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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밖에 모르고 살아왔지만, 너무 멋진 인생이었다!”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4.02.01 16:19:1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야구부(감독 석수철)가 오랜만에 군산 시민의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1999년 황금사자기 우승 이후 10년이 넘도록 무관에 그치다가 제41회 봉황기와 제94회 전국체전 우승으로 2013년 시즌 2관왕을 차지한 것. 군산시와 시민은 선수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시청에서 군산상고까지 카퍼레이드도 벌였다. 오늘은 석수철 감독보다 더 많은 축하를 받은 나창기(63) 호원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만났다. -기자 말-

 

 

 

“저는 대학팀(호원대) 감독이니 객이나 다름없죠. 그럼에도 10년 넘게 군산상고 감독을 했고, 석수철 감독과 오장용 코치는 아끼는 제자죠. 그리고 봉황기는 특별히 애착이 갑니다. 제가 감독할 때 우승(1996)했고, 오 코치는 당시 포수였으며, 석수철이 감독으로 부임해서 정상을 차지했으니 의미가 깊죠. 제가 군산상고 3학년이던 1971년 봉황기 대회 때는 우승팀인 경북고와 14회 연장 끝에 1대 0으로 분패했거든요. 그런저런 사연으로 주위 분들이 축하전화를 많이 해준 것 같습니다.” 

 

그랬다. 1971년 군산상고는 팀 창설 3년 차 신출내기였다. 그럼에도 각종 전국 규모대회에 전북 대표로 출전, 강호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면서 고교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군산상고에서 3할을 웃도는 타자는 나창기, 하태문, 최병태, 김봉연 등으로 고교야구 최강으로 군림하는 데 손색이 없었다. 팀컬러가 보여주듯 그해 5월에는 대통령배 대회에서 처음으로 4강 대열에 들었고, 가을에는 전국체전 우승으로 호남의 기수로 떠오른다.

 

군산상고 선수시절 별명은 ‘다람쥐’

나창기 감독(군산상고 야구부 2기)은 지난 2011년 7월 22일 군산상고와 경남고 출신 레전드급 선수들이 대거 출연,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맞대결을 펼쳤던 ‘2011 레전드 리매치’에서 군산상고팀 감독을 맡을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역전의 명수들 중 맏형. 어려서부터 운동에 남다른 소질을 보이던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와 인연을 맺는다. 

 

“전주 중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죠. 야구 글러브가 필요한데 집이 가난해서 구입할 수는 없고···. 그때 급우들이 코치에게 추천해서 선수가 됐어요. 포지션은 투수. 당시에는 작은 키가 아니었거든요. (웃음) 당시 담임선생님 전언에 의하면 졸업 때까지 90전 83승으로 성적이 좋았답니다. 그리고 전주남중 졸업을 앞둔 1968년 군산상고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이듬해(1969) 진학하게 되었죠. 

 

군산상고 시절에도 고생을 많이 했어요. 선수들 기숙사(합숙소) 지을 때 현장 일꾼으로 참여했고, 연탄재로 운동장을 고르는 일도 우리 몫이었거든요. 그래도 재학생, 선수들, 선생님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보람을 느꼈죠. 기숙사에 식량이 떨어지면 구루마(손수레)를 끌고 흥남동 부근에 있던 (주)경성고무 직영 방앗간으로 가서 쌀을 몇 가마씩 학교로 실어 날랐는데, 그때 땀 흘리던 일들이 지금은 추억의 사진첩이 되어 아련히 떠오릅니다···.”

  

나창기는 2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평생의 스승’을 만난다. 야구천재 소리를 듣던 국가대표 투수 출신 최관수 감독(98년 작고)이었다. 1968년 군산상고 야구부를 창단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던 이용일 당시 경성고무(주) 사장 초빙으로 1970년 7월 부임한 최 감독은 나 선수에게 ‘너는 발이 빠르고 감각이 뛰어나니 이루수를 하라’며 ‘다람쥐’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당시 나 선수 신장은 165cm.

 

한 게임에서 도루를 4개나 성공할 정도로 찬스에 강했던 나 선수는 1971년 제5회 대통령배 쟁탈 전국 고교야구대회에서 찬스메이커로 활약, 준준결승에서 강호 중앙고를 6대0으로 누르고 호남 야구를 23년 만에 4강에 올려놓은 주역이 되면서 미기상을 수상한다. 이는 전국규모 대회에 출전한 호남출신 선수가 받은 최초 개인상이기도 하다. 

 

“최관수 감독은 야구 감독이기 전에 진정한 지도자”

최관수 감독은 솔선수범하는 지도자였다. 언제나 선수들보다 먼저 운동장에 나왔고, 마음으로 가르쳤다. 야구 이론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임에도 그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새로운 기술과 전술을 습득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한 베이스를 더 가는 야구를 정착시킨 것도 그였다. 나창기 감독은 그를 ‘야구감독이기 전에 진정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하며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최 감독님은 선수들에게 욕설은 물론 거친 말을 한 번도 내뱉지 않은 ‘덕장’이셨죠. 최고로 화났을 때 ‘이 녀석이···’ 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요. 선수 개인별 성향을 파악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도 뛰어난 분이었죠. 저도 그분 권유로 투수에서 이루수로 전환했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 선택이었는지 모릅니다. 고집을 부리고 계속 투수를 했으면 선수생명이 짧았을 것은 물론, 지도자도 되지 못 했을 겁니다. (웃음)

     

제가 2학년(1970) 추석명절 때였어요. 집에 못 간 선수 몇몇이 막걸리를 마시고 시내에서 소동을 벌였죠. 사태가 심각해지자 최 감독님이 ‘내가 책임지겠다’며 선수들을 교실에 모아놓고 야구 배트를 넘겨주며 엎드리는 거예요. 놀란 토끼가 된 우리는 바라만 봤고, 감독님이 ‘나를 때리지 않으려면 모두 유니폼을 벗어라, 나도 학교를 떠나겠다!’고 하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 같은 감독님'을 때렸죠. 그때 송경섭 부장님이 달려와 멈출 수 있었고, 교실은 울음바다가 됐죠. 영화에도 소개됐던 그 얘기는 지금도 동문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습니다.”

 

최 감독이 얼마나 훌륭한 스승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그 사건은 선수들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했다. 특유의 카리스마와 경험으로 다져진 최 감독의 지도력은 그해(1971) 가을 전국체전을 시작으로 1972년 황금사자기, 1976년 대통령배 등을 제패하며 호남야구의 중흥을 예고한다. 특히 부산고와의 결승 9회 말에서 대역전극을 펼쳤던 황금사자기 우승(1972)은 ‘역전의 명수’를 탄생시켰고,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한국 고교야구 역사에 전설처럼 기록되고 있다.

 


 

자신의 모교, 군산상고 감독으로 부임하다

‘다람쥐’라는 별명으로 1971년 전국체전에서 찬스에 강한 이루수로 명성을 떨치며 모교에 우승의 영광을 안겨주었던 나창기 선수는 이듬해 군산상고를 졸업하고 제일은행 야구단에 들어간다. 김우열, 이종도, 김차열, 차동열, 권두조, 김종모 등 쟁쟁한 멤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1981년 제일은행을 정상으로 올려놓았던 나창기는 그해 도루왕을 차지하면서 선수로서 정점을 찍는다. 그는 프로팀의 입단 제의도 거절한다.   

 

“프로야구 출범을 1년여 앞둔 1981년 당시 저는 제일은행 소속으로 직책은 대리였습니다. 그해 실업연맹전에서 제일은행이 우승하였고, 저는 우승의 주역으로 도루왕 상(賞)도 받으면서 잘 나갔죠. 그때 프로야구 입단 제의 소식이 들리는데, B급으로 대우해준다고 해서 구경만 했죠. 장래를 보장할 수 없는 프로팀에 가겠다고 안정된 직장을 버릴 수가 없잖아요. 상고 졸업생 전체에서 5~10% 이내에 들어야 은행에 들어갈 수 있던 시절이었거든요.” 

  

나창기 선수는 1989년 현역에서 은퇴하고 연희동 지점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그때 마침 군산상고 야구부가 위기에 처한다. 선수와 학부모가 감독 선임을 두고 옥신각신했고, 급기야는 야구부 해체위기까지 몰린다. 이때 ‘군산상고 야구를 부활시킬 사람은 나창기 뿐’이라는 이용일 KBO 전 총재권한 대행의 강력한 추천을 외면할 수 없어 모교 지휘봉을 잡는다.

 

“이용일 총재님은 한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이죠. 군산상고 선수들에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고요. 해외출장 때도 꼭 야구부를 돌아보고 출발하셨고, 귀국해서도 군산에 도착하면 운동장에 오셔서 상황 파악과 선수들 격려를 해주고 회사로 가실 정도로 애착이 강하셨죠. 제가 군산상고 감독을 할 때도 그분이 경기장에 모습만 드러내는 것으로 선수들에게 의지가 되었습니다. 그분이야 구경하러 오셨겠지만, 우리에게는 바람막이가 됐던 것이죠.”  

 

 


 

96년 봉황기 대회 우승 원동력은 최 감독의 ‘조언’

나창기 감독은 부임하던 해(1991) 가을 전국체전 3위를 시작으로 1992년 화랑기 대회와 1993년 청룡기대회, 1993년 전국체전에서 준우승을 차지, 옛 명성을 되찾기 시작하더니, 1996년 봉황기 대회 우승기를 거머쥐며 10년 만에 모교에 영광을 안겼다. 이어 1998년 전국체전과 1999년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제가 제일은행 소속일 때 최관수 감독님이 파킨슨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김봉연, 김준환, 김성한 등 군산상고 출신 후배들과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1년에 몇 차례씩 찾아다녔는데요. 모교 감독으로 부임해서도 최 감독님을 자주 뵈었습니다. 거동이 불편함에도 운동장에 자주 나오셨거든요. 하루는 운동장 바닥에 ‘찬스 때 대타 활용을 잘하라!’라고 쓰시는데 눈물이 나오면서 힘이 솟더군요. 결국 1996년 봉황기 대회 우승의 원동력이 됐죠.” 

 

1996년 9월 추석 명절을 앞둔 어느 날. 제26회 봉황대기 대회(1996) 우승기를 거머쥔 군산상고 선수들과 나창기 감독이 투병 중이던 최관수 감독 집을 찾아가 인사드리는 장면이 포함된 1시간짜리 TV 프로그램이 방영되어 군산 시민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군산상고 황금사자기 ‘포옹’, 군산상 우승 포효 “13년만이야”, 群山상고 황금사자기 입맞춤, 군산 온통 축제 도가니, 群山상고 釜山상고에 융단폭격···11-3 우승, 역시 군산상고··· ‘야구 명가’ 우뚝, 13년만에 정상 탈환 ‘감격’, 황금사자는 군산商을 택했다, 이상은 1999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군산상고 우승을 알리는 중앙지와 지방지 신문 기사 제목들이다.   

 

LG트윈스의 이진영을 비롯해 이대수(한화), 정대현(롯데), 이승호(SK), 문규현(롯데), 김상현(SK), 신경현(전 한화) 등을 길러낸 나 감독은 2002년 김용남 후배에게 자리를 내주고 2003년 창단한 호원대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해 오늘에 이른다. 그의 현재 직책은 호원대 야구부 감독겸 스포츠 레저학부 전임교수. 그는 “야구밖에 모르고 살아왔지만, 너무도 멋진 인생이었다!”며 자신의 야구 철학을 소개했다.    

 

“야구는 9회를 치르는 동안 한두 번, 두세 번은 반드시 기회가 옵니다. 그 기회를 잘 이용하면 승리하죠. 우리네 인생도 짧든 길든 위기가 따르기 마련인데요.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슬기롭게 넘기면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준비하고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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