찔려 죽을 거라는 저주를 받은 것처럼, 바느질을 멀리 했다.
그러나 모든 물건을 만들어 썼던 때, 여자라면 누구나 바느질을 했다. 남편을 여읜 여인들은 삯바느질로만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을 꾸렸다. 바느질은 삶 자체였다. 문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호락호락했다는 뜻은 아니다. 인두판 집 같은 바느질은 굉장한 집중력까지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이형란 선생님은 이야기하면서 꿰맸던 조각들을 다시 풀었다.
“바느질은 아이들에게 좋아요. 정서적으로 도움도 되지요. 집중력도 높아지고, 성취감도 아주 많이 느낄 수 있어요.”
규방공예 선생님들의 꿈은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바느질을 가르치는 것이다. 실제로 지역아동센터에서 초등학교 남학생들에게 바느질을 알려주고 있는데 아이들은 그 시간을 좋아하고 기다린단다. 공방에 온 젊은 연인들도 바느질을 하는데 남자 친구가 더 잘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남자 어르신들은 의외로 꽃수 놓는 것까지 하고 가신다고.
“저희들은 지금 하고 있는 천연염색이나 전통공예가 너무 좋아요. 그래서 알리고 싶어요. 이걸 하면, 마음이 편해요. 여러 가지 잡생각을 안 하게 되니까요. 그 전에는 성산 시골에 공방이 있었어요. 갈 때마다 큰맘을 먹어야 했어요. 지금은 갤러리 안에 우리 공간이 생기니까 너무 좋아요. 나중에는 이 공방 안에서 바느질 수업도 열고 싶어요.”
꿈을 가꾸는 사람들일수록 일상을 알차게 꾸린다. 그녀들은 남편들이 집에서 입을 속바지를 만든다. 애교스럽게 ‘하트 뿅뿅’을 수놓는다. 향주머니까지 선물한다. 그걸 받고 남편들은 입이 귀에 걸릴 만큼 시원하게 웃는다. 아이들을 다 키웠는데도 앳된 얼굴인 손형숙 선생님은 남편에게 속바지와 덮개, 그리고 ‘비밀’을 선물했다고 했다.
체험공방을 연 지 4개월째, 서울에서 초등 2학년인 한 여자 아이가 부모님과 같이 온 적 있다. 체험을 하고서는 “너무 좋아요”라고 하더니 2주 뒤에 또 왔다. “두 번째 왔을 때는 재밌었다고 편지를 써 왔어요. 사탕을 선물 포장까지 해 가지고요. 그리고는 바느질해서 다포를 만들어서 갔죠. 그렇게 와 준 게 감동이었어요”라고 이형란 선생님은 말했다.
나는 바느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없다. 그래서 언젠가 본 다큐멘터리 얘기를 했다. 뜨개질이나 바느질을 하면, 남녀 상관없이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온다고 했다. 머리숱 때문에 고민인 사람들, 그러니까 탈모가 진행 중인 여자들, 머리카락이 빠져서 머리가 반짝반짝 하는 남자들이 바느질 하던 장면이 인상 깊었던 다큐였다. 말하다가 나는 곁길로 새고 말았다.
“옛날이야기에서 본 것 같은데... 선생님들도 맘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바느질로 저주를 내릴 뭔가를 만들기도 하나요?”
그녀들은 바느질 하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로 말했다. “저주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저희는 작품을 만들어야죠. 애들이 레고 좋아하면, 방에 공간 만들어서 전시하잖아요. 저희도 그래요. 바느질 끝날 때마다 식구들이 기본 3일은 감탄해줘야 해요. 안 그러면 삐쳐요” 하며 웃었다. 그녀들은 아름답게 정돈된 바느질 상자를 보여주며 나를 흔들었다.
“언제 한 번 바느질 체험 해 보세요. 생각보다 안 어려워요. 할 수 있어요. 재미있어서 중독 될 수도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