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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께끼~ 어르음~ 과자, 얼음요~ 얼음과자"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4.08.01 15:48:18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군산당, 군옥당, 시민당, 대성당, 대화당, 복음당, 역전당, 진미당, 황금당, 금주당, 이성당, 풍미당, 남풍당, 조화당···. 군소정당 이름이냐고? 천만에. 달달하고 시원한 ‘얼음과자’로 우리들 입을 즐겁게 해주었던 추억의 ‘아이스께끼집’ 간판들이다. 한때 명성을 날리던 업소들로 불볕더위가 내리쬐는 군산의 50~70년대 거리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오락가락하는 일기예보에 무더위까지 끼어들어 엄청 짜증나게 한다. 벌써 8월. 가을의 문턱이라는 입추(立秋)가 저쪽에서 손짓한다. 더위도 막바지에 이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샤워를 하면 시원한 느낌도 예전과 다르다. 24절기를 얘기할 때마다 우주의 신비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자연의 조화에도 경이로움과 감사하는 마음을 함께 한다. 

그동안 시원하게 느껴지던 매미들의 합창이 어제는 짜증스럽게 들리고 부채를 끼고 지냈다. 우리 집은 군산시 나포면이다. 마을 뒤쪽은 망해산 줄기이고, 앞으로는 금강호와 십자들녘이 펼쳐진다. 다른 지역에 비해 시원하다고 하는데도 위대한 자연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기상예보는 당분간 찜통더위가 이어지다 비가 내릴 것이라고 한다. 시원한 소나기는 언제 쏟아질지... 오늘도 얼음물과 물수건으로 무더위와 싸워야 할 모양이다. 선풍기가 무시당할 정도로 무덥고, 배가 출출해지니 시원한 콩국물과 코흘리개시절 즐겨 먹던 ‘아이스께끼’가 생각난다. 마땅한 주전부리가 없던 그때 ‘아이스께끼’는 허기를 달래주기도 했다. 

 

무더위에는 예나지금이나 얼음과 ‘아이스께끼’만한 게 없는 것 같다. 요즘은 에어컨에 다양한 빙과류 광고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고, 사람들은 사먹는 것으로 시원함을 느낀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아이스께끼’는 그와 다른 면이 많다.  

 

영어 발음조차 배고프던 시절. 고무신에 삼배바지 차림의 행상들이 신작로에서 외치는 ‘아이스께끼 얼음과자!’ 소리는 듣기만 해도 시원했고 반가웠다. 재수가 좋으면 한 개쯤 얻어먹을 있다는 희망 때문에 더욱 반갑게 들렸는지 모른다.  

 

옛날의 ‘아이스께끼’ 행상은 대부분 가난한 가정의 10대 청소년들이었지만, 간혹 어른들도 있었다. 중학교 진학률이 높아지던 60년대 후반부터는 아주머니 행상도 등장했다. 사 먹는 것도 처음에는 현금이어야 했는데, 엿장수가 사라지면서 빈병이나 고무신과 바꿔먹기도 했다. 

 

“아이스 께끼~ 어르음~과자, 얼음요~ 어름과자!”

고향동네 ‘아이스께끼’ 행상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외치는 소리에는 전통 가락이 묻어났다. 멋과 풍류를 아는 한량들은 구성지게 넘기는 행상들을 향해 ‘거리의 가수’, ‘거리의 명창’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아이스께끼’는 목에 힘을 줘 큰소리로 시작하고, ‘어르음’은 길게 발음하면서 첫마디가 끝나는 ‘과자’는 숨을 고르듯 내리고, 짧게 발음했다. 그리고 ‘얼음요~ 어름과자’는 나비가 언덕을 넘어가듯 고저를 넣어 발음했다. 특히 날마다 우리 동네 골목을 찾아왔던 아저씨의 외침은 남달랐다.  

 

“아이스 께끼~ 어르음~과자, 얼음요~ 얼음과자, 자~아~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몰로는 황금당 앙꼬 아이스께끼가 왔어요. 1원에 두 개, 맛 없으믄 돈 안 받어!”

 

그들은 그야말로 명가수요 명창이었다. 그늘의 시원한 평상에서 듣는 ‘아이스께끼’ 장수 아저씨의 외침은 해학과 풍자가 묻어났고, 트로트 가수 노래를 듣는 것만큼이나 재미도 있었다. 지금도 혼자 있을 때 주절거려보면 당시 골목의 정경이 떠오르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대낮부터 막걸리를 한 잔 걸쳤는지 고저를 맞춰가며 신작로를 활보하는 아저씨가 있는가 하면, “맛이 끝내주는 얼음과자를 왜들 안 사 먹는다냐!”라며 투정하는 익살꾼 아저씨도 있었다.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졸라 한 개씩 입에 물고 달콤하고 시원한 맛에 빠져들곤 했던 아이스깨끼. 그 시절에는 여름철 간식으로 인기 짱이었다.  

 

남녀노소가 즐기던 여름철 기호식품인 ‘아이스께끼’는 단물을 기계에 얼려 만들었는데 시원하고 달콤했다. 세균이 득실거리는 어름 빙수도 우리를 유혹했다. 유명했던 군산당이나 조화당의 팥빙수는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 노랗고 빨간 색소를 타주는 길가의 빙수도 일원에 두 개인 ‘아이스께끼’에 비해 부담이 갔을 정도였으니... 

 

부자 됐다고 소문났던 ‘께끼’ 장수 아저씨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아이스께끼’를 만들어 파는 가게가 많았는데,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전국 일일생활권이 좋은 점도 많지만, 지방 중소기업들의 경쟁력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농·어민들의 수도권 집중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파월장병들이 귀국하기 시작하던 70년대 초 어느 해 여름, 동네 아저씨들이 모이면 화제가 됐던 이야기 한 토막이다. 

 

동네 아저씨들 입에 오르내렸던 얼음과자 장수는 스티로폼 사각 나무통에 ‘아이스케키’를 가득 담아 자전거에 싣고 근교 농촌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농촌은 잘 사는 사람들도 현금이 없으니 보리나 쌀을 퍼주고 사 먹었는데, 수입이 쏠쏠하다는 얘기를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다. 

“쌀 뒤주만한 께끼통을 자전거 뒤여다 실코 댕김서도 실실 웃든 그 ‘께끼’장사 말여, 돈 많이 벌어가꼬 지금은 부자가 되얏다고 허든디, 소문인지 참말인지 몰로것고만···. 들리는 말로는 효자라고 허드라고···”

 

철길 건너 시장에서 고물상을 하는 영철이 아버지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듣고 있던 영태 외삼촌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든다. 

 

“그려유~ 신흥동 말랭이에 산다는 그 사람 참말로 징그런 사람유, 비 오는 날인디도 ‘께끼’통을 메고 댕기는 걸 봤응게유···. 비가 오니께 자전거를 애꼈든 모양여유···”

 

골목 입구에서 시계방을 운영하는 영태 외삼촌은 소나기가 내리는 날 몇 번 봤던 모양이었다. 동네 아저씨들 말대로, 신흥동 말랭이에 산다는 그 아저씨가 정말 부자가 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뜬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80년대 초 어느 주말 은파유원지로 출사를 나갔다가 가족과 오붓하게 야유회를 즐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서다. 

 

더위도 막바지에 이른 여름밤. 지금은 팔순 할아버지가 됐을 ‘아이스께끼’ 장수 아저씨의 외침이 밤하늘을 타고 들려오는 듯하다. 

 

“아이스 께끼~ 어르음~과자,얼음요~ 얼음과자.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몰로는 황금당 앙꼬 아이스께끼가 1원에 두 개, 맛 없으믄 돈 안 받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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