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일은 내가 물려받을 거야. 그러니까 오빠는 오빠 일 찾아서 가.”
고등학생 연희는 의대 다니는 오빠에게 늘 다짐을 받았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 마냥 좋아보였다. 반에서는 1등, 수행평가만. 시험성적은 열심히 하는 만큼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연희가 스무 살 되자마자 “나중에 배추장사라도 하려면 트럭 몰고 다녀야 하니까 스틱으로 면허 따라”고 했다. 연희는 그대로 따랐다.
연희는 성적에 맞춰서 지방에 있는 한 대학의 대체의학과에 진학했다. 아로마테라피, 척추교정, 운동치료. 컬러 테라피, 요가, 경락 등 수술하지 않고 의학을 대체할 수 있는 분야를 배웠다. 1년 등록금은 약 800만 원. 한 학기라도 일찍 졸업하는 게 효도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대체의학은 국가에서 인정 해주는 국시(국가자격시험)가 없다. 학교 졸업하면 갈 데가 없다. 어떤 사람은 추나 요법이나 척추 교정하는 센터를 차리기도 한다. 합법적으로 사람 몸을 만지기 위해서는 국시인 피부관리사 자격증이라도 딴다. 지도교수가 추천해주는 병원에 치료보조 자격으로 취업한다. 월급은 많아 봐야 100만 원 선, 미래는 암울했다.
“연희야. 네가 아빠 사무실(김치 대리점)에 와 있기만 해도 좋겠다. 아빠가 밖으로 뛰니까, 네가 가게에서 손님 응대도 하고, 전화도 받고.”
20여 년 전 교통사고로 다리가 약간 불편한 아버지는 딸과 일하고 싶어 했다. 연희씨는 7학기 만에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아버지 사무실에 출근했다. 매일 김치를 배달하는 학교 20여 곳. 주문전화 오는 레스토랑, 장례식장, 일반식당 70여 곳. 연희씨 아버지는 물건이 오고 간 것을 장부에 적었다. 영수증을 받았다. 그게 없으면 돈을 못 받았다. 구멍가게 같았다.
연희씨는 영수증을 쓸 줄 몰랐다. 관리할 줄도 몰랐다. 거래명세서, 계산서, 일반영수증이 뭔지도 몰랐다. 어떤 거래처에는 영수증이 가고, 어떤 거래처에는 납품서가 가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아버지는 연희씨에게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그런 거 하나도 몰라?” 화만 냈다. 우주에서 가장 친하던 부녀 관계는 일터에서 틀어졌다.
“아빠! 나는 직장생활도, 사회생활도 한 번도 안 해봤잖아. 아빠는 처음부터 잘 했어? 알려주지도 않고 나한테 왜 이러냐고요?”
“이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뭘 알려줘?”
연희씨는 6개월간 아버지와 싸웠다. 차라리 공장에 가서 일 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아버지와 멀어진 게 억울했다. ‘이까짓 일이 뭐라고,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라는 오기가 생겼다. 영수증 관리하고, 전화 받는 ‘아날로그 경리’에서 벗어날 궁리를 했다. 사무실을 싹 다 뒤집어엎었다. 사장 사무실처럼 반듯한 책상도 사고, 컴퓨터도 들여놨다.
사무실이나 편의점에는 ‘포스’ 기계가 있다. 바코드 찍으면 상품의 가격이 입력된다. 매출도 뽑을 수가 있다. 미수금도 다 보인다. 그런 시스템은 1년 사용료가 백여만 원이나 된다. 연희씨는 다른 프로그램을 찾아냈다. 평생 사용해도 총 비용이 25만 원밖에 안 든단다. 그 프로그램을 내려 받아서 거래처의 사업자 번호와 주소를 입력했다.
“혼자서 전산화 하는 데 6개월 걸렸어요. 잘 나가는 제품, 안 나가는 제품도 한 눈에 다 보여요. 월매출, 1년 매출 통계도 낼 수 있고요. 계산서도 발행할 수 있고, 서류도 뽑을 수가 있어요. 다른 회사는 이런 시스템이 당연한 거거든요. 아빠도 손으로 써서 하던 것을 컴퓨터로 하니까 편해졌죠. 저보고 ‘네가 총사령관이다. 지시를 내려라’고 하시더라고요.”
출근해도, 퇴근해도, 곁에 있는 아버지가 답답하던 시절. 연희씨는 야구에 끌렸다. 인터넷 포털에 “군산에 야구팀 있나요?” 검색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파이렛츠팀. 주말마다 모여서 캐치볼, 펑고, 타격 연습을 했다. 경기가 열리면, 연희씨는 매니저와 응원단장을 겸했다. 2년쯤 지나니까 그녀도 정식 선수로 뛰고 싶었다. ‘여자야구팀 만들까’라고 생각했다.
“작년 9월에 군산시 야구협회 찾아가서 여자야구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저보고 선수를 모아오래요. 많은 분들이 도와줘서 군산시 행정게시판에 올렸어요. 주부, 학생, 취업준비생 등 20여 명이 모였어요. 초보니까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군산상고 거쳐서 성균관대 야구부 주장까지 했던 노원만씨가 코치를 해주세요. (웃음) 제가 감독이고요.”
야구를 하면 스트레스가 풀렸다. 김치 유통 일도 완전히 자리 잡았다 싶었는데 위기가 닥쳤다. 20여 곳의 학교와는 수의계약을 맺고 1년씩 김치를 납품해 왔다. 작년부터 바뀌었다. 한 업체가 독점하지 못하도록 한 달에 한 번씩 공개입찰이 열린다. 적정 수준의 입찰값이 따로 없다. 형성되는 가격의 90% 선에서 컴퓨터가 자동으로 맞춘다. 복불복이었다.
안정적이던 매출은 무너졌다. 한 달에 단 세 곳의 학교에만 김치를 납품한 적도 있었다. 다음 달에는 몇 곳의 학교에 김치를 납품할 수 있나 가늠이 안 됐다. 학생들이 먹기 좋게 숙성시켜 놓는 일도 할 수 없었다. 두 명 있던 배달 직원도 계속 고용할 수가 없게 됐다. 배달, 영업, 가게 청소, 냉장고 정리가 모두 연희씨 몫이 되었다.
대세는 거스를 수 없다. 입찰은 복불복이지만 어느 정도 흐름은 있다. 연희씨가 납품하는 ‘진안 마이산김치’는 모든 재료를 국산으로 쓴다. 값이 비싸다. 그녀는 다양한 국산김치 브랜드를 조사했다. 그래서 ‘한울김치’를 찾아냈다. 공장 견학을 가보고, 소비자의 입맛도 따져서 거래하기로 했다. 아버지한테 독립해서 김치 대리점을 따로 내고 소매점을 열었다.
“학교와 수의 계약할 때랑은 달라요. 공개입찰 하고 매출이 확 줄었어요. 그래서 다른 길을 찾고 있죠. 아침에 우유 배달해서 먹는 것처럼, 혼자 사는 분들한테 소포장 해서 포기김치 1kg, 총각김치 500g, 이런 식으로 배달 해보려고요. 김치 떨어지면 안 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서울이 아니니까, 군산에는 너무 빠를 수 있어요.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어요.
제가 어쨌든 김치 유통을 5년간 했잖아요. 가정집에서도 김치를 사러 와요. 저희 엄마도 김치 안 담그세요. 우리 식구도 여기서 파는 김치 먹거든요. 김치마켓을 하려고요. 카페처럼 커피도 마실 수 있게 꾸미고 싶어요. 제가 커피도 좋아해서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어요. 판로는 다양해요. 본격적으로 영업도 뛰어야죠. 오식도에 작은 회사들이 많이 있잖아요.”
한편, 야구하는 연희씨는 무작정 군산 남중 야구부 이승우 감독을 찾아갔다. “여자야구팀 운동할 장소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이승우 감독은 학생들의 시합이나 훈련이 없는 토요일 오후에 여자야구팀이 연습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지난 겨울 내내 군산 여자야구팀은 군산 남중 하우스(실내연습장)에서 운동했다. 토요일 오후에 3시간씩.
여자야구팀의 평균 나이는 서른 살. 열다섯 살부터 마흔다섯 살까지 있다. 해 지기 전에 집에 가서 애들 밥 차려줘야 하는 ‘언니들’이 많다. 겨울, 짧은 해가 야속했다. 배트 잡고 연습 좀 하면 금방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맞이한 2015년 봄, 군산 여자야구팀 ‘드림걸즈’를 창단했다. 유니폼도 맞춰 입었다.
“창단했으니까 바로 첫 경기를 했죠. 군산시청 기자야구단이랑 했어요. 5회 경기를 했는데 대패했어요. 점수 차이는 기억 안 나요. 이기는 게 이상한 거죠. 남자들이랑 경기하려면, 중학생 선수들하고도 안 돼요. 초등학생 선수들하고 해야 될 거예요. 저희한테 승패는 의미 없어요. 야구경기 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에요.”
투구 속도 시속 80km인 주전투수 연희씨. 선수층이 두꺼워져서 밀려나고 싶단다. 그래서 다시 선수를 모집하고 있다. 내년에는 한국 여자야구협회에 정식으로 ‘드림걸즈’팀을 등록할 거란다. 이기든 지든 여자 경기에서 뛰어볼 거라고. 그런데 의외로 여자야구팀을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단다. 그녀는 그런 반응이 모두 신기하고 고맙다고 했다.
연희씨는 군산에 없던 ‘드림걸즈’를 만들었다. 야구 경기를 보러가는 게 아니라 야구를 하러 다니는 여자들이 생겼다. 연희씨는 군산에서 처음으로 김치카페를 열려고 한다. 상가를 알아보러 다니는 그녀에게 “이런 소도시에서 되겠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연희씨는 일단, 해볼 거라고 했다. 그녀의 도전에 건투를 빈다.
부귀농협 마이산 김치 군산점
군산시 나운동 812-8번지
063-467-9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