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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 떼가 안개 낀 날 소낙비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어요!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3.08.01 17:30:3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서해안 외딴섬에서 태어나 열네 살 때 1.5톤짜리 돛단배 화장(火長: 배에서 밥 짓는 일을 맡아 하는 사람)으로 험난한 어부 생활을 시작한 임성식(76)씨.  그는 1969년 9월 국내 처음으로 ‘동지나해’(東中國海) 어장을 개척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바다의 사나이다.  바다 인생 62년.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안강망의 달인’, ‘째보선창의 산증인’ 등의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동해에서 잡히던 오징어가 서해에 출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바다가 엄청나게 변했어요.  지난 5월에도 수온이 차가 워서 배들이 겨우 현상유지 했습니다.  옛날에는 입하(立夏) 사리를 앞두고 알밴 참조기 무더기가 째보선창에 산더미처럼 싸였죠.  그때는 멀리 나갈 것 없이 근해 어장에서 잡았습니다.  그야말로 ‘물 반, 조기 반’, 콧노래가 절로 나왔죠.  그런데 지금은 대흑산도, 소흑산도까지 나가서 조업을 해요.  그렇다고 많이 잡히는 것도 아니고…….”

 

임씨는 푸념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무동력선이 주종을 이뤘던 50~60년대에는 해마다 5월이면 군산 째보선창에도 조기 파시가 섰다.  고깃배들이 만선을 알리는 오색 깃발을 펄럭이며 들어오는 모습, 볏짚으로 조기를 엮는 아낙들의 콧노래 장단, 건조대에 매달아 놓은 조기가 굴비로 변해가는 모습 등은 풍요 그 자체였다.  '째보선창에 가면 강아지들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도 그때 나온 유행어다.

 

선주들 사이에 ‘꾀를 안 부리고, 일도 잘하는 놈’이라는 소문 나돌아

임씨는 전북 군산시 내항에서 북서쪽으로 23km가량 떨어진 작은 섬 연도(煙島)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임씨가 자랄 때는 주민들이 근해에서 잡히는 어패류와 해초를 넣은 보리죽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섬이었다.  섬 모양이 솔개처럼 생겼다 하여 ‘소리도’로 불리었으며, 화창한 날은 중국 산동에서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해서 연도라 부르게 됐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내려온다.

 

연도항은 작은 어촌으로 입지조건이 좋아 기상이 갑자기 악화되면 연근해에서 조업하던 어선들이 대피하는 피난처로 이용해온 어항(漁港)이었다.  1971년 12월 국가 어항으로 지정되어 항만시설을 갖추었다.  그렇게 천혜의 환경을 갖춘 섬이어서 옛날부터 어부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코흘리개 임성식 학생 눈에도 보이는 게 고깃배요, 만나는 게 뱃사람들이었다. 

 

“생활이 넉넉했으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지(군산)로 유학을 왔겠지만, 끼니를 거르면서 학교에 다닐 정도로 가난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어요.  쌀 구경도 하기 어려웠을 때니까요.  식구는 예닐곱인데 아버지는 별다른 능력도 없고…….  생각 끝에 보리라도 받아서 양식에 보태려고 돛대 두 개 달린 돛단배 화장을 했죠.  그때야말로 섬에서 돈 버는 방법은 뱃놈이 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어리다고 퇴짜 맞을까 봐 나이를 한 살 올려 열다섯 살이라고 속이고 배를 타게 됐죠.” (웃음)

 

부모에게 투정이나 부릴 나이에 어부가 된 임씨.  그는 선주에게 계약금으로 받은 보리 다섯 가마를 집으로 보낼 때는 뿌듯함에 앞서 나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다.  고난과 역경을 남보다 앞서 개척해온 그의 최고 무기는 성실과 근면, 그리고 부지런이었다.  따라서 선배 어부들은 물론 선주들 사이에 ‘꾀를 안 부리고, 일도 잘하고, 눈치 빠른 놈’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어깨너머로 엔진 다루는 기술 익혀 기관장, 선장 면허증 따내

“연도에서 돛단배를 2년 남짓 타다가 개야도(이웃 섬) 선적 주꾸미 잡는 배로 옮겼죠.  같은 돛단배지만 조금 큰 배니까 직장으로 말하면 승진한 셈이지요.(웃음)  이른 새벽에 닻을 올리고 동트는 바다에 배를 띄우는 일이 더해졌는데, 하루는 밥을 해먹고 손을 씻으려고 바다에 담그다가 배 밑으로 지나가는 시커먼 고기떼를 발견하고 후딱 주먹을 뻗었더니 이따만한(팔뚝만 한) 참조기 한 마리가 잡히는 거예요.  신기한 마음에 손을 들어 자랑했더니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너는 뭣을 해도 한 번은 해먹을 놈’이라고 하더군요.”

 

얼마 후 임씨는 1년 노임으로 ‘머리조기’(가장 큰 조기) 500마리와 밴댕이젓을 한 통씩 받기로 계약하고 20톤짜리 안강망 화장으로 옮겼다.  당시로는 대형 동력선이었다.  임씨는 육지에 발을 내디디지 않았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동료들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해도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댔다.  대신 어깨너머로 엔진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노력한 보람으로 기관장 면허증을 취득했다.  배에서 엔진을 끄고 시동 거는 권한이 주어지니 욕심이 생겼다.  몇 년 후에는 선장 면허도 따냈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동갑내기 아내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은 했지만 한 달의 절반은 배에서 지냈다.  저녁을 먹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선상에 누우면 하늘에서 별똥별이 꼬리를 물고 떨어졌다.  반짝이는 별들을 하나둘 세다 보면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비릿한 바닷바람은 임씨 마음을 더욱 스산하게 했다.  파도가 배 밑창을 철썩철썩 때릴 때면 엉덩이가 간지럽게 느껴지면서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바느질하고 있을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순간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럴수록 성공한 어부가 되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선원들과 목숨 걸고 개척한 동지나해 어장

임씨는 어부생활 15년 만인 스물아홉에 20톤짜리 안강망 어선(목선)의 어엿한 선주가 된다.  출어 때마다 높은 어획량을 올렸고 이를 고맙게 여긴 선주의 주선도 있었지만, 성실과 근면으로 다져진 저축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임씨는 어족자원 고갈에 따른 어획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말로만 듣던 동지나 해상으로 진출한다.  조업이 아니라 사활이 걸린 투쟁이었다.

 

“20톤급 목선에 선원 8명이 타고 고기떼를 찾아 항해를 시작했죠.  제주 앞바다를 지나는데 한 선원이 ‘동상(동생), 내가 죽으믄 어머니 외에는 물 한 그릇 떠놓을 사람도 없네, 나를 제주에 내려주게’라고 하기에 ‘형님은 어머니만 계시지만 저는 외아들에 어머니 아버지 모두 계십니다.  지금은 큰바람이 불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라’며 달래서 보냈죠.  그런데 한 참 있다가 또 한사람이 오더니 불효자가 되기 싫다면서 같은 소리를 하는 거예요.  같은 처지에서 위로하고 달래는 수밖에 없었죠.  항해를 시작하고 이틀쯤 지났을까, 동녘이 밝아올 무렵,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갈치 떼였어요.  감격에 고함을 지르면서 투망을 하고 한 시간쯤 지나 그물을 거두니까 갈치와 병어가 가득한 거예요.  부근에 있는 배들은 모두 모이라고 무전을 쳤죠.  수심은 스물다섯 발 정도 된다고 정보도 알렸죠.  정신없이 밤낮 3일 동안 작업해서 갈치를 선원들 잠자는 선실까지 가득 채워 뱃머리를 군산으로 돌렸습니다.  물고기가 상할까 봐 대흑산도에 들러 얼음을 가득 덮어주고 항해를 계속했죠.  얼마나 많이 잡았는지 뱃머리에 바닷물이 남실남실…….  선체가 거의 바다에 잠기다시피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실아실 한데, 그날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었어도 배가 뒤집혀 몰살했을 겁니다.  만선에 눈이 뒤집혔던 제가 도둑놈이었죠.  어렵게 군산 째보선창에 도착하니 구경꾼 수백 명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 후 수많은 상과 훈장도 받았는데요, 모두 꿈같은 얘깁니다.”

 

임씨의 동지나해 어장 개척은 당시 정부가 근해 어선들의 조업 범위를 동지나해 및 중부 태평양 어장으로 확대할 방침을 내비치는 등 한국 수산업 계에 대변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20톤 안팎 목선으로 연근해에서 조업해온 선주들은 원거리 조업을 위해 70톤~100톤 규모의 대형 어선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정부도 어장조사 및 시험 조업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기술 지도와 수산물 생산 및 수출 목표를 확대 발표하기에 이른다.

 

 

 

한때는 ‘어부 갑부’ 소리 들었으나 지금은 뒷전으로 물러나

목숨을 바다에 맡기고 살아온 어부 인생 70여 년. 만선의 기쁨도 누렸지만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용왕님이 긍휼히 여기고 그물에 고기를 가득 담아주면 환호성을 질렀고, 외면하거나 격노하면 노여움을 풀어드리기 위해 몸과 마음을 조신하게 처신했다.  임씨는 “명(命)을 길게 타고났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 같다”며 먼저 간 동료 어부들이 떠오르는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잖아요.  동지나해 어장을 개척한 뒤로 출어 때마다 만선을 했지요. 돈도 많이 벌었고, 배도 여러 척 건조했죠.  그러지만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했어요.  작은 배에 조기와 갈치를 가득 채워 입항하다가 북서 계절풍을 만나 침몰하는 바람에 많은 어부가 죽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나 때문에 그러한 사고가 나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이 들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한때는 크고 작은 어선 13척을 보유, ‘어부 갑부’ 소리를 들으면서 서해 어장을 누비고 다녔다.  어민들의 권유와 지지로 군산수협 조합장을 4대(1994~2010)에 걸쳐 지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정리하고 140톤짜리 안강망 어선 한 척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작년에 아들에게 넘겨주고 지금은 뒷전으로 물러난 상태.  임씨는 30년 전 마련한 군산 째보선창 부근 단독주택에서 노년을 아내와 조용히 보내고 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한 마디 덧붙였다. 

 

“나는 논뙈기도 밭뙈기도 땅뙈기도 모르고 평생 바다만 바라보며 살아왔어요.  돈을 버는 대로 고깃배를 건조했죠. 그중 안강망 한 척 값만 땅에 투자했어도 지금 돈 주체를 못 했을 겁니다. 진짜배기 뱃놈이었죠.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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