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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꽂이 배우러 독일로, 큰애는 고3이었다
글 : 배지영(시민기자) / okbjy@hanmail.net
2015.10.01 17:11:20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아버지는 제가 돌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어요. 3남 1녀 중에서 제가 막내인데 저보다 열두 살 많은 큰 오빠가 생계를 책임졌어요. 지금은 노력해도 안 되지만, 그때는 어느 정도 고생하면, 다 먹고 살았잖아요. 오빠들이 서울 올라와서 가구 공장을 했어요. 너무 고생하는 걸 옆에서 봤죠. 저보고 대학 가라고 했지만, 영신여고 졸업하고 바로 직장에 들어갔어요.”

1979년 3월, 스무 살 복임씨는 서울 공릉동에서 종로 3가에 있는 회사에 다녔다. 중간 지점인 청량리를 지날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단 한 곳, 화우회. 복임씨는 주로 상류층의 취미였던 꽃꽂이를 배우기 위해서 무작정 찾아갔다. 월급 15만원을 받는데 학원비는 5만원. 먹고 사는 것하고 아무 상관없는 꽃꽂이가 좋았다. 무한한 재미를 느꼈다. 

“고향이 전남 나주예요. 집 울타리에 탱자 꽃이 피고, 뒤뜰에 동백나무가 있었죠. 낙원이었어요. 여덟 살 때 광주로 왔는데 대도시잖아요. 골목마다 연탄재가 있으니까 칙칙하죠. 하교 길에 유리창이 깨져서 테이프로 붙여 놓은 꽃집이 있었어요. 그 안에 하얀 국화가 예뻐서 오래 들여다봤죠. 서울에서 여고 다닐 때도 특별활동으로 꽃꽂이를 했어요. 금잔화하고 다래넝쿨로 첫 수업을 했는데 지금도 선연해요.”

 

화우회에서 꼬박 3년간 꽃꽂이를 배운 복임씨. 공릉교회의 꽃꽂이를 맡게 됐다. 스물세 살 아가씨는 토요일마다 새벽 4시 첫 차를 탔다. 남대문의 대도 상가 2층에 있는 꽃 도매시장에 갔다. 형형색색의 꽃들, 황홀했다. 한아름 사서 회사로 갔다. 시들지 않게 화장실 한쪽에 물을 받아 꽂아두었다. 퇴근할 때 꽃을 안고는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서 교회로 갔다.

복임씨는 교회 청년회 활동을 정열적으로 했다. 끝나고 나면 오후 11시, 그때부터 교회 안에 꽃을 꽂았다. 그때는 교회 꽃꽂이에 대한 책이 따로 없어서 청계천 책방을 뒤지고 다녔다. 꽃꽂이가 나와 있는 외국 책을 샀다. 내용은 모르지만 사진이 있으니까 이해가 됐다. 그래서 응용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면, 부케와 꽃길도 만들었다.

“라복임 선생님, 꽃 넘어졌다!”

일요일 새벽, 어쩌다 공릉교회에서 걸려오는 전화 내용은 똑같았다. 꽃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플로랄 폼이 없던 시절, 침봉에 많은 양의 꽃을 꽂으면 쏟아지기도 했다. 복임씨는 정신없이 교회로 달려갔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쓰러진 꽃을 일으켜 세워서 고정시켰다. 주말에는 거의 잠을 못 잤는데 피곤한 줄도 몰랐다. 꽃꽂이 하는 게 자는 것보다 좋았다.

1982년, 장영자 이철희 부부가 벌인 어음 사기사건은 나라를 흔들었다. 큰 회사가 넘어지고, 맞물린 작은 회사들이 망했다. 은행 앞에는 대출 받으려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 대열 속에는 복임씨 오빠들도 있었다. 집을 저당 잡힌 큰오빠. 큰오빠네 집에서 살던 복임씨와 어머니는 둘째오빠네로 갔다. 몇 달 살다 또 큰오빠네로, 또 둘째오빠네로 옮겨 다녔다.
“그 상태에서도 저는 꽃꽂이를 하고, 교회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야학선생도 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신나는 일이었으니까요. 식구들은 나중에야 제가 야학 한다는 걸 알았죠. 오빠가 어떡하려고 그러느냐면서 ‘싸대기’를 때린 적도 있어요. 주거가 계속 불안하니까 서글프고, 자존심도 상하고. 내 신념도 신념이지만, 차라리 결혼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죠.” 

복임씨는 올케언니의 소개로 알게 된 군산 남자 박순영씨와 교제 중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화가 잘 통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오는 순영씨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녀는 꽃꽂이를, 교회 청년회 조직을 떠날 용기를 냈다. 1985년 1월, 복임씨는 연애 6개월 만에 결혼했다. 야학을 같이 하던 후배들은 그녀의 결혼을 변심으로 여겼다. 복임씨를 원망했다.

군산시 옥산면 쌍봉리. 복임씨 부부는 시할아버지와 시부모님, 시동생들과 같이 살았다. 그녀는 살림하는 게 두렵지 않았다. 여고 다닐 때부터 오빠네 공장에서 직원들이 밥 먹을 수 있게 음식 준비를 했다. 그러나 불을 때서 밥을 하고 국을 끓이는 시골 부엌에서는 한동안 쩔쩔 맸다. 복임씨를 예뻐하는 시할아버지가 많이 도와주었다.

“우리 어머니가 사는 방법은 내핍생활이었어요. 어머니가 이웃들 품앗이를 가면서 저한테 당신 빨래거리 안 맡기려고 숨겨놓으세요. 저는 다 찾죠. 근데 세상에, 팬티가 너무 낡았어요. 낡은 부분이 더 많아. 정말 가슴 아팠어요. 한 여자의 일생을 거기서 읽었어요. 살아온 환경이 달라서 서운한 일이 있더라도, 제가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결혼한 그해 12월, 복임씨는 첫아들 상엽을 낳았다. 아기 키우면서 책도 읽고, 호박꽃도 보고, 하늘도 많이 봤다. 6월 항쟁이 일어나던 1987년에는 둘째 임신 중. 남편 순영씨는 시위하러 군산 둔율동 성당에 갔다. 복임씨는 살림하는 자신의 삶 안에서 실천을 고민했다. 식구들부터 잘 건사하자고. 그녀는 건강이 나빠 목욕탕에 못 가는 시할아버지한테 제안했다. 
 
“할아버지, 몸 가렵지? 내가 목욕시켜 드릴까?”
“(웃음) 지랄하고 있네.”
“싫으면 하지 마. 근데 물 디어서(데워서) 하면 쉬워.”
“(한참 고민한 뒤에) 그럴끄나?”

시댁 식구들과 3년 6개월을 산 복임씨는 13평짜리 연립주택 전세를 얻어서 분가했다. 시어머니 따라서 내핍생활을 한 덕분에 2년 뒤에는 아파트도 샀다. 1991년부터는 ‘일하는 엄마’, 초등학생이 된 큰애 목에 아파트 열쇠를 걸어주었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라고 지원해주는 남편 덕분에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아서 다섯 평짜리 꽃집을 열었다.
 
복임씨는 서울에서 여백의 미가 있는 동양식 꽃꽂이를 배웠다. 그러나 꽃집에서 상품으로 내놓으려면 기하하적으로 면 형태가 있는 서구식을 배워야 했다. 그녀는 화요일마다 가게 문을 닫고 전주 ‘예플라워 디자인’으로 가서 꽃을 배웠다. 8년간 끈질기게 다녔다. 같이 공부한 세 사람과 공동출판을 하고, 전시회를 한 뒤에야 꽃꽂이 단독 회장이 되었다.


“일하면서 아이들이 늘 걸렸죠. 꽃집 한쪽에 조그만 책상을 두고, 숙제도 봐 주고, 저녁밥 먹여서 버스 태워 집으로 보냈어요. 5년 만에 위기가 왔어요. 어느 날 퇴근했더니 웬 장난감이 굉장히 많았어요. 돼지저금통 두 개를 뜯어서 샀대요. ‘썩을 놈의 새끼들’ 하면서 애들을 때렸어요. 서럽게 우는 애들을 씻기는데 너무 속상해. 다시는 안 때리겠다고 다짐했어요. 내 자식으로 태어났을 뿐인데, 내가 어른이라고 때렸다는 게 후회스럽더라고요.”

복임씨는 아파트를 팔고, 빚을 내서 꽃집 건물을 사고 2층에 살림집을 마련했다. 한숨 돌리고 나니까 꽃꽂이는 또 변하고 있었다. 유럽피안(주로 독일)디자인이 나왔다. 독일 플로리스트 출신인 방식 선생이 독일 상공부 교수진과 자격증을 딸 수 있는 MOU를 맺고 서울에서 교육한다는 걸 알았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독일에 머무르면서 최종시험을 보면 된다고.

2000년부터 그녀는 매주 서울에 갔다. 2년간 유럽피안 꽃꽂이를 배웠다. 독일 드레스덴으로 가서 동기들과 한 달간 기숙사에서 살면서 시험을 봤다. 합격했다. 그러면 끝날 줄 알았다. 웬걸! 플로리스트 마이스터 과정이 엄청난 유혹으로 다가왔다. 서울에서 1년간 공부하고 중간시험과 최종시험을 보러 독일에 두 번 더 갔다. 큰애가 고3 때였다.

“아니, 꽃 장사 하면서 무슨 독일까지 가서 공부해요?” 

사람들은 복임씨에게 말했다. 그녀는 해보고 싶었다. 군산대학교 평생교육원 플라워 전담교수로 일하면서 체계화된 이론이 없어서 답답할 때가 있었다. 독일 플로리스트 과정을 공부하면서 디자인의 원리와 요소가 완전히 이해됐다. 제대로 된 지식을 새롭게 해석해서 강의하고, 손님들에게 새 디자인을 선보이는 게 좋았다. 완전 재미있었다.

먹고 사는 게 불안해지면서 꽃꽂이는 더 이상 취미가 아니다. 퇴직하면, 혹은 (남편이) 실직하면, 대처할 수 있는 수단으로 배우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복임씨는 (사)한국플라워협회 소속으로 ‘EBS 플러스 투’에서 화훼장식 기능사 강의를 했다. 군산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도 16년째 강의하고 있다. 그녀에게 꽃을 배운 제자들이 연 꽃집도 군산에만 10여 곳쯤 된다.

“꽃집도 포화 상태죠. 어떤 업종이든 그래요. 경기가 안 좋아도, 연구부문에 투자하는 기업은 살아남잖아요. 꽃집도 그래요.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자기 샵에 적용을 하면, 되겠더라고요. 샵을 낸 제자들도 계속 공부하니까 매출이 오르고요. 흐름에 대한 소통을 하니까요. 저는 지금도 한 달에 일곱 번은 오전 6시 첫 차 타고 서울에 가요. 디자인 공부 모임도 가고, 꽃시장도 가고요. 진짜 잘 안다고 해도, 계절마다 다른 게 꽃이에요.” 

복임씨가 25년째 하는 꽃집 ‘라복임 플로체’는 상권이 빠져나간 구시가에 있다. 오후 9시 쯤 되면 사람들의 발길은 끊긴다. 그곳에서 복임씨는 교육과 가게를 겸하는 복합매장을 한다. 손님들은 오랜 세월 찾아와준다. 대학 1학년 때 꽃을 배우러 왔다가 꽃집 일을 하면서 꽃꽂이 강사도 하는 안혜정 선생은 18년째 함께 일하고 있다. 서울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아들 상준씨도 꽃집에서 일한다.

“나는 후회하면서 살지 않을 거야. 신념을 지키면서 살 거야.”
새색시 복임씨는 시댁 부엌에서 불을 때며 수 없이 다짐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금서를  공부하면서 야학 동기들과 나눈 이야기를 되새겼다. 다섯 평짜리 꽃집을 열고는 가게 전화를 ‘장애인 콜택시’ 상담번호로 썼다. 혼자서는 못 움직이는 장애인과 봉사자들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였다. “생활 속에서 십일조를 하자”고 한 남편 순영씨는 명예퇴직하고 20여 년을 봉사하며 산다. 아들 상준씨는 새신랑이 되면서 결혼비용의 일부를 이웃들에게 썼다.

지난 뒤에야 “왜 그걸 그때 안 했어?” 자책하는 게 싫은 복임씨. 꽃을 공부하다가 알게 된 차 문화, 원광대학교 예다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논문 쓰는 게 힘들어서 자료를 쳐다보기 싫을 때도 있다. 하지만 노년에 후회할까 봐 자신을 다그치며 박사논문을 쓸 예정이라고. “대화가 굉장히 잘 통해요. 그게 큰 매력이에요”라는 남편은 복임씨가 하는 일은 다 좋단다. 덕분에 그녀는 자립한 꽃집에서 쉼 없이 공부하고 발전해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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