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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독자들을 찾아가는 시간이 가장 즐거워요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3.01.01 16:06:32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한국 최초의 신문은 고종 20년(1883) 정부기구 박문국(인쇄소)에서 발행한 <한성순보>로 전해진다.  순 한문으로 발간된 <한성순보>는 당시 개화파들은 백성에게 개화사상 고취를 목적으로 했다.  한편, 한국 최초 민간신문은 고종 33년(1896) 서재필(186~1951)이 창간한 <독립신문>이다.  이 신문은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단행하여 훗날 신문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민중계몽과 자주독립 사상을 확립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위키, 두산백과 참고)

 

 


 

일제가 소화 10년(1935)에 발행한 <군산부사(群山府使)>에 따르면 1899년 개항한 군산의 최초 신문은 광무 7년(1903) 일본인이 전라북도 지역에서 처음 창간한 <군산신보>이다.  같은 해 지바(干葉)라는 일인에 의해 <한남일보>가 등사판 신문으로 발행되지만, 곧바로 폐간된다.  일어판 주간지였으나 일본 거류민회의 회장선거용 홍보 인쇄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  <군산신보>는 타블로이드 4면 활자 주간지로, 일본인을 위한 일본어판 신문이었다.  1907년에는 일본인 고주규(高州規)가 인수, 제호를 <군산일보>로 변경하고 일간지로 전환한다.  고주규는 25년 동안 사장으로 재직하다 소화 9년(1934) 2월 병사하고 부인이 발행인 겸 편집인이 된다.  동년 8월에는 세 명(기부겸재, 태평용상, 중재만길)의 상담원을 두고 추산충삼랑(秋山忠三郞)을 총무국장 겸 편집국장으로, 권천오랑(蜷川五郞)을 영업국장에 임명하고, 계속 발행한다.

 

1935년 군산에 있던 국내외 신문사 지사·지국은 <조선신문>지사, <부산일보>지사, <경성일보>지국, <일간대륙>지국 등 총 18개로 일인이 경영하는 일본어 신문 13개, 조선인이 경영하는 조선어신문 5개였다.  특히 1920년 일제총독부의 문화정책에 의해 창간된 조선·동아 등 한국인 지국장들은 일본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었으며 많은 제약을 받았다고 한다.  강화도조약(1876)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에 의해 전북 최초로, 전주보다 2년 정도 앞서 창간된 <군산일보>는 태평양전쟁(1941~1945)을 일으킨 일제가 1941년 6월 전시언론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한 개 도(道)에 하나의 신문사만 둔다’는 ‘一道 一社’ 방침에 따라 <전북시보>와 통합 후 해체된다.

  

군산시사에 의하면 대정 14년(1925) 10월 1일 현재 군산의 인구는 21559명으로 일제가 조선수탈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도시답게 미곡상, 정미소, 잡화상 등을 운영하는 일인이 많이 거주했다.  대정 15년(1926) 6월 9일 자 <군산일보>(6면 발행)는 당시 군산의 경제적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연재소설이 눈길을 끌었고, 따로 배치한 경성판과 광고판에는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사고는 물론, 관공서·기업체·개인상점 등의 광고와 문화행사 안내가 지면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다.

 

 


 

원로 언론인 나필성이 보는 해방 후 군산의 언론

군산출신 원로 언론인 나필성(85) 칼럼니스트는 “일제강점기 <군산일보>는 지역의 소식을 전하는 지방신문 차원을 넘어 중앙언론에 버금가는 전국적인 신문이었다”고 평가한다.  나 칼럼니스트는 군산 소화공립소학교(중앙초등학교)와 군산중학교(6년제)를 졸업하고, 서울 동국대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1950)이 일어나자 고향 군산으로 피난 왔다가 <군산신문>이 모집하는 기자시험에 합격,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딘다.  1928년 군산시 신풍동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군산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나 칼럼니스트는 1953년 서울에서 발행되는 <경제일보>(사주: 초대 상공부장관 임영신) 정치부 기자로 발탁되어 옮겨가기까지 군산에서의 기자생활 1년 남짓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면서 깊은 회상에 잠겼다.  아래는 인터뷰 내용.

 

맥군_ 기자에 응모하던 당시 군산의 언론계는 어떤 상태였는지?

한마디로 혼란기였죠.  그럼에도 <군산신문> 기자가 되려고 응시한 지원자가 60~70명이나 되었던 것을 보면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했지만 기자 인기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기사작성 제목은 <소방서에 불이 났다>로 기억하는데요.  합격자는 5명이었고, 월급은 5만 원이었습니다.  당시 <군산신문> 진용은 사장 김종량, 주필 김준권, 총무국장 현부남, 편집부장 김흥래, 사회부장 염태섭, 기자 원상식 등으로 짜여있었지요.

 

맥군_ 무척 기뻤을 거 같은데, 첫 기사로 무엇을 취재했는지요?

당시 <군산신문> 사옥은 군산시 중앙로에 있었어요.  나는 시청 출입을 맡았고 법원 검찰팀 그리고 학교담당 출입기자가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기사로는 월명공원 아래 광장(지금의 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리는 삼일절 기념행사를 취재했는데 그 원고가 사회면 톱기사로 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기사는 잘 쓴 글로 기억합니다. (웃음)

 

 


 

맥군_ <군산신문>은 언제, 누가 창간했는지요?

서울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한성일보> 사장 김종량이 1947년 10월 15일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창간하여 전면에는 외신과 서울 중앙소식을. 후면에는 지방뉴스를 게재했습니다.  창간 당시 운영진과 편집진은 김종량이 발행인과 사장을 겸했고, 부사장에 이철, 편집국장 김준권, 총무국장 배건학, 기획국장 백종기, 업부국장 현부남 등이었죠.  제가 입사하던 때는 타블로이드 4페이지로 발행했는데, 사진 등판기계도 갖춰있지 않은 미약한 시설이었어요.

 

맥군_ 해방 이후 군산에서 가장 먼저 창간된 신문은? 

훗날 3선 의원과 농림부장관을 지낸 김판술 씨가 대표를, 박상철, 박경주가 편집·운영을 맡고 1945년 9월 20일 창간한 <신광일보>로 알고 있습니다.  신문 판형은 타블로이드판 등사 신문이었고 사옥은 군산시 중앙로에 있었다고 합니다.  통신이 갖춰있지 않아 잘 들리지도 않는 라디오 청취를 정리해서 중앙의 주요 뉴스를 다뤘고, 군산지방 소식은 기자들 취재로 편집·발행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맥군_ 해방 이후에서 한국전쟁까지 5년 사이 군산에 다른 신문은 없었는지요?

<신광일보> 발행과 비슷한 시기에 최초의 우리글 활판으로 차균향이 <남선신문>을 발간하죠.  그러나 곧바로 김재홍에게 넘어가고, 미 군정에 의해 좌익성향으로 지목되어 1946년 8월 무기 정간되었다가 10월 복간되었으나 1947년 6월 포고령에 따라 폐간됩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사장은 차균향, 부사장 김판술, 논설주임 박상철, 총무국장 박경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맥군_ 군산에서 창간했다가 익산으로 옮겨간 신문사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1946년 5월 1일 육복술이 창간한 <군산민보>입니다.  이 신문은 약 4년 동안 발행되다가 이리(익산)로 옮겨가죠.  제호도 <삼남일보>로 변경하고 사주도 육영술로 바뀝니다.  그 후 <삼남일보>는 제호와 사주가 몇 차례 바뀌고, 사옥도 전주로 옮겨 가는 등 혼전을 거듭하다 1973년 6월 전북 도내 일간 지방지 3사 통합(전북일보, 호남일보, 전북매일)으로 영원히 사라집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고향 군산에서 살짝 비켜간 나필성은 1953년 <경제일보> 정치부 기자로 서울에서의 기자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평화신문(대한일보) 기자, 연합신문 국회 출입기자(기자단 간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아내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기도.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당시 동료 기자로 훗날 전라북도 지사를 지낸 이환의 <경향신문> 기자와 문공부 장관을 지낸 <한국일보> 이원홍 기자를 꼽았다.

 

30대 초반의 나필성은 196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경향신문>, <대한일보> 주일 특파원으로 지내면서 학업에도 열중하여, 1963년 3월 명치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나필성은 1970년 <대한일보> 외신부장, 편집부 국장을 거쳐 10년 남짓 동안 일본 <중외일보> 서울 특파원을 지냈다.  1991년 군산으로 내려와 <서해신문> 주간, <제일경제신문> 편집국장, <전북일보> 동경 특파원, <전북매일> 주간(主幹) 등으로 고향의 언론발전에 기여했다.  20여 년 전 공식 언론인 생활을 마감하고, 팔순 중반이 된 지금도 프리랜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나필성.  시원한 웃음이 매력인 그는 “고향의 향수가 묻어나는 정감어린 글로 독자들을 찾아가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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