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푸치노 한 잔 주세요.”
“시나몬을 넣어드릴까요?”
“네, 듬뿍 주세요.”
열여덟 살, 카페에 처음 간 성탄은 시나몬이 뭔지 몰랐다. 그저 ‘있어’ 보이고 싶어서 듬뿍 달라고 했다. 주문한 대로 나온 카푸치노, 거품 위에 뿌려진 가루에서 계피 냄새가 났다. 마셔봤더니 맛까지 별로. 성탄은 ‘이렇게 맛없는 걸 배워야 하나? 그래도 왔으니까 말은 해 보자’고 생각했다. 카운터로 가서 ‘커피 점빵’ 사장에게 말했다.
“고등학교 2학년인데요, 커피 배우고 싶어요. 제가 힘도 잘 쓰고, 궂은일도 잘 해요. 화장실 청소도 깨끗하게 하고, 카페도 다 청소할게요. 가르쳐만 주세요.”
혼자서 일하는 채선경 사장은 당황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일 다시 오세요”라고 했다. 다음 날, 성탄은 방과 후에 ‘커피 점빵’으로 갔다. “오케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뒤로 오후 5시면 카페에 갔다. 드립커피부터 배웠다. 제각각 산지가 다른 커피의 맛을 봤다. 커피에서도 바나나 맛, 군고구마 맛, 탄 맛, 담배 맛, 다크 초콜릿 맛이 났다.
성탄은 날마다 카페에 갔다. 장사가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사람 대하는 법을 배웠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자세를 보고 익혔다. 카페 사장은 “성탄아, 월급이야” 라며 돈까지 줬다. 커피 배우면서 카페에 머문 시간을 계산한 거다. 그는 월급이라는 기분 좋은 말의 실체를 경험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속 ‘커피 점빵’에 다녔다.
성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 할 뻔했던 사람. 여덟 살 많은 그의 형이 “동생 낳아주세요”라고 부모님한테 조른 덕분에 태어났다. 늦둥이인 성탄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우월하게 카리스마를 가진 형 앞에서만 고분고분했다. 성탄이 5학년 때, 형은 군대에 갔다. 하사관으로 입대해서 직업군인이 되었다.
“제가 고등학교 갈 때 마이스터고가 붐이었어요. 인문계 가서 바닥에 있을 바에야 기계공고 가서 잘 하자고 생각했어요. 일찍 취업하고도 싶고요. 공고는 1학년 때부터 1주일에 한 번씩 작업복을 입어요. 처음 입고서 화장실에 갔다가 거울을 봤어요. 순간, 나이 들어서도 작업복 입은 제 자신을 봤어요. 어울리지 않았어요. 기계는, 제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성탄은 학교에서 용접, 금속, 열처리를 배웠다. 2학년 때부터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 작업복을 입었다. 금속재료 자격증도 땄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영 다른 생각을 품었다. 행동으로 옮겼다. 전문계 특별전형으로 대학에 가려고 수능공부를 했다. 기계공고지만, 성탄처럼 대학 가려고 내신에 신경 쓰고, EBS 인터넷 강의를 듣는 친구가 있어서 같이 공부했다.
군인인 형은 여전히 성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 “어려운 일을 해 봐야 힘든 일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성탄은 주말에는 오전 4시에 인력시장에 갔다. 공사 현장에서 일 하고, 대형 유리창의 새시 바꾸는 일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성탄에게 형은 “뭐, 하고 싶은 거 없냐”고 물었다. 몇 번 들었던 질문인데 그때는 완전 새로웠다.
“심리·적성 검사하는 ‘큐넷’에 들어가 봤어요. 만 개가 넘는 직업을 보고서 한 달 넘게 고민했어요. 잘 때도 생각했고요. 그러니까 어떤 공간에 제가 있고, 사람들이 오가는 게 그려졌어요. 저도 되게 밝고, 사람들도 진짜 밝아요. 그건 장사잖아요. 그때부터 사람들이랑 소통하는 장사가 하고 싶었어요. 커피가 생각나서 무작정 ‘커피 점빵’에 찾아간 거고요.”
2012년, 성탄씨는 장사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군산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그는 학교 끝나면, 양푼 빙수로 유명한 한 카페로 출근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이 해 주는 커피 감별사 수업도 들었다. 커피만 알고 지내던 성탄씨는 음료의 세계에 눈을 떴다. 매력 있었다. 스스로 개발해 보고 싶었다.
1학년 1학기를 마친 성탄씨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맞는 첫날밤은 수련회 온 기분, 들떴단다. 그 기분은 24시간도 못 가서 깨졌다. 수도꼭지에서 몸을 씻고, 짧은 시간에 군장을 갖추는 게 어려웠다. 그러나 곧 군대 생활은 재미있어졌다. 안 하던 독서까지 했다.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와 <두근두근 내 인생>은 세 번씩 읽었다. 글 읽는 맛을 알았다.
“작년 3월에 제대하고 바로 일했어요. 군대 가기 전까지 일했던 카페의 사장님이 저보고 오라고 했어요. 프랜차이즈로 치면, 점장으로 일하라고요. 월요일만 쉬고, 하루 12시간씩 일했어요. 재밌었죠. 어차피 군대 갔다 왔으니까 커피도 다시 기초부터 배웠어요. 새로웠어요. 그때 같이 커피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 우성열 형이 있었어요. 지금 동업하는 형이요.”
성탄씨는 항상 ‘서른 전에 내 가게를 갖자’는 생각을 해 왔다. 장사를 통해 많은 경험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장소를 만나서, ‘나만의 가게’를 열고 싶었다. 그런데 예상은 빗나갔다. 우성열씨와 자주 얘기를 하면서 성탄씨의 계획은 앞당겨졌다. 올해 여름, ‘플레이 카페 고우’를 꾸려나가는 사람이 되었다.
지난 해 12월부터 성탄씨는 창업 준비를 했다. 성열씨와 함께. 둘이 동업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말렸다. 더구나 두 사람의 나이는 열다섯 차이. “아휴, 세대 차이 나” 할 만큼 세월의 장벽이 있을 터. 그래도 둘은 밀고나갔다. 말이 잘 통했다. 각자 일을 하면서도 몇 달간 가게 터를 보러 다니고, 가게의 콘셉트, 디자인, 방향을 의논했다.
상권 좋은 데는 보증금만 해도 1억 원이 넘었다. 임대료가 저렴한 곳, 군산시민과 관광객을 동시에 끌어 모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은 구시가의 골목 안, 10년 째 비어있는 건물이었다. 두 사람은 인테리어 설계를 직접 해서 공사하는 사람들에게 맡겼다. 건물 실내를 뜯어냈는데 구조물이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살리기로 했다.
“성열이 형하고 준비하면서 의견이 다르면 서로 조율했어요. 어려움도 많았어요. 가게만 차리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건축법 같은 것도 다 알아야 했어요. 준비할 것도 많고요. 반년 넘게 준비하면서 ‘나한테 이 일이 맞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 전에 알바 할 때도 그랬거든요. 내 가게가 아닌데도, 가게에서 일하면 제가 살아있는 것 같았어요.”
성탄씨는 열여덟 살부터 일해서 번 돈에 소상공인 대출을 받았다. 서울에서 대학 졸업하고 직장에 다녔던 성열씨도 모아놓은 돈 전부를 쏟아 부었다. 그래도 부족해서 발품을 많이 팔았다. 아주 좋은 조건의 커피 머신을 사기 위해 거제도까지 다녀왔다. 테이블 일곱 개짜리 카페지만, 나중에 소규모 공연을 하기 위해서 한 쪽에 단을 올렸다.
군산에도 카페는 아주 많다. 맛있는 커피와 즐거운 분위기로 가게를 이끌어 가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을 했다. 성열씨와 성탄씨는 제과제방 기능장인 ‘홍윤 베이커리’의 지도를 받아서 케이크와 빵 만들기를 배웠다. 케이크는 배운 대로 잘 나오는데 쌀로 만드는 식빵은 발효 상태에 따라서 풍미가 달라졌다. 몇 달째 연습 중이라는 성탄씨가 말했다.
“저는 전문가는 아니에요. 커피나 빵, 요리도 제 맘대로 즐기는 사람이에요. 가게가 플레이 카페잖아요. 손님들한테 재미를 주는 카페가 되어야죠. 메뉴가 멈춰 있으면, 가게는 멈춘 거예요. 손님들 발길도 끊어지겠죠. 여기서 장사를 하지만 연구소이기도 하니까 다음 창업을 고민해요. 이게 안 망한다는 가정 하에 군산 특산품인 흰찰쌀보리로 빵과 커피 메뉴도 만들고 싶어요.”
성탄씨는 친구들 만나면 ‘예쁜 여자’ 얘기를 주로 하는 평범한 청년. 사이클을 타고 출·퇴근 한다. 동네 공원에서 1시간씩 맨몸운동을 한다. 첫 가게가 망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마흔 전에는 성공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자신과 가족을 책임지고, 좋은 일에 돈을 쓸 수 있으면 성공이라고. 빚 없이 ‘내 가게’ 를 하면 성공이라고.
성열씨는 동업한 경험이 있다. 나중에 보면, 큰 갈등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몇몇 사람은 그에게 “성탄씨가 일을 잘 한다고 해도 직원으로 두는 게 낫지 않아?”라고 했다. 성열씨는 달랐다. 똑같이 책임자가 되면 자기 역량을 더 키울 수 있다고 봤다. 성탄씨의 열정과 사람들한테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자세가 좋았다. 성열씨는 말했다.
“동업한다고 나쁜 건 아니에요. 서로 막무가내가 아니니까 이야기 하면 길이 있죠. 저희가 부족한 상태에서 준비를 했기 때문에 돈이 문제지, 다른 건 없어요.”
돈과 사람을 동시에 잃는 게 동업, 안 그러려면 똑같이 나누라는 말이 있다.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는 “세상에 정확하게 나눌 수 있는 건 별로 없다”고 했다. “동업에서 중요한 건 내가 어디까지 가져갈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손해를 감당할 것인가”라고. 언제나 자기 손해는 커 보이는 법, 그러나 손해라고 여기는 대부분은 계량할 수가 없다고 했다. 결국, 동업은 품성과 신뢰로 하는 거란다.
스무 살에서 서른다섯 살 사이의 젊은이를 만나는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에는 성탄씨만 해당됐다. 성탄씨는 “동업하는 형이 있어요. 그 형이 가게에 있을 시간에 인터뷰 하고 싶어요”라고 했다. 두 사람은 똑같이 돈을 내고 카페를 차리지 않았다. 일하는 시간도 똑같지 않다. 그러나 인터뷰는 같이 하는 것, 성탄씨가 동업에 임하는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