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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최초 야구인, 알고 보니 형제가 독립유공자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5.03.01 18:17:31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군산최초 야구인, 알고 보니 형제가 독립유공자

영명학교 학생들 “졸업은 조국독립 후로 미루자!”  
 

 

 

우리나라 야구는 1904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초대 총무 질레트 선교사가 회원들에게 경기방식을 가르친 것이 효시로 기록된다. 체육의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 당시 사람들은 야구를 ‘서양 공치기’(서양 굿), 혹은 ‘서양식 격구’라 하였다. 솜바지에 망건을 쓴 젊은이들이 캐치볼 하는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조선인들은 ‘서양 굿’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군산에 야구가 처음 소개된 시기는 경술국치(1910) 전후로 추정된다. 야구 종주국인 미국 선교사들이 1894년 호남에서 최초로 선교를 시작한 지역이라는 점과 야구부가 존재했던 영명학교 설립 시기(1902), 졸업생 회고록 등이 추정을 가능케 한다.

 

전라북도 원로 야구인 송창문씨 구술(<전북 체육 1백년사> 上권)에 따르면 야구는 축구와 같은 시기 전북 지방에 들어왔고, 경술국치 이후 일본인들이 군산지방을 중심으로 몰려오면서 야구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여 전주에까지 보급되었다. 1910년 처음으로 야구경기가 열렸으며 당시엔 일인들이 군산에 들어오면서 생겨났다 하여 ‘왜놈 운동’이라 불렀다 한다.

 

양기준 선생 부부(공의 시절)

 

 

필자는 작년 12월 발간한 <군산야구 100년사>(발행처 ICM)에서 군산에서 처음 야구를 시작한 사람은 양기준(1896~1975)씨라고 소개하였다. 양기준은 1902년 전킨(Junkin) 선교사가 지금의 구암동산에 설립한 영명학교에 다니면서 야구를 배웠다.

 

“일찍이 서양선교사들을 사귀게 된 할아버지(양응칠)께서는 자녀들을 신교육 시키기에 앞장서셔서 선교사들이 세운 영명중학교에 아버지(양기준)를 입학시키셨으며, 영명중학교는 선교사들에 의한 교육으로 선진 문물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기 시작하였다. 야구, 밴드, 스케이트 등은 그때 벌써 받아들여 선각자 역할을 하였으며 3·1운동에 앞장섰던 학교가 바로 영명중학교였다.”-양재강 원장 부친 자서전에서

 

서울에서 치과의원을 운영하는 양재강(양기준씨 손자) 원장은 “자서전 형식으로 정리한 부친의 원고를 읽다가 1896년(고종 33) 10월 21일 지금의 군산시 구암동에서 양응칠(구암교회 초대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난 할아버지(양기준)가 영명학교 재학시절 야구를 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구암유치원 설립자이기도 한 양기준은 운동을 잘하였고 음악(가야금, 만돌린, 풍금 등)을 좋아했으며 야구는 항상 선두(1번 타자)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이는 전북의 야구는 1910년 군산에서 시작됐다는 송창문씨 구술을 뒷받침한다.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구암병원(야소병원)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양기준은 1919년 군산 3·5 만세운동에 앞장서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그해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는다. 이후 공소하여 4월 30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상고했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대구 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양기준은 구암병원 근무경력을 바탕으로 1932년 한지의사(限地醫師) 면허를 취득, 무의촌 산간지역 공의(公醫)로 진료 및 전염병 예방에 힘썼다. 그는 주로 함경도 이원, 단천, 평안도 광양만, 맹산, 북청 등 오지에서 인술을 펼쳤다. 해방 후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며 월남, 전북 이리(익산)시 보건소장, 경기도 강화군, 연평도 진료보건소장 등을 지냈다.

 

군산 3·5만세운동과 양기준

 

35만세운동 재현생사

 

 

앞에서 거론한 군산 3·5만세운동은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일어난 기미독립만세운동이다.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김병수(YMCA 회원) 학생에 의해 시작됐다. 그가 민족 33인의 한 분인 이갑성 애국지사로부터 독립선언문 200여 매와 태극기를 전달받아 군산에 내려와 은사와 후배들에게 은밀히 알리고 거사를 협의하였다.

 

영명학교 교사들은 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500매와 태극기를 만들어 ‘설애장터’ 장날(3월 6일) 시위를 하려 했으나 박현세, 이두열 등 주모자 몇 명이 그 전날 새벽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바람에 좌절될 뻔하였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김윤실 교사는 학생들과 긴급회의를 열고 당일 거행을 결의한 후 곧바로 시위에 들어갔다.

만세시위는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 학생들 비롯해 구암병원 직원, 구암교회 신도 등이 주축이 됐다. 천주교, 불교인들과 시민, 보통학교 학생까지 합세했으며 시위대가 평화동과 영동을 거쳐 군산경찰서 앞에 도착했을 때는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군산 인구는 1만 3614명(한국인 6581명, 일본인 6809명, 외국인 214명)으로 ‘일인 도시화’ 되어 있었다.

 

지금의 군산 구암동산에서 발원하여 그해 5월까지 지속해서 일어났던 3·5만세운동은 연인원 3만 여명(총 28회)이 참여하였고, 사망 53명, 실종 72명 등 피해자 195명이 발생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일본 경찰은 다시는 만세운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사람은 방면한 대신 끝까지 조선 독립을 부르짖는 사람은 감옥에 보내 징역을 살게 하였다. 양기준 역시 끝까지 굴복하지 않아 징역을 산 케이스로 그가 대구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할 때 그의 부친(양응칠)이 머나먼 대구까지 면회하여 차입금을 수도 없이 넣어주었으나 출소 며칠 전 눈깔사탕 한 개 입에다 넣은 게 전부였다고 한다. 

 

양기준·양기철 형제 자랑스럽게 느껴져

 

놀라운 사실은 양기준 동생(양기철)도 3·5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해 영명학교 졸업시험을 준비하고 있던 양기철(梁基哲) 학생은 급우들과 ‘졸업은 조국독립 후로 미루자!’고 결의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형과 함께 대구 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당시 양기준(24세)·양기철(21세) 형제는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었다.
 
필자는 책을 발간한 후에도 계속 추적한 끝에 양기준·양기철이 친형제라는 것과 그들의 대구 복심법원 판결문(국가기록원), 재미 한인단체가 발행하는 1919년 7월 12일 자 <신한민보>(양응칠, 양기철 부자 이름 등장) 기사, 양기준 선생의 한지의사 면허 교부서(조선총독부) 등을 찾아내 양재강 원장에게 전하였고, 감사 인사도 받았다. 
 
“우리 세대는 ‘군산’ 하면 ‘야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런 군산의 야구역사를 담은 책에 할아버지(양기준) 존함 한 줄 올려주신 것도 영광이고 감사드릴 일인데, 할아버지께서 군산 지역 3·1운동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셨던 내용까지 확인을 해주셨습니다. 그간 할아버지 옥고 사실은 얼핏 들은 바 있으나 그 내용을 모르고 있던 차인데 국가기록원으로부터 대구형무소 복역 사실과 선고문(대구 복심법원 판결문)까지 확인 및 입증되어 독립유공 서훈을 받게 될 듯합니다. (아래 줄임)”

 

 

군산의 야구관련 자료를 검색하다가 잊혀가던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을 찾아낸 것은 큰 행운이자 보람이었다. 작년 7월부터 구암동산 성역화 사업(공원, 3·1기념탑, 기념관 조성)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제96주년 3·1절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양기준·양기철 형제가 더욱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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