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gun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홈 > ARTICLE > 사회
감동적인 휴먼스토리, ‘쌍천 이영춘 박사’의 형제애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3.11.01 17:23:0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올해는 세브란스 의전(연세대 의대)을 졸업하고 ‘농촌은 민족의 원천이다’는 신념으로 일생을 농어촌 진료봉사에 헌신한 쌍천(雙泉) 이영춘(李永春:1903~1980) 박사 탄생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하여 지금도 쌍천의 정신과 체취가 느껴지는 군산시 개정동 쌍천로에 있는 ‘개정인 의 집’을 찾았다.

 

동행해 준 이주민(71) 원장은 쌍천의 조카. 이 원장은 시그레이브 병원 치과과장을 지냈고, 지금은 치과의원 원장이자 쌍천이 설립(1951)한 재단법인 농촌위생원 이사장으로 숙부(쌍천)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1970년 8월 시그레이브 병원 개원과 함께 쌍천이 경영에서 물러나 서예와 바둑으로 소일하다 1980년 11월 25일 자택에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산증인이기도 하다. 

 

“이 집은 일생을 교직에 계시다가 1960년대 초 정년퇴임하신 아버님(이영기)이 100년도 더 된 초가(草家)를 사들여 손수 지붕을 올리고, 창문도 고치고, 내부도 이렇게 저렇게 수리해서 사시던 곳입니다. 지금도 정원에는 부모님이 가꾸던 감나무가 울창하고, 뒤뜰에 밤나무가 자라고 있어 가을을 실감 나게 합니다. 숙부(이영춘 박사)님이 살아계실 때는 종종 오셔서 아버님과 바둑을 두면서 형제애를 나누고 애환을 달래던 장소이기도 하죠.”    

 

금방이라도 처녀귀신이 치마를 뒤집어쓰고 튀어나올 것처럼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도는 빈집. 그야말로 숲속의 ‘귀곡산장’을 떠오르게 한다. 그럼에도 이 원장은 자신의 ‘호화별장’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에도 내부를 항상 사용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20명 정도의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홀(HALL)로 개조하는 등 안방과 내실을 보존해오고 있다”고 덧붙인다.

 

내실에 들어서니 사람을 살리는 어진 기술, 즉 의술(인술)은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인술무사(仁術無邪)가 희미한 불빛 아래 졸고 있다. 흙냄새조차 말라버린 황토벽에 외롭게 걸려 있는 액자의 글귀를 음미하다 보니 청년의사 시절 가난과 무지, 질병에 속수무책인 농촌에 내려와 열악한 보건환경은 물론, 소작인을 가장하여 진찰권을 빌려 오는 환자도 시비를 가리지 않고 진료했던 쌍천 정신과 일치한다는 생각이 든다.

 

방안에는 전화기, 선풍기, TV, 냉장고, 가스레인지, 테이블, 소파, 에어컨, 전축 등 없는 게 없다. 모두가 현역에서 은퇴(?)한 가구라 한다. 테이블 하나는 이 원장이 신혼 때 밥상으로 사용하던 것이라고. 하루는 도둑이 들었는데 쓸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지 표시만 해놓고 그냥 가버렸다 한다. 그러나 이 원장은 “가끔 찾아와 명상에 잠기는 곳으로, 그 어느 새것보다 소중하고 애착이 간다”며 허허롭게 웃는다. 별장 소개는 이어진다.

 

“아버님이 채소를 가꾸시던 텃밭 한쪽에 40~50명이 바비큐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드럼통을 잘라 화덕으로 사용하고, 넓은 철판으로 대형 프라이팬을 만들어 한 번에 빈대떡 40개 정도를 구울 수 있도록 하고 YMCA 청년들, 치과의사들, 때로는 군산비행장 미군들을 초대해서 마당파티를 하곤 했죠. 그리고 ‘개정인의 집’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개정’은 동네 이름이죠. 그러나 ‘개정인’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있어요. 이영춘 박사의 삶에 감동되어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원장은 손님들을 초대해서 마련한 자리를 ‘개정인의 밤’이라 부르고, 이영춘 박사의 삶과 이념을 소개하는 것이 필수과목이라고 부연한다. 청년의사가 왜 부(富)와 명예, 편안함을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택했는지, 삶의 참 의미와 보람은 무엇인지, 진정한 봉사란 무엇인지 등을 생각하고 의견을 나눈다는 것. 그는 허름한 빈집에서 숙부인 이영춘 박사의 삶과 이념을 재조명하는 ‘개정인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바비큐를 할 수 있는 공간 한쪽 구석에는 옛날 우물에서 사용하던 대형 콘크리트 관(管)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궁금해 하는 기자에게 이 원장은 우물에 사용하던 게 아니고 위생용 원형변조(圓形便槽)라 했다. 생변(生便)을 거름으로 사용하는 습관이 기생충 만연의 주원인이 되기 때문에 충분히 부식한 인분을 사용하도록 콘크리트로 만든 변조란다.

 

치료보다 예방을 더 중요시했던 쌍천이 농민에게 재래식 화장실용 대형 옹기를 나눠주고 훗날 확인하니 모두 장독으로 사용하고 있더라는 것. 그래서 유솜(USOM)의 지원을 받아 한 집에 콘크리트 원형변조(깊이 5척, 지름 3.5척) 3개씩을 설치토록 해서 첫 달에 제1조, 둘째 달에 제2조, 셋째 달에 제3조를 쓰게 하여 3개월이 지나 완전히 부식된 제1조의 변을 거름으로 사용했더니 회충 감염률이 85%에서 60%로 줄어드는 효과를 봤다 한다.       

 

 


 

가슴 뭉클하게 하는 남다른 형제애

한국 농촌위생의 선구자, 공중보건의 개척자, 흙에 심은 사랑의 인술, 국산박사 1호, 한국의 슈바이처…….

쌍천 이영춘 박사의 다른 표현들이다. 그와 같은 명성에도 쌍천은 태어나서 숨을 거두는 날까지 80여 성상(星霜) 동안 온갖 시련을 겪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단 한 번도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럼에도 쌍천은 ‘나는 농민을 위해 희생했다’는 말을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고. 

 

쌍천은 1903년 10월 16일 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대령리에서 부친 이종현(李宗鉉)과 모친 김아옥(金娥玉)의 막내(5남 1녀)로 태어난다. 이영기 선생은 쌍천에게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하도록 권유하고 등록금과 학비를 마련해준 손위 형. 다섯 살 터울인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형제애가 유달리 돈독했다. 이영기 선생의 동생 사랑은 너무도 애틋해서 감동을 자아낸다.

 

 

 

이영기 선생과 쌍천 형제는 평양고보 선후배 사이기도 하다. 소년 쌍천의 꿈은 보통학교 훈도(초등학교 교원)였다. 그는 영대(셋째), 영기(넷째) 형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관서지방에서 제일 유명한, 그래서 도내 각지에서 지원자가 몰려드는 평양고보 시험에서 수석(영기)과 차석(영대)을 나란히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쌍천은 형들 중 넷째형을 가장 좋아했다. 영기 역시 하나뿐인 동생을 누구보다 귀여워하고 사랑했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영대, 영기 형제는 교원 발령을 받는다. 참한 여교사와 결혼하여 황해도 신막에 살던 이영기 선생은 경북 대구 수창학교 재직 중 습성근막염에 걸린 쌍천을 집으로 오라 하여 김찬두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한다. 이때 쌍천의 꿈은 ‘스승의 길’에서 ‘인술의 길’로 바뀌어 1925년 세브란스 의전에 들어가 의사가 된다. 당시 쌍천 학적부에는 김찬두 의사와 학비를 대준 넷째 형 이영기 선생이 보증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영기 선생의 동생 사랑은 감동 그 자체. 1935년 4월 옥구군 개정면 구마모토농장(態本農場) 자혜진료소 소장으로 부임하여 열악한 농촌위생과 소작농 건강을 위해 헌신한 쌍천은 해방되던 해(1945) 11월 전북 군정청 지사(정일사)와 보건후생국 간청으로 군산 도립의원 원장을 겸임, 6개월에 걸쳐 업무를 수습하고 이상기 의사에게 원장직을 인계한다. 이때 황해도에 살던 이영기 선생은 가족과 군산에 정착, 도립의원 서무과장으로 쌍천을 돕는다.

 

농촌 의료시설에 취업하려는 간호사가 없어 애통해하던 쌍천이 1949년 정부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3년제 '개정 간호고등기술학교'(군산간호대학 전신)를 설립하고 1951년 첫 신입생을 모집한다. 이때도 이영기 선생은 퇴직하는 60년대 초까지 교감으로 재직하면서 간호대학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한다. 평생 동생을 도우면서 뒤치다꺼리만 했던 것. 남다른 형제애가 감동적인 휴먼스토리처럼 느껴진다.

 

 

“아버님(이영기)과 숙부님(이영춘)은 가치관이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숙부님은 1948년 양관(이영춘가옥)에서 10명이 예배를 시작으로 교회를 세우고 장로가 되는데, 아버님은 불교(천도교) 쪽에 가까웠거든요. 그리고 아버님은 ‘사명감’ 하나로 환자 진료에만 몰두하는 숙부님을 보며 ‘저러면 안 되는데, 저러면 안 되는데···.’라고 되뇌면서 안타까워했어요. 저는 숙부님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가 오히려 이상했습니다. 부자(父子)간에 언쟁이 일어나기도 했으니까요.(웃음)” 

 

 

 

제목만 봐도 마음이 숙연해지는 쌍천의 고난 10가지

코흘리개 시절부터 쌍천의 인술을 지켜보며 자란 이주민 원장은 “나도 의사가 되어 도와드려야지!” 하고 다짐한다. 다짐은 현실로 나타났다.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의사가 된 것. 군의관 복무를 마치기 무섭게 시골에 있는 개정병원 치과과장으로 부임한다. 그는 “치아에 인식이 부족한 농촌 병원이어서 수입이 불안했지만 숙부님 정신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한다. 

 

이 원장은 이영춘 박사가 77년 생애에 겪은 수많은 고난 중 ① 병(病)에 걸리다.(1924) ② 개업 실패(1933) ③ 첫 번째 상처(喪妻:1936) ④ 두 번째 상처(喪妻:1949) ⑤ 교통사고(1953) ⑥ 26세 장녀(長女)를 잃다.(1953) ⑦ 재정난(1969) ⑧ 시그레이브 기념병원 개원(1970) ⑨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낙선(1972) ⑩ 간호학교를 넘기다.(1974) 등 10가지를 꼽았다. 제목만으로도 마음이 숙연해지고 가슴이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쌍천은 허다한 난관을 오직 사명감 하나로 이겨나갔고, 또 기적과 같이 해결됐다. 주위 사람들은 병원이 어려울 때마다 쌍천의 경영 미숙을 탓하였다. 그러나 현대 경영학자들은 경영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사명감’(Mission)을 꼽는다. 이는 이름만 남은 개정병원(시그레이브 병원) 역사가 증명한다. 쌍천은 사명감 하나로 마치 ‘욥’과 같이 많은 어려움을 헤쳐 나갔던 것. ‘이것이 바로 삶의 교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참고문헌

<나의 교우록> 이영춘 저

<흙에 심은 사랑의 인술> 홍성원 지음

조종안(시민기자)님 기사 더보기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닫기
댓글 목록
댓글 등록

등록


카피라이터

주소 : (우)54020 전북 군산시 절골3길 16-2 , 출판신고번호 : 제2023-000018호

제작 : 문화공감 사람과 길(휴먼앤로드) 063-445-4700, 인쇄 : (유)정민애드컴 063-253-4207, E-mail : newgunsanews@naver.com

Copyright 2020. MAGAZINE GUNSAN. All Right Reserved.

LOGIN
ID저장

아직 매거진군산 회원이 아니세요?

회원가입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잊으셨나요?

아이디/비밀번호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