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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이래유~" 했더니 혼내셨던 아버지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4.05.01 17:16:22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5월 5일은 제92회 어린이날이다. 이날은 선생님의 풍금 소리에 맞춰 목이 터져라,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고,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날을 만든 취지에 대해 설명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오늘은 어린이들이 사랑받어야 허는 어린이날이래유~”라고 했다가 선물은커녕 혼만 났던 날이기도 하다. 

 

나는 아버지가 쉰한 살 되던 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손자를 봐야 할 나이에 아들을 보셨다. 나를 낳고 얼마나 좋았는지, 전쟁으로 혼란했던 때인데도 동네 사람들을 불러 막걸리 잔치를 벌이고 외가가 있는 계화도로 피난을 갔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같은 반 아이들 부모가 젊은 것을 보며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좋아 보였고, 어른이 돼서도 아버지와 정담을 나누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 지금도 집안일을 아버지와 상의하는 사람들이 부자보다 더 행복해 보인다. 

 

얄궂게도 나는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해본 적이 없다. 명절 때 목욕탕도 함께 못 가봤으니까. 보수적이고 엄하게 자라서인지 떠올리기 싫은 추억들이 많다. 하지만, 생활에 양분이 되는 추억들은 잘 간직하고 싶다. 무섭기만 했던 이미지가 세월이 가면서 조금씩 바뀌는 것을 실감한다. 그래서 부모인 모양이다. 무섭기는 했어도 점잖았고 외모에서 풍겼던 멋은 잊지 못한다. 성품과 신념이 남다르셨고, 당시만 해도 한복에 갓을 쓴 노인들이 많았는데, 아버지는 양복정장 아니면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거기에 지팡이와 중절모는 빠질 수 없는 소품이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스포츠 머리를 고집하셨고, 평생 콧수염을 기르신 것을 보면 고집도 대단했던 것 같다. 미신을 멀리 했고, 그렇다고 특정 종교를 가까이 하거나 배타하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을 믿고 절제하며, 내가 편하고자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라는 게 아버지의 생활 철학이었다.  

 

평생 고향을 그리며 이산가족으로 살아

아버지는 삼대독자로 1900년 10월 13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청년기는 만주에서 보내고 귀국해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여 아들 셋, 딸 넷을 보셨다. 지금 살아계시면 우리 나이로 115세가 됐겠다. 고모 한 분이 황해도 해주에서 사셨는데 해방 이후 한두 번 다녀가시고 소식이 끊겨, 지금까지 상봉을 못하고 있으니 이산가족인 셈이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하나밖에 없는 누이와도 헤어져 평생을 객지에서 살아온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웠겠는지 짐작이 간다. 

 

흑백사진을 통해 본 하얀 한복차림의 고모는 전통 조선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미인이었다. 제삿날이나 명절 등 가족들이 모이는 날이면 고모 얘기가 빠지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느덜 고모도 지금쯤은 돌아가셨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말끝이 흐렸고 혀를 끌끌 차며 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고향을 일찍 떠나게 된 동기와 만주의 봉천, 대련 등지에서 살며 겪은 경험담, 김구 선생과 이승만, 김일성에 대한 평가, 그리고 연백평야와 구월산, 장산곶 등 황해도의 뛰어난 명소를 설명하며 군산에 정착하게 된 사연도 말씀해주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무섭고 엄했지만, 한편 자랑스럽기도

나는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어본 적이 없다.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당연히 회초리를 맞는 것으로 알고, 우물에서 세수하고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러나 이게 아니다 싶으면 하나하나 따지고 드는 바람에 매를 더 맞기도 했다. 잘못했다고 빌면 회초리는 피할 수 있었지만, 고집과 자존심 때문에 용서를 빌지 못했다. 용서해달라고 비는 것보다, 매를 맞는 게 마음이 편했다. 어쩌다 추억 여행에 빠질 때면 철없던 그때를 떠올리며 작은 행복을 맛보기도 한다.  

 

아버지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존경하는 마음도 커져갔다. 아무리 화나도 어머니에게 욕이나 반말을 하지 않았고, 부부 싸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웃들과도 다투는 일이 없었고,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서당교육만 받았는데도 동네 아저씨와 친구 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신문이 배달되지 않는 날은 지국으로 심부름을 보낼 정도로 시사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 어머니가 내주는 고구마와 식혜를 마시며 동네 아저씨들과 난상토론을 벌이던 안방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특히 선거철이면 방안에 손님이 가득했다. 1963년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득표방송을 청취했는데. 흐린 백열등 밑에서 30분, 아니면 1시간 간격으로 전해주는 후보들의 득표실황을 노트에 적어 합산해서 알려 드렸던 그날 밤이 새롭다.     

 

아버지 눈치를 보며 반찬을 가려먹던 일도 빠질 수 없다. 아버지가 좋아할 것 같은 반찬에는 젓가락이 가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흔했던 ‘가지나물’도 나에게는 젓가락 접근금지 반찬이었다. 옆에서 “느들도 커서 장가가믄 각씨한티 혀달라고 혀서 실컷 먹어라”라고 하던 어머니가 얼마나 밉던지….

 

손님에게 대접하는 과일이나 과자 그릇이 나오면 조용히 밖으로 나와야 했다. 손님을 따라온, 방에 있는 아이를 부러워하며 ‘나는, 정말 다리 밑에서 주워왔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슬픔이 밀려오기도 했다. 지금도 형님과 술자리가 벌어지면 당시 얘기들이 안주가 되곤 한다. 아버지는 술을 못하셨다. 그래도 손님과 식사를 할 때는 꼭 반주를 권했다. 그렇게 남을 배려하며 사셨는데, 늦둥이인 나에게는 어찌 그리도 엄하고 냉정했는지···. ‘내가 아버지 마음을 잘 못 읽는 것은 아닌가?’ 자문해보기도 한다.   

 

그래도 “내가 편하고자,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삼가야 한다”라는 말씀은 지금도 물질적인 재산 이상으로 생각하며 생활의 지표로 삼고,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한다. 어린이날을 맞아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준 아버지를 그리며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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