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기억 못하시겠습니까?”
“(알지만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제가 예전에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걸려가지고 사장님한테 혼났습니다. 그 때 사장님이 정말 적절하게 혼내 주셔가지고, 그 날 이후로 저는 절대 나쁜 짓은 않고,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직업군인이 됐습니다. 그거 자랑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10여 년 전, 나운동 행운마트. 초등 5학년쯤 되는 남자 아이가 과자를 훔치다 걸렸다. 김경식 사장은 영화 ‘친구’에 나오는 선생처럼 “부모님 뭐 하시냐”고 물었다. 아이의 부모님은 둘 다 일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이한테 마트 주변 쓰레기를 줍게 했다. 청소를 마치고도, 아이는 고개를 못 들었다. 그는 말했다.
“너는 이 아저씨가 용서해줬으니까 죄인이 아니다. 알았지? 길에서 아저씨 보면 떳떳하게 인사해라.”
2002년, 김경식 씨는 주공4차 아파트 상가 지하에 행운마트를 열었다. 마트 앞에는 무료급식을 하는 나운 복지관이 있었다. 그는 복지관을 찾아가서 “뭐 도와드릴 것 없나요? 제가 쌀이라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복지관 측에서는 후원받는 쌀이 있으니까 현금이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다달이 일정 금액을 자동이체 했다.
어느 날, 나운 복지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군산시에서 결식아동들에게 물품을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는데, 군산시내 모든 마트가 입찰에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복지관 사람들은 “사장님이 그런 것을 하셔야지요.”라고 적극 권장했다. 운 좋게도 행운마트는 납품하는 마트로 선정되었다.
일이 늘었다. 마트 직원들한테 고생한다고 월급을 더 주고도, 백만 원쯤 남았다. 그는 군산시청에서 사회복지를 담당하는 공무원을 찾아가서 “이것은 제가 벌 돈이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들한테 쓰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담당 공무원은 사정이 딱한 여러 곳을 알려줬다. 그는 라면, 쌀, 된장, 고추장을 한 차 가득 싣고 가서 나눠줬다.
행운마트는 주공4차 아파트를 끼고 있다. 그 곳은 방 하나에 거실, 7평·9평짜리 아파트 단지다. 병이 들거나 장애가 있거나 가난한 사람들 1,999세대가 산다. 어떤 사람은 행운마트에 와서 “내가 두 달 만에 고기를 먹는데 2천 원 값만 주세요.”라고도 한다. 처지가 어려워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는 그가 말했다.
“사람들은 주공 4차를 흥청망청 하는 디로 알아요. 아침부터 ‘어이, 사장! 이 술 줄 거여? 돈 받는다고?’ 하면서 병째 깨버리고 가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이 사람들은 한 달에 20만원에서 40만원씩 국가에서 지원이 나와도, 관리비랑 전기세, 병원비 내면, 먹고 살기 힘들어요. 저축할 돈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를 하겠다는 꿈이 없이 살아요. 그래서 제가 소외계층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게 됐어요. 요즘은 우리 마트 주변에 대형마트, 체인형 슈퍼가 많이 생겨가지고 경기가 안 좋아요. 그래도 주민들이 ‘우리 행운마트 잘 돼서 사장님이 부자로 살아야 해. 우리 생각해 주는 디는 여기 밖에 없어. 그런게 여기서 물건을 팔아줘야지’ 라고 말씀할 때마다 고맙죠. 더 정이 들죠.”
나도 오래 전에 주공 4차에 사는 할머니를 만나러 다닌 적 있다. 할머니는 젊을 때부터 가난했다. 백내장 수술을 할 돈이 없어서 40대에 눈이 멀었다. 그런데도 집안은 정갈했다. 장애인의 날에 군산시에서 보조금이 나왔는데 그 돈으로 도배를 신청했다. 할머니를 찾아오는 사람들 기분이 산뜻하라고. 할머니는 임신한 내 몸을 더듬더듬 만져보시고는 말했다.
“응, 아들이여. 눈은 안 보여도 배 모양을 보면 알지. 다 알아. 봄에 꽃 피던 것도 눈에 선해. 참 이뻤어.”
행운 마트는 아침 8시에서 12시까지 영업한다. 그는 젊은 직원과 알바들에게 꼭 얘기한다. 우리나라에서 살아가려면 부모 재산이 많든가, 내 머리가 똑똑하든가, 내가 성실해야 한다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공무원도 되고 좋은 직장도 들어갈 수 있다고. 가난한 6남매 중 막내로 자란 그는, 직원들이 잠시 스쳐가듯 일하는 마트에서도 삶을 배우기 바란다.
“직원이든, 조카든, 성실하게 2-3년 일하면 마트를 하나씩 채려줬어요. 독립 사업자로요. 이 사람들은 돈이 없으니까 내가 그 책임을 져야지. 하다 보니까 미수가 10억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납품업자들이 나를 믿고 물건을 깔아줘요. 햐, 너무 고마운 거예요. 마트 생리가 있어가지고 몇 개월 지나면 순환이 되거든요. 제가 언제까지 갚겠다고 하고 약속을 지켰죠.”
그 때, 그는 깨달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물질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신용도 중요하다고. 나무의 나이테가 많을수록 거목이 되듯이, 신용도 그렇게 더디고 굳세게 생긴다는 것을. 돈을 벌기 위해서 장사하지만 좋은 일에도 돈을 더 쓰자고. 그래서 가훈을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로 바꿨다. 아이들을 혼내면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혼나”라고 한다.
그 전에 김경식 씨네 가훈은 ‘아빠를 따르라’였다. 딸 둘에 아들 하나, 셋 다 연년생이다. 1년에 둘을 낳기도 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이 중에 낳고 싶어서 낳은 애 하나도 없다. 아빠 엄마 좋아서 낳았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즐겁게 열심히 살아라.”고 한다. 지금은 대학생, 고등학생인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아빠를 따르라’는 가훈을 창피하게 여겼다.
그는 군산 사회복지장학회 총무이사로도 일한다. 장학회는 처지가 힘들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먼저 본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학교, 개인, 노인, 단체 등을 선발해서 1년에 1억씩 준다. 성적은 따지지 않는다. 요즈음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그만큼 부모들이 뒷받침 해주기 때문이다.
김경식 씨는 나운2동 산악회장도 하고 있다. 놀지도 못하고, 술도 못 먹고, 춤도 못 추는 사람이라서 시작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마트 직원들에게 말하던 것처럼, 성실하게 지역 일에 참여했다. 자치위원회 회계를 담당하고, 간사를 맡아 했다. 정을 쏟았다. 그가 나고 자란 옥산도 차로 15분이면 가는데 객지생활 하는 사람처럼 말한다.
“여그는 제2의 고향이에요.”
그는 사람이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인간 보험’이 필요하다고. “이 사람한테 필이 꽂히면, 자기 것을 줄 수가 있어요. 내가 가진 게 없어서 물질적으로는 못 도와줄망정, 정신적으로는 힘이 되어주지요”라고 했다. 자기 경험이 깃든 말일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들은 “내가 해 봐서 아는데…….”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배신하는 존재도 사람. ‘인간보험’의 전도자가 사장인 행운마트에서도 절도는 일어난다. 그는 학생들이 술·담배를 훔치면 엄격하게 나오지만 다른 것은 봐 준다. 즉석용서는 아니다. 학생들에게 “아저씨가 너 물건 훔친 거를 부모님이나 선생님한테 말하는 게 좋냐”부터 묻는다. 그 애들은 “아니요”라고 한다. 그러면 그는 협상안을 제시한다.
“공책에다가 영어 단어 하나를 100번씩 써. 100 단어를 써야 한다. 다 해서 만 번. 검사 맡아야 용서해 준다.”
그가 오랫동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 아버지였다. 산소에 갈 때마다 “당신, 왜 나를 낳아놓고 일찍 죽었냐? 왜 나를 힘들게 하냐?”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의 나이 다섯 살에 암에 걸려 자리에 누운 아버지. 그가 여덟 살에 세상을 떠나버린 아버지. 그래서 어머니 혼자 온갖 고생을 하며 4남 2녀를 키우게 한 아버지.
그는 ‘아버지 학교’에 가서야 눈물을 쏟으며 그 동안의 애증을 끝냈다.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젊은 아버지를 인간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마트에 와서 물건 훔치는 아이들에게도 독특한 사면방식을 쓸 수 있는 거다. 그가 마주한 사람이 나이 어린 사람이라도, 처지가 어려운 사람이라도, 그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난다.
행운마트
전북 군산시 나운2동 45 / 063-463-0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