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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큰 스승 학창(學創) 이종록 박사
글 : 나필성(컬럼니스트) / pressman12@naver.com
2013.07.01 15:08:35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학창 이종록 박사의 ‘교육과 창조’의 교육 고희기념논문집 봉정과 함께 사학인의 최고 영예이며 상훈인 봉황장(鳳凰章)전수식이 1991년 9월6일 군산영비회관에서 열렸다.  22년 전의 일이다.  1921년 6월23일 군산 나운동에서 태어나 여기서 성장, 지금껏 이집을 지키고 있는 학창은 지금은 인근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향토 교육인으로 평생을 보내고 있다.  그 집은 지금도 ‘이종록’이란 문패가 붙어있다.  올해 93세다.

 

학창은 군산 신풍국민학교와 당시의 명문교인 이리농림학교와 일본 요코하마 전문 법학과를 거쳐 교토에 있는 기독교재단의 동지사(同志社)대학 법문학부를 다니다가 일제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복무하다 중국 남경(南京)에서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1945년 10월5일 오후 4시경 꿈에도 그리던 고향땅 군산을 되찾았다.  학창은 지금도 소학교 시절 ‘엄마 잃은 종달새’라는 노래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라 잃은 설움과 민족의 독립의식을 더욱 일깨워준 잊지 못할 노래다.  귀국 후 잠시 군산중학교의 교사로 임용되었다.  그때 나이 24세.  그 후 문교부 고등교육국장을 거쳐 옥구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 다시 전북대 상과대학 설립에 크게 기여했다.

 

학창의 마음은 자나 깨나 교육의 꿈을 잠시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88맨숀이 세워진 자리에 있었던 일인들의 군산유치원을 광동중학교의 터전으로 삼고 문을 연 것이다.  광동학원은 중앙중고와 중앙여고를 개교하면서 오늘의 군장대학까지 성산면의 방대한 부지에 높이 솟아 그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8.15 후 장도영(전 육군참모총장)은 군산의 제 2연대 연대장으로 온 적이 있다.  이 때 학창은 군산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장도영이 학병 동기생이던 학창을 찾아와 같이 군의 발전을 위해 일할 것을 요청했다.  학창은 장도영에게 부디 강군 한국군의 간성이 되어줄 것을 격려하고, 나는 한국 교육을 위한 교육자의 길을 갈 것이라고 했다.

 

그 후 학창은 ‘창조적 교육론’등 42편의 교육논문을 발표했고, 저서 2권도 펴냈으며 중국 학술문화원의 철학박사 학위와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교육학과 철학 등 2개의 학위를 받았다.  2남3녀의 아버지로서 부인과의 다복한 말년을 보내고 있는 학창은 일본 유학중 YMCA 활동을 시작해 지금은 대한감리교 군산교회의 장로로 있다.  선조대왕때의 팔도병마철도사(현 3군 참모총장)와 한성부군(현 서울시장)을 지냈고 후에 영의정을 수서한 이몽룡의 11대손인 학창의 선영은 은파유원지 입구 좌측에 있다.

 

학창이 학병으로 징용됐을 때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글쓴이는 그 때 초등학생이었다.  동지사 대학 4각모(다른 대학보다 4각이 뾰족하다)에 단정한 학생 복장으로 부모형제 친지들과 함께 전 군산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그의 모습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이때가 1944년 1월20일이다.  그때 학창은 부모에게 ‘내가 징용되어 가더라도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1·20학병사’에서 학창은 간부후보생 시험의 최종단계의 부대장과의 면접에서 부대장이 기독교는 아편이며 미·영국의 침략전의 앞잡이라는 단정에 대해 전면으로 부정하고 반론을 폈기 때문에 불합격 될 것으로 알았지만 뜻밖에 합격했다.  그 때 육군소위가 된 것이다.  우리고장이 낳은 민족시인 高銀은 ‘나의 산하 나의 삶’이란 자전소설에서 “이종록 교장은 나를 데리고 교무실로 갔다.  교무주임과 교사들은 모두 10여명, 생각보다 교사 수가 적었다.  교장이 나더러 1학년과 2학년의 국어와 미술을 맡으라고 한 사실은 어느 정도 짐작했다.  교원자격이 엄격하지 않을 때라 대학 중퇴자도 많았다.  나 같은 스무 살도 안 된 애송이 중학생 수준으로 교사가 된 예는 없다. 나와는 사돈지간이다.” 이때의 이 교장과의 관계를 털어놓은 에피소드의 한토막이다.

 

봉정식에는 동료, 후배, 제자 등이 많이 모여 이박사의 교회를 축하해주었다.  원광대의 송천은 부총장은 ‘6월 마지막 고별강의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향리에서 교육철학을 실천하고 있는 이박사의 교육 사업이 보다 번창하기를 바란다’고 높이 평가했다.  동지사 대학의 예과생으로 그의 후배이며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이한빈(작고·전 경제기획원장관)은 천리길을 마다않고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이 박사는 ‘인생의 최고의 행복은 인격이다’라고 축가의 말을 전하면서 ‘종록형은 그때 사색적이였다.’고 회상했다.

 

장남 이승우 군장대학 총장은 ‘언제나 웃음을 읽지 않는 아버지상'을 말해 주기도 했다.  학창은 앞으로도 한국의 선비정신이 이 고장에 살아 있음을 일깨워 줄 것이며 지금 자택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는 학창의 앞날이 더욱 건강하기를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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