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우주'가 도와준 미국 유학파 '떡청년'
지방소도시 청춘남녀 인터뷰㉘ '더 미들래' 스물아홉 살 두병훈
“What’s the purpose of your visit? (방문 목적이 뭐냐?)”
“.... Travel. (여행)”
2003년 3월 미국 LA 공항. 열일곱 살 병훈은 “여행”이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입국에 문제 있는 사람이 가는 곳으로 잡혀갔다. 한국말을 할 줄 알던 한 직원, 병훈에게 비자를 보여 달라고 했다. 병훈은 한국의 미대사관에서 발급 받은 F1비자(학생 비자)를 꺼냈다. 입국심사원에게 내밀며 “공부”라고 했으면 통과됐을 비자, 담당자는 왜 안 보여줬냐고 물었다.
“대사관에서 저보고 미국 공항 도착할 때까지 절대 열지 말라고 했거든요. ‘Do not open’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병훈의 집은 유학원을 통해서 아이를 미국에 보낼 만큼 부자가 아니었다. 다만, 오전 6시 20분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가 종합학원과 피아노학원까지 마치고 오후 10시에 오는 아이가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요”라고 했을 때, 무시하지 않는 부모였다. 병훈의 어머니는 동네의 시골 교회 목사님과 그 지인들을 통해 LA 오렌지카운티의 김영하 목사님을 알았다.
혼자서 LA에 있는 교회를 찾아간 병훈. 교회 청소를 하고, 영어도 배우며 한 달을 기다렸다. 그곳 목사님이 위스콘신 밀워키의 워러타운에 있는 ‘루터 프렙스쿨’을 소개시켜 줬다. 1년 학비 2만 달러. 10대 소년은 그 돈이 얼마만큼 큰 액수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남의 논을 빌려 농사지어서 번 돈의 대부분을 자신한테 보낸다는 것은 알았다.
“9학년으로 들어갔는데 제가 상상했던 자유로운 학교가 아니었어요. 오전 6시 반에 일어나서 7시 20분에 첫 수업을 해요. 오후 10시에 기숙사 불을 무조건 끄고요. 어머니가 ‘농촌을 벗어나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라’면서 저를 공부 시키는 거였어요. 그래서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새벽 3시까지 공부했어요. 날마다 그러니까 수업시간에 코피를 한 바가지씩 흘렸어요. 애들은 제가 어디 아픈 줄 알았대요.”
병훈은 한국에서부터 영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어로 하는 말은 못 알아들었다. 당연히 영어로는 말을 못 했다. 결국, 수업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와 식이 나오는 수학만 눈치껏 알아들었다. 수업이 끝나는 오후 3시 반, 전교생은 각자 예체능 수업을 했다. 병훈은 학교 측에 자신의 사정을 얘기했다. 혼자만 빠져나와서 영어를 공부했다.
학교 다닌 지도 6개월, 병훈의 귀가 트였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1년 지나서는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었다. 3년째 되니까 시사 토론도 가능했다. 병훈을 ‘아시안’이라고, ‘원숭이’라고 기분 나쁘게 놀리는 말도 쏙쏙 귀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병훈은 그 학생에게 주먹을 날렸다. 정학 15일, 병훈은 기숙사 독방에 갇히는 징계를 받았다.
“루터 프렙스쿨은 피아노가 의무였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피아노를 쳐서 다른 친구들보다 잘 쳤죠. 다들 잘한다니까 ‘대학 가서 피아노 할까’ 생각했죠. 부모님은 ‘피아노 칠라고 거기 갔냐’면서 화냈고요. 생각이 많았어요.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농사일 도왔거든요. 마침 농업 부분이 굉장히 발전한 대학을 알았어요. 농업경영, 저한테 딱 맞잖아요.”
병훈이 가려는 대학은 1년 학비 수천만 원. 집과 자동차도 따로 구해야 했다. 어머니가 “대학은 네가 알아서 가”라고 한 말을 새기고 다닌 병훈은 고민이 깊었다. 대학 진학의 첫 발을 어디에 어떻게 디뎌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미국으로 와서 다닌 고등학교 4년, 토익과 토플 점수도 높은 병훈은 짐을 쌌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군대부터 가자는 결정을 했다.
2007년 4월, 스물한 살 청년이 된 병훈은 군산시 옥구읍 수산리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어머니는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떠날 때보다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져 있었다. 돈에 쪼들리는 어머니는 2005년부터 ‘심은콩식품’ 이라는 회사를 차려서 운영하는 중. 상품의 질이 균일하지 않은 완전 재래식 장류 회사는 잘 된다고 할 수 없었다.
“하면 할수록 빚이 늘어나니까 어머니는 두부 장사도 했어요. 농사일 하면서 하니까 잠을 거의 못 주무셨어요. 저도 도왔죠. 오후 9시에 어머니가 콩을 물에 담그세요. 다음 날 오전 2시에 콩을 거르고, 세척하고, 갈죠. 콩국 만들어 끓여서 오전 7시까지 두부를 만들어요. 주문이 많았어요. 근데 배달하는 분이 두 달 치 두부 값을 수금해서 도망가 버렸어요.”
실의에 빠지지 않는 병훈의 어머니는 함초(염전이나 갯벌 주변에서 자라는 염생 식물, 갯벌의 산삼이라고 불림)로 함초환, 함초된장, 함초청국장을 만들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지원해주는 과천 벼룩시장으로 팔러 다녔다. 물건을 가득 실은 1톤짜리 냉동트럭은 병훈이 운전했다. 청년이나 중장년뿐만 아니라 나이 많은 할머니들도 노점을 차려 장사하는 곳.
거기에 온 사람들 누구도 앉지 않았다. 병훈은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음악을 들었다. 어색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농사일 하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았다. 그런데 미국 유학까지 갔다 와서 아줌마 아저씨들 사이에서 된장 파는 건 창피했다. 병훈의 자세는 초지일관, 몇 달 지나자 옆에서 사과 파는 아주머니가 격분해서는 사과를 던졌다.
“야! 네가 유학 갔다 오면 다야? 엄마 아빠 힘들게 일해서 너 공부 시켰는데, 너는 왜 앉아있어? 일주일에 이틀 와서 장사하는데 그걸 못 참아? 유학 갔다 오면 다냐고 이 ××야?”
병훈의 ‘유학 물’은 빠졌다. 이제는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다른 지역으로 장사하러도 다녔다. 한번은 군산 개정에 사는 장병수씨랑 물건을 팔러 갔다가 한농대(한국농수산대학교)를 알게 됐다. 학비 공짜, 먹고 자는 것도 공짜. 작업복과 생활복, 운동화까지 나오는 대학. 졸업하고 영농후계자가 될 수도 있고, 군대 가는 대신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할 수도 있다.
2008년 3월, 병훈은 경기도 화성에 있는 한농대에 입학했다. 쌀농사는 아버지한테 배울 수가 있으니까 꽃과 나무를 공부하는 화훼과로 정했다. 2학년 때는 태안의 천리포 수목원에서 1년 동안 실습했다. 나무도 가꾸고, 옮기고. 뱀도 잡았다. 주말에는 영어학원에서 채점하고 첨삭하는 일도 했다. 돈이 안 됐다. 다시 각종 함초 된장과 쌀을 트럭에 싣고 팔러 다녔다.
2011년, 학교를 졸업한 병훈씨는 영농후계자가 됐다. 영농자금 1억을 대출 받아서 발아현미 설비 창고를 지었다. 마침 그의 어머니도 가래떡을 생산하는 건물을 바로 옆에 지었다. 명절에만 팔리는 가래떡. 빚은 안 줄고, 이자만 나가는 삶은 막막했다.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그래도 병훈씨는 쌀과 보리, 콩 농사를 지었다.
그는 차별화된 제품, 희소성 있는 제품, 모든 세대가 필요한 농산물 상품을 생각했다. ‘구워먹는 떡’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떡에 대해서 알 수 있다면, 어디라도 찾아가고 싶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는 교육도 모두 찾아서 들었다. 더 배우고 싶은데 가르쳐주는 곳이 없었다. 기술과 인맥, 지식이 간절했다. 창조를 못하니까 모방부터 할 수밖에.
“전국의 떡 업체를 찾아가도 안 보여줘요. 그래서 한 업체 사장님한테 사정했죠. 거기 떡을 대신 판매만 한다는 계약을 맺었어요. 저는 소셜커머스 벤딩 업체를 끼고 팔았어요. ‘심은콩식품’이라는 이름을 작게 써서요. 근데 우리 회사, 벤딩 업체, 소셜커머스, 소비자를 거치니까 한 봉지 팔면 20원 남아요. 2년 동안 남는 게 없었어요. 결단을 내렸죠. 다 끊었어요.”
실패는 경험, 실패는 오기. 병훈씨는 구워먹는 떡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중학교 때 친구 한 명, 한농대 실습생 두 명, 일용직 아주머니 세 명과 구워먹는 떡을 만들었다. 성공! 2014년 3월에 한 소셜커머스 업체에 2천만 원 어치를 팔았다. 동시에 망했다. 8cm짜리 떡은 불에 구우면 옆구리가 벌어졌다. 거의 전량 반품, 직원들 월급 줄 돈도 없었다.
그 뒤 두 달간 병훈씨는 직원들과 떡만 만들었다. 떡 안에 치즈를 넣으면 어김없이 갈라졌다. 죄다 버렸다. 원인을 못 찾은 그는 서울에서 40년간 떡 만드는 사람을 찾아가 빌었다. 그 사람은 군산에 직접 와서 문제점을 가르쳐주었다. 문제의 70% 해결! 병훈씨는 또 다른 떡의 장인을 찾아가서 애원했다. 처음에는 병훈씨에게 미쳤다고 하던 그 사람은 말했다.
“젊은 애가 참, 근성이 됐다. 가르쳐줄 테니까 너만 알고 있어!”
병훈씨가 만든 떡은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아버지가 농사지은 그해 나온 쌀에 질 좋은 치즈를 썼다. 판로가 없어서 고민했는데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왔나. 한 소셜커머스 업체에서 직접 계약하자고 연락이 왔다. 2014년 5월에 첫 출시! 한 달 매출 50만 원, 두 달쯤 지나자 어마어마하게 주문이 밀려들었다. 밤을 새워서 떡을 만들어도 주문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잘 된 지 1년 됐어요. 저희가 가진 퍼즐 조각이 다 맞은 셈이에요. 생산, 포장, 배송이 착착 돌아가요. 직원 12명이랑 일해요. 사무실 일을 도맡아 주는 친구도 있고요. 저는 작년부터 농업기술센터에서 ‘귀농 귀촌자 온라인 판매 활성화 교육’ 라는 강의도 해요. 제가 시장 바닥부터 시작했잖아요. 그 분들한테 알려주려고 싶어서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해요.”
‘잘 될 때 취하면 안 된다’는 말, 병훈씨는 알고 있다. 회사 규모를 확장할 생각은 없다. 다만, ‘심은콩식품’이라는 이름은 된장, 청국장 이미지가 강했다. 그는 쌀 미(米)를 넣어 상호를 ‘더 미들래’라고 지었다. 여전히 새벽에는 일어나서 논으로 간다. 말끔한 드레스셔츠를 입고 인터뷰 하러 나왔지만 바로 직전까지 아버지와 둘이서 농약을 줬다고.
농촌에 사는 청년들은 6차 산업(1차 생산, 2차 가공, 3차 서비스와 판매. 1×2×3=6)을 고민한다. 병훈씨도 마찬가지, 지속 가능한 6차 산업을 생각한다. 그는 유럽 농가들이 하는 농가 체험이나 농가 레스토랑, 와인 시음장도 눈여겨보고 있다. “저는 맥주도 해보고 싶어요”라는 병훈씨는 꽁당보리(군산 특산품) 축제 때 직접 만든 맥주로 무료 시음회를 열었다.
<시사인> 404호에는 병훈씨의 꿈과 닮은 유럽의 농촌이 나온다. 독일의 한 20대 여성은 남자 친구와 농사를 짓겠단다. 유럽에는 3대가 함께 사는 농가도 흔하다고 한다. ‘도시로 가지 않아도, 도시 근로자와 비슷한 수준의 소득을 올리는 유럽 농촌’은 우리 농촌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군산에 사는 병훈씨는 농사짓고 떡을 만들면서 그 격차를 줄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