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에 사는 한 소년은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 때 처음으로 무언가에 매혹되었다. 신태인에 있는 외가에 갔을 때였다. 소년이 사로잡힌 것은 한문. 동네에 서당이 있었다. 그 다음 겨울 방학에도, 그 다음 여름 방학에도, 소년은 어머니한테 “외갓집 가서 서당 다니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꼬박 6년 동안 서당에 다녔다.
“열한 살 이후에는 방학 때 친구들이랑 놀아본 기억이 없어요. 한자에 이끌렸으니까요. 그렇게 한자 공부에 빠져들었죠. 전체적이고, 통찰을 할 수 있는, 동양철학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의사라고 하면, 양의사 보다는 한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부안 소년은 한의사 최연길이 되었다. 그는 군산 제일중학교에서 직업에 대해 강연한 적 있다. 중학생들은 아직 진로나 직업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한의사가 하는 일도 궁금하게 여기지 않았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지에 대한 호기심만 컸다. 그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돈 벌고 싶으면, 의사를 해서는 안 돼요. 원하는 게 돈이라면, 사업을 해야죠. 사업가가 훨씬 돈을 많이 벌어요. 의사가 아무리 많이 벌어도, 한 달에 1억, 2억을 벌수는 없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1억도, 10억도, 100억도 벌 수 있죠.”
한의학에서 할 수 없는 게 있으니까 양방이 필요
2002년, 그는 군산에 정착했다. 미룡동에서 한의원을 하는 동안 통증, 비염, 축농증, 아토피 환자 1만 5천여 명을 치료했다. 모든 치료과정을 사진으로 찍고, 기록으로 남겼다. 철저하게 근거 중심으로 치료를 했다. 그러면서 한의학에서는 할 수 없는, 양방의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은 양·한방 협진병원인 ‘노블한방병원’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의료제도는 양방과 한방으로 이원화 되어 있어요. 아직도 한의사는 법적으로 엑스레이 장비를 못 쓰게 돼 있어요. 지금 남초등학교 학생 하나가 입원해 있거든요. 병원에 왔는데 발목이 많이 부어 있더라고요. 골절일 수 있는데, 그러면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하잖아요. 한의사는 엑스레이를 찍을 수가 없어요. 제가 원했던 병원 콘셉트는, 환자가 양방이냐 한방이냐 가리지 않는 거죠. 치료법을 다 동원해서 빨리 일상과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해야죠. 그러려면 한의사들 자체의 힘만으로는 부족해요. 양방이 할 수 있는, 엑스레이나 혈액 검사 같은 것들이 필요하죠. 그래서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협진 병원을 하게 됐죠.”
작년 3월에 개원한 노블한방병원은 거의 열 달 만에 자리를 잡았다. 안정이 되었다. 그는 곧바로 관내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수소문했다. 주로 형편이 어려운 분들과 환자가 많은 경로당들이었다. 장성원 신부님이 운영하는 ‘나현네 집’과도 인연을 맺었다. 올해는 수송동사무소를 통해서, 일곱 곳에 쌀 220kg씩을, 매달 지정기탁 하기로 했다.
소외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찾아서
오랜 시간 의료봉사도 하고 있다. 여름에는 원광대 한의대 본초반 후배들과 선유도와 부안 등 의료소외지역에 진료하러 다녔다. 일맥원(고아원)아이들의 아토피 피부염도 치료해 준다. 지금도 고등학교에서 의뢰가 들어오면 점심시간을 쪼개 금연침을 놓아주고 온다. 뜻하지 않게 남초등학교 야구부도 진료하고 있다.
“남초등학교 학부모 한 분이 저희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학생들이 면회를 오는데 보니까 야구부예요. ‘니들 몇 명이냐?’ 했더니 13명이라는 거예요. 선수가 적으니까 애들이 못 쉬고 경기를 계속 하잖아요. 거기 감독님을 만났어요. ‘애들 주치의가 있냐? 부상당하고 계속 뛰면, 애들의 선수 생명에 도움이 되냐?’를 물었죠. 감독님이 그러더라고요. 부상당한 채 경기 하면, 도움은 안 된다고요. 하지만, 당장 게임에 9명은 나가야 하니까, 계속 한다고요. 그러면, 아이들을 나한테 보내라. 게임 있을 때에 내가 팀 닥터로 나가주지는 못하지만, 부상당했을 때 보내라. 그래서 진료를 하게 됐지요. 학교도 작고, 야구부 재정이 열악해도, 애들이 운동을 열심히 하더라고요.”
그는 3년 전부터 <닥터 MBC>라는 의료정보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다. 텔레비전에 나오지만,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 같은 비주얼은 아니다. 화면발이 잘 받는 갸름한 몸매긴 하다. 무엇보다 의술, 일부러 전주에서 찾아오는 환자도 있다. 어르신들은 디스크나 오십견 같은 통증질환에, 어린애를 둔 부모들은 성장치료나 아토피에 관심이 많다. 나도 물었다.
“저희 큰애가 작거든요? 늘 반에서 1번 아니면, 2번이에요. 올해 중학교 3학년 올라가는데 아직 2차 성징도 안 왔어요.”
“푸하하핫!” 그는 “걱정 마세요. 남자애들은 스무 살 넘어도 커요”라고 했다. 천천히 크다가 두 번의 폭풍 성장기가 있다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올라가는 겨울방학 때는 신발을 두 번 사게도 된단다. 하도 쑥쑥 자라서 아침에 입고 나간 바지가 저녁에는 짧아지겠지. 여자애들은 초경 전 치료가 가장 중요하지만 초경 후 3개월까지는 그나마 해 볼만 하다고.
나는 그를 만나고서야 몸속에 박는 침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옛사람들은 통증이 심하고, 지속적인 자극이 필요할 때, 평생 가는 금침을 몸 안에 매립했다. 지금은 떡갈나무 추출물로 만든 녹는 실을 쓴다. 금침 대신에 혈 자리에 침을 놓는 게 매선이다. 매선은 통증 치료에 쓴다. 디스크, 협착증, 오십견, 마비성 관절질환. 그리고 중풍, 비만에도 쓴다.
“몸 안에 실이 들어가면, 6-8개월 동안 천천히 녹아요. 이게 없어지는 게 아니라 결합조직이랑 합쳐져요. 실에 살이 와서 붙으면서 새로운 콜라겐이 만들어지는 거죠. 이렇게 매선을 통증 질환에 금침 대신 썼단 말이에요. 녹으면서 새로운 조직 형성이 되고, 강화시켜 주면서 탄력이 생긴단 말이에요. 그래서 한의학에서 이걸 얼굴 주름과 리프팅 같은 미용목적으로도 쓰게 된 거죠.”
‘옆집 아줌마’한테 밀리는 한의사지만...
그는 환자가 완치 되었을 때 참 좋다. 어릴 때 치료받은 애들이 아가씨가 되고, 결혼해서 애기들까지 데리고 오면 뿌듯하다. 또 하나, 식구들한테 의사로서 신뢰 받을 때 완전한 기쁨을 느낀다. 약사인 그의 아내도, 한의사 남편을 무한 신뢰한다. 그래서 부부는 네 살과 여섯 살 늦둥이 애들에게 해열제나 양약을 먹이지 않고 키운다.
5년 전, 11월의 어느 토요일. 익산에 사는 그의 장모님이, 중풍으로 쓰러진 처외삼촌을 입원실도 없는 그의 한의원에 모시고 왔다. 환자는 이미 동공도 풀려 있고, 소변도 나온 상태였다. 그는 계속 침놓고, 약 달여서 처외삼촌을 치료했다. 사흘 만에 깨어난 처외삼촌은 말만 조금 어둔할 뿐, 마비가 완전히 풀려서 원대병원으로 이송됐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최연길 원장은 대장암을 이겨낸 우리 시아버지처럼 “잘 먹어야 병을 이긴다”고 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약이 된다면서. 작년에 온 나라를 휩쓴 민들레 열풍도 얘기했다. 보통 사람은 한 가지만 오래 달여 먹을 필요가 없단다. 대장의 농, 고름을 제거하는 약으로 쓰이는 게 민들레라고. 그러나 의사가 전하는 바른 의료 정보도, 이 한 마디면 무너진다고 했다.
“우리 옆집 아줌마가 그러는데...”
‘옆집 아줌마’한테 밀리는 한의사 최연길의 병원 한쪽에는 악보 받침대와 색소폰이 있었다. 색소폰 부는 한의사! 색달랐다. 나는 연주 사진을 찍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환자들 보고, 필요한 곳에 보탬이 될 길을 찾느라고, 악기를 불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멋져 보이는 설정 사진을 찍지 않아도, 그는 이미 지역사회에 힘이 되는 한의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