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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속에 핀 얼음새꽃을 만나다' 김명선 씨
글 : 이소암 /
2024.04.03 16:01:0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세간에 출신 신분을 말할 때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말을 많이 한다. 태어날 때의 환경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타고난 환경이 좋았다 해도, 혹은 나빴다 해도 그 환경이 전적으로 인생을 지배한다고는 할 수 없다.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는 까닭이다. 물론 일반적인 성공의 기준은 각각 다르다고 본다. 누군가는 고위공무원이거나 대기업의 오너이거나 부를 축적하여 부족함 없이 사는 것이거나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서 낮은 자리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것 등등이 성공의 기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이나 소개하고자 하는 김명선 씨의 경우도 후자가 아닐까 싶다.

 

가난에 쫓겨 초등학교를 중퇴하다

 

그녀는 전북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 상아부락, 논도 밭도 없는 가난한 집에서 2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정신이상으로 겨울이면 방안에 누워 있다가 날이 따뜻해지면 밖으로 나가 며칠 만에 들어오는 때가 허다했다. 어머니 혼자 생계를 이어오다 보니 그녀는 열한 살의 나이로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6학년 여름방학, 오빠가 군산을 갔다 오더니 자신이 취직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는 땅덩어리가 없으니 까딱하면 너도 누나처럼 남의 집으로 갈 수가 있으니 군산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싫다고 했어요. 하지만 고생만 하는 어머니를 생각해서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방학숙제를 해서 싸놓았던 보자기를 들고 어머니랑 같이 군산으로 오게 됐지요.”

하지만 그녀 오빠의 직장생활은 2년으로 끝났다. 보다 못해 그녀는 백화양조에 들어갔다. 그 무렵 고향에 남아있던 식구들까지 군산으로 이사를 와서 친척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가난이 몰고오는 비극이라는 태풍

 

그러던 어느 날 동생 명희가 가난한 생활을 비관해 유서를 남긴 채 농약을 먹고 자살을 했다.

나는 가장이었지요. 가족을 위해서 12년을 넘게 백화양조에서 일을 했어요. 하지만 그 당시엔 가정형편이 어려워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공장엘 다녔는데, 냉대와 무시, 차별대우는 뼛속 깊이 상처로만 남았어요. 그때 이를 악물었죠. 결혼하여 자식을 낳으면 실업계 고등학교까지는 죽을힘을 다해서라도 가르쳐야겠다고요.”

퇴사한 그녀는 퇴직금으로 어머니의 빚을 갚았으나 부족해서 익산에 있는 동양물산에 들어가려고 이력서를 써놓았다. 그런데 그녀 어머니가 혈압으로 쓰러져서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는데 운명은 태풍을 몰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 뜻하지 않은 중매로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선을 보던 날 남편은 그녀의 발등에 불을 끌 수 있는 선비처럼 보여서 결정을 했고 곧 첫 아이가 생겼다.

시댁에는 방이 두 칸 있었어요. 그런데 천장이 얼마나 낮은지 사다리가 없어도 지붕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였고요. 부엌은 몇십 년을 아궁이 속에 불을 피워서 새까맣게 그을렸고, 부엌 구석에 놓여 있는 찬장도 새까맸어요. 뿐만 아니라 하수도조차 없어서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면 끈이 달린 고무통에 받아서 약 10여 미터 떨어진 남의 밭에 버려야 했어요. 알고 보니 남편은 직장도 없고, 술과 음악만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도 그런 남편과의 사이에 21남을 얻었다.

그러나 알콜 중독 남편은 정신을 못 차리고, 여전히 술을 먹고 가족들을 괴롭혔다.

 

활화산같이 솟는 교육 열정의 힘

 

그녀 남편은 자신이 능력이 없어서인지 아이들을 향해 대학을 나와도 취직을 할 수가 없다고 설득 아닌 설득을 했다. 두 딸은 울고만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너무나 화가 나서

나는 우리 애들이 나처럼 공장에서 설움을 당하게 하지 않으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실업계 고등학교 라도 보낼 테니까 잠이나 자라.”고 소리를 쳤다. 때로는 내일이면 애들이 시험을 보는 날인데 남편이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와서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을 했던 때, 그녀는 동네 아주머니를 따라서 해망동에 있는 새우공장으로 일을 하러 다녔다.

새우 일은 항상 있는 게 아니었어요. 애들도 어느 정도 컸기 때문에 건어물 가게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큰딸이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게 되자 영세민이 끊기더라고요. 형편으로 보아 둘째도 실업계를 갔으면 했는데 대학을 가겠다고 하면서 군여고를 지망했어요. 고민 끝에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 담임 선생님께 편지를 썼어요. 집안 사정을 세세히 쓰고 아들의 회비를 면제해 주셨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어요. 그 이튿날 밤 아들 담임 선생님께서 회비를 면제해 주겠다며, 둘째 담임 선생님께도 편지를 보내라고 용기를 주셨어요. 결과는 좋았어요. 회비 걱정 덜고 공부를 시킬 수 있었으니까요.”

“3년 후 둘째는 군여고를 졸업하고 군산대학교에 들어갔어요. 아들은 몸이 아파서인지 공부를 하지 않아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이때도 아들 담임 선생님께 편지를 써서 회비를 면제받아 무사히 졸업했죠. 지금은 모두 사회생활 잘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훌륭한 선생님들 덕분이지요.”

 

단단한 고통의 고리를 끊다

 

건어물 가게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까 큰애가 아버지가 사고가 나서 의료원으로 실려갔다고 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더니 오른쪽 골반이 부서져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남편은 의료원에서 수술 세 번을 했고, 신경이 살아나지 않아서 서울에 있는 마이크로 병원에서 수술을 또 한 번 했다. 그 보상금으로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에서 금동으로 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남편은 사고로 여전히 다리가 불편해요. 하지만 이제 술을 마시지 않으니 가정의 평화가 찾아왔어요. 지난날의 원망보다는 안쓰러움이 큽니다. 아이들도 성인이 되어 제 갈길 잘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배려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 덕분이지요. 앞으로 제가 할 일이 있다면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그때 그 선생님들처럼 돕고 싶습니다.”

자신의 인생 성공에 부합한 듯 환하게 웃는 그녀 모습, 마치 얼음 속에 핀 얼음새꽃 같아 보이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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