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갓!”
영어가 저절로 나왔다. 우리말을 영어로 바꾸려고 애쓰지도 않았는데 일어난 기적. 공부한 지 1년 반 만에 이룩한 쾌거.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가 나오고 꽃가루가 흩날려야 할 순간, 나는 당황했다. 수업 시간은 오후 7시 30분. 교실에 있는 학생은 나 혼자뿐이었다. 원어민 선생님 댄은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릴까요?”라고 물었다. 2014년 초봄이었다.
2012년 10월 31일, 나는 영어학원에 처음 갔다. 군산 외대어학원 박욱현 선생님이 ‘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에 재능 기부로 하는 주 2회 수업. 밥벌이와 육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갔다. 네 살 먹은 둘째는 큰애(그때 중1)가 봤다. 엄마가 학원 간 사이에 동생이 똥을 누면, 큰애는 대충 닦아 주었다. 둘째한테서 똥냄새가 났다. 나는 가훈을 만들었다.
“1일 1똥 ‘모닝똥’을 싸자!”
가훈을 따라서 할 수는 있지만 실천할 수 없는 둘째 꽃차남. 내가 바뀌어야 했다. ‘똥 묻은 팬티 좀 입을 수도 있지. 갔다 와서 씻기면 되잖아’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영어를 잘 하고 싶어’라는 마음은 별로 없었다. 취업 준비를 피 말리게 한 적도 없어서 영어에 맺힌 한이 있을 리도 없고. 영어학원 다니는 목표는 하나, 무결석뿐이었다.
공부하러 다닌 지 석 달, 18대 대선이 끝나고 맞은 2013년. 나는 마음 둘 데가 필요했다. ‘판타지’에 꽂혔다. 그래서 로맨스 영화 <노팅힐>을 50번 넘게 읽고 들었다. <더 리더>도 그렇게 읽고 들었다. 일하고 애들 키우는 아줌마라서 쫓기듯 사는 처지. 시간 없다고 극성을 떨었다. 잘 때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영어를 들었다. 결국, 이명이 왔다.
“이어폰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래요. 노인성 난청이 올 수도 있습니다.”
내 귀를 진찰한 이비인후과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재깍 이어폰을 버렸다. 그러나 공부는 계속 이어갔다. 남편이 사무실에서 갖다 준 스피커로 영어를 (식구들도 다 같이) 들었다. 영어책은 나 혼자서 읽었다. 어느새 학교 다닐 때도 들어본 적 없는 칭송, “배지영, 요새 영어학원에서 완전 ‘모범생’이라더라”는 말을 두 사람한테서나 들었다.
학원에서는 항상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열다섯 명 정도. 출석률은 약 60%. 어느 날부터 결석률이 출석률을 앞질렀다. 교실에 나 혼자 있거나 두세 사람만 앉은 채로 수업하는 날이 늘었다. 2년간(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6개월 늦게 시작했음) 시간을 내서 공부를 가르쳐주던 박욱현 선생님이 그만하자고 했다. 작년 봄이었다.
“이렇게 끝내는 건 아쉬우니까 우리끼리라도 공부 계속 해요.”
강경숙, 정미리, 이미정, 조영민, 그리고 나. 따로 개인교습 하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새 선생님은 우리말을 잘 했다. 우리는 영어를 잘 못했다. 그러니까 1주일에 한 번씩 영어를 말하러 가서 우리말을 더 많이 썼다. 고민 끝에 수준에 맞는 책을 정해서 공부하기로 했다. ‘1주일에 한 번 해서 언제 영어가 늘까’라는 진취적인 고민도 하면서.
우리는 다른 영어공부모임에도 찾아갔다. 거기 모인 젊은이들은 ‘검은머리 외국인’들이었다. 헐! 영어를 완전 유창하게 했다. 나는 교재를 미리 읽고, 답을 모두 공책에 적어갔다. 소용없었다. 몇 명씩 그룹을 이루어서 얘기하는 시간이 따로 있었다. 책에 나온 대로만 묻고 답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나는 우리말을 더 많이 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한국말 한 마디 할 때마다 벌금 500원입니다.”
그 모임의 온라인 게시판에 뜬 공지사항. 창피해서 혼자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도 고마운 마음이 남았다. 영어 잘 하는 한국 사람들을 떼로 본 날, 좀 감동했다. ‘나도 언젠가는 저 사람들처럼,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할 수 있겠지’ 라는 희망을 품었더랬다. 3개월 만에 그만두게 됐지만 “공부 꾸준히 해서 다시 올게요”라고 문자를 보냈다.
나는 날마다 영어를 듣고 읽는 게 몸에 익은 지 오래.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연설문(박욱현 선생님한테 배우다가 말았음)을 공부했다. 50번쯤 듣고 읽었을 때야 쉐도잉(오디오 파일을 똑같이 따라함)을 할 수 있었다. 잡스 연설문 쉐도잉을 61번 했을 때, 어떤 책에서 ‘자기 수준보다 더 낮은 영어 문장을 읽으라’는 구절을 읽었다.
우리 집 책꽂이에는 큰애가 초등학교 때 읽은 영어동화책이 꽤 있다.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비밀의 화원>,<빨간머리 앤>,<소공녀>를 골랐다. 오디오 파일을 듣고 읽는데 30분, 전보다는 느슨하게 공부하는 편이었다. 대신, 계속 공부하는 사람들과 그만둔 사람들까지 모여서 산에 갔다. 가입비 무료에 탈퇴비가 무려 오백만 원인 ‘열공산악회’를 만들었다.
처음 간 곳은 군산 신시도의 대각산. 최치원이 중국까지 들리게 책을 읽었다는 월영대에 올랐다. 태풍주의보가 내려진 날, 부안 내소사 직소폭포 가는 어귀에서 돌아온 적도 있다. 동네 공원에도 자주 갔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산악회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세, 공부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기본을 지키지 못하는 조직은 무너진다. 산악회는 깨졌다.
“일주일이 왜 이렇게 빨리 가? 책도 한 번 못 펴보고 왔어요.”
개인교습 선생님과 하는 수업 시간,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우리는 서로 선생님이라 부름)들의 첫 마디가 보통 이랬다. 모두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다. 동동거리며 퇴근해서는 밥도 못 먹고 오는 날도 많았다. 다섯 명이 공부하는데 출석률은 대개 60%. 그 와중에 영어공부모임을 이끌던 이미정 선생님이 갑자기 그만뒀다. 타격이었다.
그때 나를 되돌아봤다. 나 혼자서만 잘 하려고 했다. 함께 모여 공부하는 자세치고는 치사했다. 작은 성취라도, 공부를 통해 맛 봐야 계속할 수 있을 텐데. 선생님들한테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말했다. 영어책 한 권을 보통 백 번 넘게 듣고 읽는다는 것, 날마다 1시간 정도는 공부한다는 것을. 그리고 “새해부터는 같이 할래요?”라고 제안했다.
사실, 나는 ‘앞잡이’. 박욱현 선생님을 가끔씩 만났다. 영어공부모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얘기했다. 실력이 전혀 안 는다고 하소연도 했다. 욱현 선생님은 “한 달에 한 번씩, 학원 와서 원어민이랑 얘기 할래요?”라고 했다. 꺄악! 우리는 6개월 만에 다시 외대어학원으로 갔다. 굉장히 유쾌한 홀리 선생님 덕분에 모두 입이 트였다. 웃음으로.
“해피 뉴이어. 오늘부터 영어공부 관리 들어갑니다. 하루에 5분 이상만 하세요. 영어책을 읽거나 듣거나. 지나가는 외국인을 붙잡고 프리토킹을 하거나. 그리고 이 ‘단톡방’에 밤마다 남겨주세요.”
2015년 1월 1일. 나는 공부모임의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강경숙, 정미리, 조영민, 배지영. 네 명이서 시작했다. ‘하루 5분 이상’은 첫날부터 깨졌다. 10분에서 20분씩 공부했다. 물리치료사인 고은심 선생님이 공부하겠다고 새로 왔다. 1월의 공부기록표가 꽉 찬 날, 나는 “모두에게 ‘알라봉’과 ‘쓰담쓰담’을 바칩니다”고 했다. 우리는 2월, 3월, 4월도 잘 해나갔다.
5월에는 공부모임의 ‘젊은 피’인 조영민 선생님이 이직해서 떠났다. 빈자리가 엄청나게 크게 느껴졌다. 마오쩌둥은 산맥 18개, 강 24개를 건너는 대장정을 이끌면서 “다들 멈추지 말고 계속 걸으시오! 그래야만 산을 넘을 수 있소!”라고 했다. 나는 평범한 아줌마,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에게 “횽아들, 지켜보고 있다요. 공부하고 주무세요”라고 독촉했다.
7월, 열정이 끓어 넘치는 이희옥 선생님이 새로 왔다. 그녀는 휴가 가서도 새벽에 일어나서 영어공부를 했다. 외대어학원 수업도 월 3회로 늘었다. 8-9월에는 공부 해보겠다고 새로 온 사람이 무려 네 명. 모두 열 명이 되었다. 원어민 선생님 애런이 사람들을 헷갈려 해서 이름표도 만들었다. 공책에 쓰던 공부기록표도 액셀로 표를 만들어서 했다.
하지만 현실에 부딪히고 말았다. 일 하면서 애 키우는 여성들이 저녁에 시간 내서 공부하러 오기는 어렵다. 애들은 엄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운다. 남편은 신신당부를 해도 늦는다. 서운한 게 쌓인다. 영어가 뭐라고 가정불화가 생기는가. ‘뉴 페이스’들은 돌아갔다. 우리 공부모임은 원래대로 여섯 명이 됐다. 실의에 빠진 내게 큰애 제굴이가 말했다.
“엄마, 날마다 공부하라는 건 스파르타예요. 내가 요리를 좋아해도, 레시피 노트 밀리면 짜증난다고요. 포기하고 싶다고요. 엄마는 질리게 하는 스타일이야. 너무 빡 세. 인간미가 없어요. 그래서 그분들이 공부하러 왔다가 다 가버린 거예요. 엄마 혼자서만 해요. 그거 알아요? 엄마는 말할 수 없는 부담감을 준다고요. 공부가 취미라는 거 자체가 무모해요.”
2015년 10월, 그 동안의 내 ‘폭정’을 반성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공부기록자’로 변신했다. 주말에는 영어를 쳐다보지도 말라며 단톡방에 ‘주 5일 공부’를 공지했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들이 환호했다. 새로 온 김완순 선생님이 날마다 공부하는 걸 힘들어 하는 게 보였다. 나는 “수업에만 잘 나오고, 공부기록은 나중에 해도 돼요”라고 말해줬다.
“이 순간들이 앞으로 인생에서 어찌 연결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뒤돌아보고서야 그 연관성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작은 계기들이 어쨌든 미래에는 연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대학을 졸업하는 청년들에게 한 말이다. 아줌마들이라고 왜 인생의 미래가 없겠는가. 밥벌이하고, 살림하고, 애들 키우는 일 말고도 하고 싶은 게 있다. 가이드 없이 여행하고 싶고, 직장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외국인과 대화하고 싶고, 좋아하는 ‘미쿡 오빠’가 부른 노래, 책, 영화를 그냥 알아듣고 싶은 거다.
며칠 전에 영어책을 읽다가 큰애에게 “제굴아, 엄마 좀 영어 잘해지지 않았냐?”라고 물었다. 선의의 거짓말도 모르는 큰애(학교 공부 못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는 “똑같은 것 같은데요”라고 했다. 나는 의연하다. 박욱현 선생님이 “현지에 가지 않는 이상, 공부로 1-2년 해도 티가 잘 안 나는 게 영어예요”라고 말한 걸 믿기 때문이다.
영어 공부 3년. 어떤 이는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을 대며 은근히 시키려고 한다. 그 서당 개는 천재적인 개였을 거다. 하루 30분 이상 공부한 나는 아직 말 꺼내기가 어렵다. 그래도 두 달 전부터 다큐멘터리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을 듣고 읽는다. 영어 좀 하는 친한 언니가 “궁금하다야. 영어 좀 해 봐” 라고 했다. 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언니, (영어 시킬 거면) 우리 헤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