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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두환의 ‘3S 정책’에 놀아났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야!”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3.08.01 18:01:16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1972년 무더운 여름밤. 짜릿한 9회 말 역전 결승타로 제26회 황금사자기 우승을 쟁취한 군산상고는 호남 야구 중흥의 기수로 떠오른다.  또한, 그해 가을부터 1976년까지 4년 동안 전국규모 야구대회에서 보여준 저력(우승 4회, 준우승 4회)은 서울과 영남권에 갇혀 있던 고교야구의 빗장이 전국으로 열리는 계기를 마련한다.  군산상고는 경기마다 박진감 넘치는 명승부를 보여줌으로써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하게 된다.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나 관중이 차던 동대문야구장은 8강전부터 입장권이 매진되는 광경을 연출한다.  특히 군산상고 경기가 주말이나 휴일과 겹치면 서울 시내 직장인과 고등학생들이 운동장에 나와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195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야구 후원자로, 매니지먼트(management)으로 활동했고, 한국 프로야구 출범을 막후에서 주도하기도 했던 이용일(83) 전 KBO 총재권한대행(이하 존칭 생략)의 회고를 들어본다.  "군산상고 우승 행진은 고교야구 붐을 일으켰지. 1974년 충남 공주고, 1976년에 천안 북일고가 창단했어.  광주일고 출신 김종태(전 광주일보 사장)는 회사(경성고무)까지 찾아와 '선배님 저도 전남에 야구를 키워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라며 자문을 구하더군.  진흥고, 동신고, 광주상고 야구부도 그때 만들어졌어.  그 후 충청·호남 팀들이 참가하는 지역대회도 개최했지.  수도권과 영남권에 비해 경기 경험이 일천했던 팀들이 실전경험을 쌓으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실력이 향상된 거야.  그리고 내가 몇 사람을 만났어. 동대문구장 근처에 사는 호남출신 상인들은 수시로 응원하러 왔고, 청계천 의료공장 잡부 한 사람은 광주일고나 군산상고 경기가 있는 날은 사장에게 사정사정해서 나온다는 거야.  마음대로 큰소리치면서 응원할 수 있는 경기장은 야구장밖에 없어서 온다는 사람도 있었지.  75년 광주일고의 대통령배 우승, 77년 공주고의 대통령배 우승 등 충청·전라 고교야구팀들의 부활이 그들을 불러들였던 거야."

 

군산상고가 유달리 관심을 끈 이유는 또 있었다.  1970년에 이어 1974년에 일어난 경성고무(사장 이용일)의 대형 화재, 최관수 감독의 파킨슨병 투병, 선수들의 인간애 넘치는 휴먼 스토리 등 '역전의 명수' 주역들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가 신문에 보도되면서 팬들을 안타깝게 하거나 감동을 줬기 때문이었다.  고고야구를 다룬 영화 <자! 지금부터야>(1977년 개봉, 감독 정인엽)도 한몫 더했다. 

 

고교야구는 천안 북일고가 제10회 봉황대기에서 우승을 쟁취하는 1980년을 기점으로 전국 평준화가 이뤄지면서 국내 최고의 스포츠로 자리매김한다.  관중도 지역 연고보다는 좋아하는 팀이나 선수의 경기 모습을 보려고 운동장을 찾는 팬들이 늘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프로야구 개막을 앞당기고, 지역 연고제가 성공하는 바탕이 된다.

 

회사 경영권 상실에도 야구사랑은 변하지 않아 

1976년 11월 13일은 경성고무(주) 창립 44주년 기념일.  이용일 사장은 군산에 내려와 종업원들과 기념식을 조촐하게 치렀다.  회사 생일임에도 직원들은 침울했다.  고무신 사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경영 악화로 주식 50%를 선경(현 SK)에 넘겨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장은 경영권도 선경에 넘겨주고 직함만 갖게 됐음에도 야구에 대한 애착과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1978년 봄. 당시 대한야구협회 김종락 회장과 최인철 부회장이 이용일을 찾아왔다.  네덜란드 5개국 친선대회(8월 13일~21일)와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제25회 세계선수권대회(8월 25일~9월 6일)에 초청받은 한국 대표팀 단장을 맡아달라는 것.  제의를 수락한 이용일은 네덜란드에서 만난 쿠바야구협회 '나폴레온' 회장에게 쿠바 야구는 출생지에서만 할 수 있고, 초등학교 선수가 되면 취업까지 그 지역에서 보장한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 야구도 새로운 바람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네덜란드 대회에서 강팀 쿠바를 꺾고 2위를 차지했지.  대표선수들과 함께 한 달가량 지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한국 선수들이 일찍 유니폼을 벗는 게 제일 아쉽더군. 그해(1978) 상업은행이 백호기 대회에서 우승했지.  김준환이 주장이었는데, 나에게 오더니 금일봉 3만 원 받았다며 야구 그만둬야겠다는 거야.  어이가 없더군. 70년대 중반까지도 우승하면 선수들 승급도 시켜주고, 뭉칫돈을 줬는데 말이야.  야구가 망하겠더라고.  그때 충격으로 프로야구 구상에 더욱 매달렸지."

 

김종락 회장은 이용일을 다시 찾는다.  김 회장은 1977년 12월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국제아마추어야구 연맹총회에서 어렵게 유치한 '82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려면 실업연맹, 대학연맹, 고교연맹으로 나뉜 별도기구를 통합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후 이용일은 장태영(실업), 김진영(대학), 풍규명(고교) 등을 만나 설득에 나섰다.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 연말에 세 단체가 해산 총회를 열고, 1979년 2월 지금의 대한야구협회가 출범한다.

 

그 후 이용일은 야구계에 발길을 끊는다.  그러나 김 회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대한야구협회 전무(1979~1980)를 맡는다.  그가 전무 시절 구상한 사업은 야구인 외국 연수, 알루미늄 배트 초·중·고교에 무상공급 등.  특히 통합기념 이벤트로 대학과 실업 선수들이 각자 졸업한 모교 유니폼을 입고 겨루는 '고교야구대제전'을 제안, 그해 10월 하순에 개최한다.  김 회장은 우려했으나 첫 경기부터 만원이었다.  재경 동창회나 동향인들이 경기장을 찾아 응원전을 펼치면서 향수를 달랬다.

 

 


 

1978년부터 구상한 '한국프로야구창립 계획서', 빛을 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사정 바람이 휘몰아쳤던 1981년.  집에서 쉬고 있던 이용일은 서울대 동기 이호헌의 전화를 받는다.  문화방송(MBC)에서 프로야구단을 만들 생각이니 도와달라는 것.  이용일은 밤을 새며 작성한 18쪽 분량의 '한국프로야구 창립계획서'를 보내준다.  그러나 한 달쯤 지나 이번엔 이상주 청와대 교무수석비서관이 전화를 해왔다.

 

"이 수석이 회의 결과를 전하면서 난색을 표하더군.  지역감정을 심화시킬 수 있으니 계획안을 수정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나는 그만두겠다고 했지.  프로스포츠는 GNP 2만 불 이상 되는 나라에서 여가선용을 위해 하는데, 2천 불도 안 되는 나라에서 특색도 없이 프로야구를 어떻게 하느냐, 난동을 부려도 운동장에서 그치는 남미 실태를 조사해보고 내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면 실력자들(허화평·허삼수·이학봉)을 납득시키라고 했지.  그런데 열흘 후에 예정대로 추진하라는 연락이 왔어.  나도 처음에는 선수들 중심으로 알아봤지.  그런데 동대문상고 나온 윤동균 고향이 강원도라 하고, 선린상고 나온 박노준의 출생지는 목포라 그러고…….  그걸 다 어떻게 뽑아.  하루 종일 하다가 집어치우고, 고등학교 졸업 중심으로 바꿨지.  경상도 아이라도 전라남북도 고등학교 졸업하면 무조건 '해태'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내가 전두환 정권의 노리개로, '3S 정책'(영화·섹스·스포츠)에 놀아났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야.  1978년부터 구상해온 '프로야구 창립계획서'(성장기·발전기·안정기 각 3년씩 9개년 계획안)를 당시 청와대에서 100% 밀어줬고, 지원해준 것이지. 처음에는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했지만, 결국 내 계획안대로 진행됐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한국프로야구 젊어져야 해.  우리 야구 수준이 높아졌거든.  요즘 최고 연봉이 15억인가 하는 모양인데, 25억, 30억 받는 선수가 나와야 한다 이거야.  관중도 더 늘어나야 해.  애정과 열정으로 매니지먼트 할 수 있는 리더가 나와야 프로야구가 살아.  썩어빠진 정신으로 하면 안 돼.  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야, 됐어.  그만하자고."

 

한국 프로야구 산파 역할을 했던 이용일 초대 KBO 사무총장은 인터뷰 내내 왕성한 모습을 보여줬다.  팔순을 넘겼음에도 놀라운 총기(聰氣)와 40대 못잖은 열정이 넘쳐났다.  깊게 패인 주름에서 카리스마도 느껴졌다.  그는 기자의 명함을 챙겨 지갑에 넣고는 총총히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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