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흰 양말에다가 ‘쓰리빠’를 신고, 교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딱 기분 좋게 술 마신 동네 아저씨 같았다. 그의 앞에 자동차가 멈추자, 그는 환해졌다. 차에서 내린 아이 어깨를 감싸고는, 아이 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아침마다 교문에 서서 아이들을 맞이하는, 군산 명화학교 한두현 교장선생님이다.
“지역에서 우리 애들한테 박스 접는 것을 훈련 시켜주고 있어요. 처음에는 백 개쯤 접었는데 어제는 천 개 넘게 접었어요. 사장님이 놀랄 정도로 잘 접고 있어요.”
한두현 교장선생님은 처음 보는 나한테 대뜸 자랑부터 했다. 섣부른 자랑은, 듣는 사람의 배를 아프게 하거나 속마음을 아니꼽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밥이나 술을 사면서 자랑하고 축하받는다. 이제 자랑은 사랑과 우정이 깊은 사이에서만 하는 것으로 굳어지고 있다. 그런 흐름에 아랑곳하지 않는 교장선생님 얼굴은 몹시 해맑았다.
"세상에 없애야 할 개 두마리는 편견과 선입견입니다."
명화학교는 지적장애 특수학교이다. 학교 안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전공과(전문대학과 비슷함)과정이 다 있다. 처음부터 명화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있다. 정훈, 원종, 태영이처럼, 일반학교에 있는 특수학급에 다니다가 전학 오는 아이도 있다. 전공과 2학년 정훈의 엄마이자 명화학교 송영숙 운영위원장은 말했다.
“일반 학교에서 특수학교로 오는 결정은, 비장애인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부모들이 상상을 못할 정도로 고뇌가 있어요. 처절하게 고민해요. 제가 우리 정훈이를 일반중학교 대신 명화학교에 보낼 당시에는 희망이 없었어요. 특수학교로 보내는 것은 엄마의 마지막 선택이에요. 얼마나 울고, 여기저기 상담했는지……, 아무 희망이 없는 곳이 특수학교였어요.”
2012년 9월 1일, 명화학교 학부모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 날 한두현 교장선생님이 초빙되어 왔다. 학교 운영위에서는 오랫동안 논의했다. 명화 같은 특수학교에서는 보여주는 게 필요 없다. 내적으로 아이들에게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만이 절실했다. 운영위원장의 레이더에 ‘청소하는 교장선생님’이라는 한두현 선생님이 잡혔다.
당장 한두현 교장선생님의 ‘신상 털기’에 들어갔다. 학부모, 학교운영위, 도교육청, 교사진 등 네 집단의 평가는 한결같았다. 전주 곤지중학교에 임기가 1년 남은 상태였지만 계속 전화를 했다. 명화학교에 와 달라는 압력 행사(웃음)를 했다.
“저는 부담이 많았어요. 정말 잠을 못 잤어요. 이 양반이 ‘개판’ 치면 어떡하지? 명화가 마지막 부임지인데, 정년 앞두고 선생님들한테 싫은 소리 안 하고 싶겠고, 휴식만 하고 가시면 어떡하나? 그러나 저는 제 촉을 믿었죠.”
운영위원장의 선택은 탁월했다. 한두현 교장선생님이 오자마자 학교는 달라졌다. 교장실 한쪽 벽면에 전교생의 이름과 사진, 특징을 붙여놓았다. 아이들이 등교하는 1시간 동안 학교 수위 노릇까지 하며 교문에서 아이들을 맞는다. 눈비가 와도, 햇볕이 뜨겁거나 칼바람이 몰아쳐도, 거르는 날이 없다. 학교 지킴이가 퇴근하는 오후 3시, 다시 교문에 선다.
한두현 교장선생님은 아이들한테 섹소폰과 아코디언 연주를 해 준다. 마술도 보여준다. 미인이라는 이유로 마술 보조를 했던 송영숙님은 “굉장히 어설픈 마술이에요”라고 솔직담백한 평가를 했다. 자신이 여느 마술 보조처럼 가슴이 드러나는 드레스까지 입었다면, 마술하는 교장선생님은 막대한 지장을 받고 말았을 거라는 농담도 스스럼없이 했다.
교장선생님은 아이들하고 똑같이 스쿨버스를 타고 다녀본다. 아이들이 집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오지만 학교에서는 걸어 다니는 게 선생님들의 사랑 덕분이라고 칭찬한다. 교장실에 있지 않고, 항상 돌아다닌다. 교권 침해니까 교실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교장실과 교실 유리창을 다 투명하게 바꿨다. 학부모도 언제든 학교에 와서 아이들을 볼 수 있다.
“명화는 지금 교장선생님이 오시면서 달라졌어요. 초임지로 명화에 온 선생님들은 ‘특수학교가 이런 데구나’를 배워요. 사랑과 열정을 쏟아 부어요. 우리 학교가 워낙 좋아지니까 전학 오는 애들이 많은데 더는 못 받아요. 운동회 끝나고 나서, 어떤 교감 교장 선생님이 애들하고 디스코 파티를 합니까?”
송영숙님의 말에 서혜란 교감선생님은 부끄러워했다. 아침마다 등교하는 애들에게 “사랑합니다”, “알라뷰”라고 서슴없이 들이대며 아이들 볼에 ‘키스 마크’를 남긴다는 야성미는 없었다. 일반학교에서 마지막 선택으로 오는 특수학교, 전학생에게 “죽을힘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교감선생님의 진심은, 부모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운영위원회 진선미 부위원장은 “우리 학교 자랑 1호가 교장·교감선생님이에요”라고 했다. 그녀의 아들 성준은 의사소통이 된다. 아픈 아이라는 티가 안 난다. 그러나 경기를 하면서 쓰러진다. 그녀는 성준의 초등 입학을 앞두고, 특수학교들을 알아봤다. 그 곳에서 만난 한 선생님은 “여기 특수학교 아이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다 똑같다”고 했다.
생각할수록 아픈 말이었다. 그래도 성준 엄마는 아이를 태우고 군산에서 전주까지 날마다 오갔다. 남들이 극성이라고 해도, 엄마니까 할 수 있었다. 고심 끝에 선택한 학교에서 성준이는 큰 변화가 없었다. 완전 낙담한 뒤에 명화학교를 선택했다. 집하고 가깝다는 장점 하나만 보고서. 성준과 엄마는 지금의 교장·교감 선생님이 온 뒤에는 평화롭다.
한두현 교장선생님은 교사들이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하려고 불필요한 교직원 회의는 안 한다. 교육현장을 보면, 행정 잡무가 엄청나게 많다. 교사가 일거리를 들고 교실로 가면, 아이들은 방치된다. 업무 포탈을 도맡은 교감 선생님과 교무실무사가 교육행정 업무를 줄여준다. 교사들은 점심시간에도 교무실에 오지 않고,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
명화학교에서는 교사들 모두가 뭉쳐서 일한다. 운동회 때 달리기만 봐도, 각기 다른 장애를 가진 애들이, 각자의 페이스대로 달리게 한다. 학습발표회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연극을 할 때는 전교생이 무대에 섰다. 움직일 수 없는 아이는 ‘의자왕’을 했다. 위대한 작가도, 명화 교사들만큼 시나리오를 쓸 수는 없었다. 한두현 교장선생님은 말했다.
“세상에 없애야 할 개 두 마리는 편견과 선입견입니다. 우리 애들이 아무 것도 못하는 것 같지만 영리해요. 좀 느릴 뿐이지 할 수 있어요. 학교에서 라면도 삶아요. 집에서는 설거지, 빨래 못 하지만 학교에 있는 생활관(아파트와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음)에서는 할 수 있어요. 애들끼리 담임 선생님 생일파티도 해 줬어요. 학부모들이 희망을 갖고, 학교 교육을 믿어줬기 때문에 학교가 이렇게 변했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게 해 줬지요.”
다섯 명의 어른이 모여 하는 인터뷰였다. 교장·교감선생님과 학교운영위 어머니 세 명. 이들이 하는 모든 말은 결국 자랑으로 끝났다. 애들 자랑, 학교 자랑, 선생님 자랑, 학부모 자랑. 들을수록 마성의 매력이 있었다. 나는 자꾸 코가 찡해졌다. 티 안 나게 수십 번 콧물을 들이마셨다. 아침에 명화학교에 왔는데 낮밥 먹을 때가 되어버렸다. 또 자랑이 나왔다.
“우리학교는 급식이 정말 좋아요. 집 밥 보다 더 맛있어요. 이건 드셔봐야 해요.”
명화학교에는 형편이 곤란한 집 아이도 많다. 유일하게 한 끼 포식하는 것이 학교 급식인데 양도 많고, 질도 좋다. 그 날 메뉴에 고기가 들어있으면, 아이들은 자기들이 가꾼 텃밭에서 야채를 직접 뜯어서 씻어온다. 쌈을 싸서 교장 교감 선생님한테도 준다. 식판도 싹 바꿨다. 똘똘 뭉친 운영위원회조차 멀쩡한데 바꾸느냐고 반대했지만 교장선생님은 흔쾌히 승낙했다.
운영위원장 송영숙님은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아이도 많은데 좀 더 가벼운 식판이면 좋잖아요”라고 했다. 나는 급식실에서 그녀의 아들 정훈(자폐장애 1급)을 만났다. 정훈은 2년 전인 스무 살 때까지만 해도, 명화학교가 들썩이게 울었다. 통제가 안 됐다. 정훈은 장애의 특성상 식탐도 유별난데, 식판을 받고서도 먹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훈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든 이는 담임 조영호 선생님. 180cm인 정훈에게 ‘한 주먹 감’도 안 되게 생겼다. 정훈과 친구들은 한 개 접으면 15원 주는 박스를 접는다. 아무 것도 못하던 아이들이 2-3시간 동안 꼼짝 않고 접는다. 접은 박스 열 개를 한 묶음으로 정리한다. 그 모습은 수능 만점 보다 값지다.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들도 직업을 가질 수가 있겠구나”라는 구체적인 희망을 보고 있다.
모두의 꿈을 꽃 피우려면 더 큰 힘이 필요하다. 전공과까지 마친 아이들이 취업을 못 하면, 시설로 가거나 집에서만 지내야 한다. 내가 교장실에 앉아 있을 때에 투명 유리창 너머로 환하게 인사를 건네 오던 아이들, 급식실에서 밥 먹다가 서혜란 교감선생님이 들어오자 껴안으며 웃는 아이들. 그 애들에게 갈 곳이 있어야 한다.
교육의 연계가 없으면, 휠체어에서 내려 혼자 걷던 애들은, 질서정연하게 박스를 접던 애들은, 상대를 기다려서 함께 밥 먹을 줄 아는 애들은, 생활관에서 가정생활을 할 줄 아는 애들은, 퇴행할 수밖에 없다. 지역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11월 18일, 군산시의회 강성옥 시의원의 발의로 발달장애성인 평생교육 지원조례가 제정되었다.
원종이는 고등학교까지는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에 다녔다. 지금은 명화학교 전공과 1학년이다. 원종이 엄마 윤혜옥님은 나보고 명화학교 등교 모습을 꼭 보라고 했다.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 있어요. 선생님들이 다 나오셔가지고요, 아픈 애들, 늦게 오는 애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보세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라고 했다.
나는 본 적 없는 명화학교의 등교 시간이 떠올려졌다. 돈 아껴서 애들한테 쓰겠다고, 한 여름 뙤약볕에서 ‘근천을 떨며’ 나무 가지치기를 한 한두현 교장선생님 모습도, 영상 지원이 되는 듯 했다. 서혜란 교감선생님은 나를 명화학교 학생 대하듯이, 학교 밖까지 배웅해줬다. 돌아오는데 눈물 콧물이 한꺼번에 나왔다. 나는 차를 세우고는 코를 세게 풀었다.
군산명화학교
전북 군산시 나운1동 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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