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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퀸 닮은 남춘역, 옛날 신문에서 만나다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3.10.01 15:59:3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1963년 8월 24일 자 <동아일보>에 영화배우 남춘역(南春驛)씨가 요독증과 기관지천식으로 성모병원에 입원치료 중 그날 상오 11시 50분경 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사망당시 나이는 마흔한 살. 신문은 "남씨는 18세 때 연예계에 들어가 23년 동안 가수와 영화배우 생활을 해왔으며, 유가족은 부인과 5남매가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튿날 아침 신문을 받아본 아버지와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극장 스크린에서 봤던 다양한 모습의 남춘역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개성 넘치는 그의 연기를 인상 깊게 봤던 필자도 마음이 아프기는 마찬가지.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 아저씨가 돌아가신 것 이상으로 마음이 짠했다. 그의 짧은 생애가 안타까움을 더했다. 

 

남씨의 이미지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뇌리에 강렬하고 선명하다. <연산군>으로 기억하는데, 내시로 분장한 그가 머리를 조아리고 임금을 보좌하는 모습과 프랑스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1957)에서 종지기로 등장하는 '안소니 퀸'이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 그래서 그런지 얼굴 모습도 닮은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단역 출신에 데뷔 나이(18)도 같다.

 

가요콩쿠르 본선에서 '레코드예술상' 차지

남춘역의 본명은 이종모(李鐘模), 1923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흰쌀은 구경조차 어려웠던 일제강점기 흥남동과 선양동 말랭이(고지대) 움막집에서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성장했다. 손꼽아 기다리던 가요콩쿠르 예선이 1941년 4월 어느 날 태평 레코드사 주최로 군산에서 열렸다. 그러나 그는 접수비가 없어 무대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가수의 꿈'을 접을 수는 없었다. 남씨는 콩쿠르 예선이 끝나고 여관에서 쉬고 있는 일행을 찾아가 돈이 없어 응모를 못 했다며 통사정했다. 당시 가요콩쿠르 심사는 엄격했다 한다. 박자, 음정, 발성, 곡상(曲狀) 태도 마이크 적성 등 14가지나 되는 까다로운 기준이 있어 여기에 통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수많은 가수 지망생들이 예선에서 탈락하고 실의에 빠졌음은 물론이다.

 

꾀죄죄한데다 기차 화부처럼 얼굴이 새카만 남씨를 딱하게 여긴 심사위원(반야월)이 노래를 해보라 하였고, 결과는 예선통과였다. 절치부심, 그해 5월 서울 제일극장(훗날 한일극장)에서 열린 총결선에서 1등으로 '레코드예술상'을 차지했다. 2등은 함경도 함흥 예선을 거쳐 올라온 백난아였다. 가수가 된 남춘역은 일본으로 건너가 데뷔곡 <그림자 고향>, <왕모래 선창>을 취입한다.

 

남씨에게 가수 진출의 기회를 제공해준 작곡가 반야월씨는 훗날 어느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1등을 차지하고 군산에서 낯익었던 심사위원들 앞으로 다가와 '꾸뻑' 큰절을 하고는 씩 웃는 폼이 꼭 연극배우 같았다."며 "아니나 다를까 그는 결국 가수로는 크게 빛을 못 보고 연극을 하다가 배우가 되어 구수한 서민역을 잘해냈다"며 추억을 더듬는다. 

 

순탄하지 못했던 연예인 생활

남춘역의 가수 인생은 시작부터 가로막는 게 많았다. 1등 은컵을 들고 군산에 내려오니 와병 중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쟁이놈'이라며 멸시했다. 보랏빛 꿈이 일그러질 무렵 군산에 나팔소리가 들렸다. 떠돌이 악극단이 들어온 것. 그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뒤로하고 단원들을 따라 상경, 극단 <황금좌>에 입단한다.   

 

그는 <황금좌> 소속 가수로 활동하다 자기 죽음을 지켜봐 준 천생배필을 만난다. 세 살 아래 소녀(김용희)와 사랑을 속삭이다 결혼에 골인한 것. 일제 말엽에는 만주 신경(新京)의 <신태양악극단>에서 활약하는 등 떠돌이 가수로 전전하다 해방 후 영화 붐을 타고 배우가 된다. 그러나 구두수선공, 보일러공, 뱃사공, 식당 보이, 웨이터, 광부, 내시 등 단역뿐. 외로움을 씹고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만을 도맡았다.  

 

1947년 4월 스스로 악극단을 조직해서 창립공연도 하고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악극단 이름은 자신의 예명을 따른 <南春驛>. 대표는 서두권, 기획은 윤풍이 맡았으며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을지로 6가에 있었다. 하지만 그 후 기록이 없고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일찍 흥행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남씨는 연기를 하겠다는 다짐을 포기할 수 없어 이해랑, 김승호 등 당대 내로라하는 연극인들과 함께 극단 '신협'에서 활동했다. 이해랑은 남씨의 연기 지도자였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도 6남매 등 30여 명의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으로서도 책임감을 저버리지 않았다. 

 

자유당 말기(1959) 어느 날 정치깡패 임화수가 희극배우 김희갑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주먹과 발길로 짓이겨 늑골 세 대가 나가는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옆에는 당시 잘 나가는 배우가 여럿 있었으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남춘역과 주선태가 꼬꾸라진 김희갑을 부축해서 병원으로 옮겼다. 이를 항상 감사하게 여겼던 김희갑은 훗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현역 때는 단역배우, 죽은 후에는 명배우   

남춘역은 암울했던 시대에 태어나 불혹을 막 넘긴 아까운 나이에 이승을 하직했다. '쟁이놈'은 안 된다며 강력하게 반대하던 아버지와 따뜻하게 감싸주던 누님과 형제들을 뒤로하고 상경하여 연예인이 되고, 예명을 사용한 것에 자괴감을 느껴서일까. 남씨는 숨을 거두기 전 간호사에게 "내 본명이 이종모이네!"를 세 번이나 되뇌었다 한다.  

 

세상을 뜨기 1년 전 극단 신협 재기공연 <갈매기떼>에 19세 소년으로 출연하는 등 열정이 대단했던 남씨. 그는 단역, 아니면 기껏해야 조연이지만 <울고 간 사랑 5백 리>, <상해의 밤>, <구두닦이>, <다시는 놓지 않으련다>, <청춘 12열차>, <두만강아 잘 있거라>, <초립동>, <어느 여대생의 고백>, <현해탄은 알고 있다>, <마부>, <지게꾼> 등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죽음은 외롭지 않았다. 연기를 지도해준 이해랑씨를 비롯해 유명·무명 배우들이 빈소를 찾아 애도했다. 장례식은 배우협회장으로 치러졌고, 요절을 슬퍼하는 행렬이 종로 거리를 메웠다고 당시 언론은 전한다. 영화감독 김수용씨는 그해 12월 어느 신문의 칼럼에서 "지난여름 남춘역씨와 같은 선량하고 진실한 연기인을 잃은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고 회고했다. 

 

 

 

스타는 영원하다고 했던가. 사망 전 촬영을 끝낸 10여 편의 영화가 사후에 하나씩 개봉되어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딸 하나(김혜정)를 둔 산골노인으로 출연했던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기억에 남는다. 남춘역은 1963년 12월 제1회 청룡영화제에서 특별 연기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고인이 된 후여서 상패는 후배인 '장 혁'씨에게 전해졌다. 1964년 3월에는 부산일보가 주관하는 제7회 부일영화상 국산영화 부분에서 특별상(特別賞)을 받기도 한다. 

 

'사람은 관 뚜껑을 덮은 후에야 가치가 제대로 평가된다'는 뜻의 사자성어 '개관사정'(蓋棺事定)이 떠오른다. 악극단 출신 영화배우로 불우한 환경에서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였고, 23년 동안 단역 아니면 기껏해야 조연으로 연예인 생활을 마감했지만, '이름 없는 명배우'로 기록되고 있어서다. 

 

참고자료: 1963년 8월 28일 경향신문/ 1947년 4월 17일 동아일보/ 1985년 2월 13일 경향신문/ 1973년 3월 15일 동아일보/ 1991년 7월 18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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