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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자기, 호남선 열차에 올라 군산으로 향하던 날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3.02.01 18:14:0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1970년대 한국의 고교야구. 사람들은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했다.  군웅할거(群雄割據) 시대라고도 했다.  동아일보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주최한 황금사자기 쟁탈 제26회 전국지구별초청 고교야구쟁패전 결승 9회 말에서 호남야구의 선봉장 군산상고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명실상부한 전국고교야구 패자(覇者)로 군림하는 데 성공한 1972년 그날 이후부터다.

 

 

 

역전이 역전을 낳고, 파란이 파란을 불러일으켰던 제26회 황금사자기 결승 진출팀은 영남의 강호 부산고와 창단 4년의 신출내기 군산상고였다.  조명탑의 칵테일 라이트가 휘황하게 비추는 1972년 7월 19일 오후 7시 서울운동장 야구장.  군산상고는 1회 말 선취점을 뽑았지만 3회 초 1점, 8회 초 3점을 내주어 4-1,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9회 말 공격에서 6번 타자 김우근의 안타와 8번, 9번 타자의 연속 포볼로 1사 만루, 역전승의 발판을 마련한다.  다음 타자는 1번 김일권.  그가 몸에 맞는 포볼로 나가면서 4-2로 따라붙었다.  계속되는 1사 만루에서 2번 타자 양기탁이 황금같은 안타를 때려 4-4 동점을 만들었다.  이어 타석에 들어선 3번 타자 김준환의 극적인 끝내기 좌전안타로 5-4로 역전승.  흙과 땀으로 범벅된 선수들은 붉은 자주색 바탕에 포효하는 사자를 수놓은 금빛 찬란한 황금사자기와 순은제 대형 우승컵(4kg)을 호남선 열차에 싣고 군산으로 향했다.

 

군산상고의 선제득점, 타이, 역전, 재역전 무려 네 차례나 엎치락뒤치락.  이날 경기는 한국야구 100년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최고의 명승부로 남아 41년이 지난 오늘에도 야구애호가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총알 같은 굿바이 안타로 2시간 40분에 걸친 대장정에 종지부를 찍고, 고교야구 역사를 바꿔놓은 김준환 선수.  2003년부터 원광대 야구부 사령탑을 맡고 있는 그의 소감을 들어보았다.

 

“그때 제가 핀치에 몰렸었죠.  투 스트라이크 노 볼인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투수의 손목을 주시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공이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때는 어느 선수가 나갔어도 안타를 쳐냈을 겁니다.  최관수 감독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 하셨고, 선수들은 꼭 이겨야 한다는 각오와 의지로 똘똘 뭉쳐 있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승리도 극적이었지만, 분에 넘치는 환영과 사랑을 받은 것 같습니다.”

 

군산상고의 영광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다.  창단 초기에는 아침을 거르고 연습에 임하는 선수도 있었고, 모래를 구입할 돈이 없어 연탄재로 야구장을 고르면서 의기투합했다.  김준환 감독은 “비가 내리면 운동장이 질퍽거렸는데, 선수들과 학생들이 연탄재를 두 장씩 들고 등교할 정도로 열의에 차있었다”면서 “40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옛이야기지만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열정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군산상고의 눈부신 활약이 군산을 ‘야구의 도시’로 만들어

군산상고 야구부는 경성고무(주) 이용일 사장의 지원으로 1968년 창설된다.  초대 감독은 군산출신 최동현.  1970년 7월에는 인천 동산고 시절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김응룡, 백인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최관수(1943~1998) 감독이 사령탑을 맡았다.  최 감독의 지휘 아래 구슬땀을 흘려온 선수들은 1971년부터 빛을 발한다.  그해 5월, 제5회 대통령배 쟁탈 고교야구대회에 출전, 강호 중앙고와의 준준결승에서 예상을 깨고 대승(6-0), 호남 야구를 23년 만에 4강 대열에 올려놓는다.  8월에 열린 제1회 봉황대기쟁탈 대회에서는 우승팀 경북고와 2회전에서 격돌 14회 연장전 끝에 1-0으로 분패한다.  그러나 10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2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 끝내 전국을 제패한다.  최 감독 부임 2년만의 개가였다.

 

제26회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신화적인 ‘역전의 명수’를 창조하면서 ‘야구는 9회 말 투 아웃부터!’라는 말을 만들어낸 군산상고는 그 후 국회의장배 대회 우승(1972), 제56회 전국체육대회 우승(1975), 제10회 대통령배 대회 우승(1976), 제37회 청룡기 대회 우승(1982), 제12회 봉황대기 대회 우승(1982), 제39회 청룡기 대회 우승(1984) 등 전국규모 대회만 우승 16회, 준우승 18회 3위 10회를 기록하며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한다.

 

군산상고의 눈부신 활약은 군산을 ‘야구의 도시’로 만들었다.  시민의 생활 패러다임도 바꾸었다.  어쩌다 고교야구 친선경기라도 열리면 경기장을 찾았고, 군산상고 야구팀이 전국대회에 출전,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중앙로, 영동, 평화동 등 중심가는 정적이 감돌았다.  흑백 TV도 귀하던 시절이어서 다방과 전파상 앞으로 모여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부 택시 기사들은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TV 중계를 지켜보며 수준 높은 해설과 이론을 펼치기도.

 

결승전을 앞둔 날은 시내가 들끓었다.  도지사, 시장 등 각급 기관장들은 축전을 보내고, 시민의 기대는 월명공원 산책로에 만발한 아카시아처럼 만발했다.  시청 직원들은 환영식 준비에 바빴고, 군상 재학생들과 시민응원단은 상경 준비를 서둘렀다.  우승을 하면 시내는 온통 축제분위기.  다방에서 응원하던 사람들은 술집으로 이동, 서울에서 내려온 응원단과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웠고, 이튿날 거리에는 각양각색의 환영 플래카드가 넘쳐났다.

 

서울에서 내려온 선수들은 35사단 지프에 올라 전주 시내를 가르고,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도민 환영대회에 참석하여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환영대회를 마친 선수들은 오픈카에 올라 전주를 출발하여 이리(익산시)에 들렀다가 군산에 도착, 팔마광장, 도선장, 서초등학교를 돌아 내려가다가 째보선창, 경찰서, 군산역 로터리, 군산상고, 금광동을 지나 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꽃가루가 뿌려졌고, 시민들은 환호했으며 선수들은 감격했다.

 

군산상고의 연이은 우승은 시내 어린이들의 꿈까지 바꿔놓았다.  골목의 공터에서는 ‘스트라이크!’ 소리가 요란했고, 차량이 뜸한 도로에는 ‘거리의 야구’가 등장했다.  선수층은 시멘포대로 만든 글러브와 빨랫방망이를 손에 쥔 8~12세 꿈나무들.  그들의 꿈은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스마일피처(송상복), 김성한, 조계현 같은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  엄마들은 야구 룰(rule)을 배우기 시작했고, 아빠들은 꼬마선수들이 자전거를 넘어뜨려도 혼내지 않았다.

 

 


 

둘이면서 하나였고, 하나이면서 둘이었던 김봉연과 김준환

또래 중 발이 빨랐던 김준환은 전주 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 경기가 신기하게 보이고 좋아서였다.  시멘포대와 신문지로 글러브를 만들어 사용해도 재미있었다.  홈런왕 김봉연(현 극동대 교수)과의 인연도 그때 시작됐다.  두 사람은 놀이도 운동연습도 따로 하는 법이 없을 정도로 붙어 다녔다.  그 후 전주 북중에 다니던 김봉연은 야구부가 해체되자 3학년 때 군산남중으로 전학하여 야구수업을 쌓고, 전주남중 선수였던 김준환은 1970년 군산상고에 입학한다.  중학교 때 헤어진 죽마고우가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난 것.

 

김준환과 김봉연은 두 살 차이로 김봉연이 2년 위.  그러나 두 사람은 후배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우정이 돈독하다.  그들은 처음 만날 때부터 둘이면서 하나였고, 하나이면서 둘이었다.  초등학교 때 야구를 함께 시작해서 군산상고, 육군야구단, 프로야구 해태의 중심타자로 활약하면서 둘도 없는 친구이자 경쟁의 상대였기 때문.  극동대 김봉연 교수가 밝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들어본다.

 

“준환이와 함께 전주 어린이야구팀으로 선발되면서 사귀기 시작했죠.  저는 어려서부터 까불까불 했습니다.(웃음) 그러나 준환이는 항상 묵묵하고 침착했어요.  시합은 물론 연습할 때도 말이 없고, 노는 것도 무게가 있었죠.  지방에 내려가면 준환이는 꼭 만나고 올라오는데요.  안부도, 대화도 욕으로 시작합니다.(웃음) 저희를 지켜본 후배들은 그 나이에 욕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형님들은 참 좋으시겠다면서 부러워하죠.”

  

1973년 군산상고를 졸업하고, 육군야구단 시절에는 안타제조기로. 해태 타이거즈 선수일 때는 5차례 우승을 일궈내는 주역으로, 1987년에는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준환, 평소 말수가 적고 게임 매너와 외모가 뛰어나 ‘침묵의 사나이’, ‘야구계의 신사’로 불리던 그도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 초로에 접어들고 있었다. (3월호에 계속)

 

기사에 도움 주신 분

동아일보, 경향신문, 군산상고 야구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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