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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 왜놈들 감으로 차례 지내믄 안되쥬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2.10.01 12:00:33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민족의 명절 추석(秋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짙푸르기만 하던 산과 들은 하루가 다르게 노란색으로 변해간다.  따가운 햇볕에 벼들이 영그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웃집 텃밭의 수수와 들녘의 벼들은 천둥과 폭우의 나날을 견디면서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허수아비 아저씨들이 바람 따라 춤추는 황금 들녘은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부르다.  단물이 오를 대로 오른 과일들이 계절의 전령사처럼 시장에 나오면서 추석이 임박했음을 알린다.  그중 고향의 맛으로 알려지는 감(柿)을 빼놓을 수 없다.  붉게 익은 감은 예나 지금이나 조상의 제사나 명절 차례 상에 빠지지 않기 때문.  특히 '먹시'로 불리는 재래종 감은 가을운동회와 가을소풍을 상징하는 과일로 가슴을 설레게 했다.

  

 ‘열두 냥짜리 인생’들이 즐겨 찾았던 감독 골목

아련한 추억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머리를 스치는 대명동 ‘감독'(감도가)을 오랜만에 찾았다.  양키시장과 이웃하고 있는 감독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추석이 가까워지면 독에서 방금 우려낸 감들이 흰 거품을 품어내며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학교를 오가며 달콤새콤한 냄새에 군침을 흘리고, 감 썩는 냄새에 코를 막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름만 들어도 정겨움이 묻어나는 '감독', 50~60년대에는 춘천주조장을 시작으로 고물상, 튀밥 집, 떡장수, 해장국집, 선술집이 즐비해 ‘열두 냥짜리 인생’(지게꾼, 노동자)들이 즐겨 찾았다.  그러나 60년대 후반부터 색시집이 하나둘 들어서더니 70년대 이후에는 화장을 짙게 한 아가씨들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오우~빠 한 잔 하고가잉!" 하며 팔을 잡아끄는 골목으로 변해 주민들이 하나둘 동네를 떠났다. 

 

60년대 초까지 감독은 구시장 남문 쪽에서 들어오는 입구가 닭, 오리, 염소 등 가축을 파는 ‘닭 전’이었고, 그곳에는 둥그런 양철통을 짐자전거에 싣고 다니는 해삼장수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멍게는 해삼을 사 먹지 않아도 맛이나 보라며 서비스로 주었다.  점잖은 척하면서 신사 티를 내는 얄미운 손님은 멍게를 기술적으로 다뤄 양복에 물이 튀기게 했다는 해삼장수 아저씨 말을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경매를 불리는 광경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감독은 타지에서 감을 사러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며 땅바닥에 감을 5~10개씩 쌓아놓고 손님을 부르는 행상들과 배달꾼, 구경꾼 등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런데 지금은 흥청거리던 예전 모습은 사라지고 유흥가 간판들만 덩그러니 매달려 있어 허전함을 더한다.

  


"머 헐라고 쓰잘띠 없는 것들을 물어보쇼, 왔으믄 감이나 사가시지···."

경제발전과 함께 아이들 간식이 다양해지는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인스턴트식품으로 불리는 가공식품이 인기를 얻자 감 수요가 차츰 줄어들어 지금은 적막이 흐를 정도로 썰렁해진 감독.  한 때 행상을 포함 수백을 헤아렸던 상인들이 모두 떠나버려 황량해진 감독을 50년째 지키는 윤귀섭(72) 할아버지를 만났다.  "감독에서 장사 몇 년 하셨어요?"라고 묻자 "사십 년은 넘었을 거요!"라고 답하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스물한 살에 시작혀서 지금 칠십이 넘었응게 50년도 더 됐겄네 그려!"라며 표정이 바뀐다.  불그레한 얼굴에 골 깊은 주름들이 녹록지 않게 느껴지면서 감과 함께해온 70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윤 할아버지는 "머 헐라고 쓰잘띠 없는 것들을 물어보쇼, 왔으믄 감이나 사가시지···."라며 못마땅해 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  감은 어떻게 우려내는지 과정을 알아보러 왔다고 사정을 얘기하니까 하나씩 설명해준다.  윤 할아버지는 수십 년 쌓아온 노하우로 감 우려내는 기계를 개발해서 집에 설치해놓고 있었다.

 

“옛날 뱃사람들은 감을 가마니띠기로 사갔쥬!” 

아이들이 과자보다 과일을 더 좋아하던 옛날에는 추석이 가까워지면 감을 사러오는 사람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렸다고 한다.  감을 하나둘 세서 팔았기 때문이었다.  윤 할아버지는 하루에 한 트럭씩 팔았고 재수가 좋은 날은 두 트럭도 팔았다며 잠시 회상에 잠기더니 요즘 아이들은 입맛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냥 줘도 먹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래는 윤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 

 

맥군_ 옛날에는 도시보다 시골 사람들이 감을 더 좋아했던 것으로 아는데 요즘은 어떤가요?

감은 벼 벨 때가 젤 맛있쥬. 타작이 시작되는 10월쯤 되믄 한 사람이 서너 접씩 사가고 혔응게유. 낫질 허다가 허리 아플 때 논바닥에 앉아 쉬면서 먹는 감이 최고로 달고 맛있다고 헙디다. 근디 요새는 촌 양반들 얼굴 보기도 어렵더라고유.

 

맥군_ 그래도 추석 대목이니까 다른 때보다 수입이 좋을 것 같은데요?

한 접(100개)에 5만 원씩 파는디 손님이 없어유. 그전 같으믄 포대를 한두 개씩 들고 나래비 섰어야 허는디 무시헌 날(평일)만도 못허잖유. 허기사 이렇게라도 쪼꼼씩은 벌쥬. 추석 대목을 전후혀서 한두 달 허는 장사니까 일 년에 칠팔백만 원 버는디 그거 가지고 먹고나 살겄어유? 다행히 새끼들이 커서 지들 입막음은 허니까 걱정은 없지만서두···.

 

윤 할아버지는 시골 사람들 발길이 끊긴 이유를 인스턴트식품에 길들여진 입맛의 변화에 따라 줄어든 감농장과 출하량을 꼽았다. 옛날에는 감 농사를 짓는 농가가 많았는데 사람들 입맛이 변하면서 감 농가는 물론 출하량이 1/10 정도로 줄었기 때문이라는 것.

 

 

 맥군_ 감 장사 오십 년 하셨으니까 돈도 많이 버셨겠네요?

벌기는 멀 벌어유. 옛날에는 너도나도 허자고 달라드니께 먹자 헐 것이 있었간듀. 하루에 두 트럭씩 팔기도 했지만, 먹고 살기만 혔지, 실속은 없었어요, 그런디 지금은 다 떠나고 나 혼자니까 그때보다는 조꼼 더 벌기는 허지유. 그렇지만 그거 가지고는 맨날 쪼달려유.

 

맥군_ 뱃사람들도 감을 좋아했던 것으로 아는데요?

그럼유. 농사짓는 사람들보다 더 좋아혔쥬. 옛날이는 전주, 대천, 부여, 대전서도 와서 사갔어유. 지금도 멀리서 택배로 보내달라고 전화허는 사람이 있는디, 그것만 보고는 장사 못 허쥬. 그리고 조곰(조금)때쯤 되믄 뱃사람들이 '양키시장'으로 옷 사러 왔다가 적게는 다섯 접, 많게는 열 접씩 가마니 띠기로 사갔쥬. 열 접이믄 낱개로 1000개니께. 징그랍게 많이 먹은 거쥬.

 

윤 할아버지는 단감(홍시)보다 '먹시'를 좋아했던 뱃사람과 농민들이 진정한 애국자이고 감 맛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단감은 일본 종자이고, 먹시는 순수 토종이기 때문이란다.  얘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아자씨, 이건 안 뜨른 감인 게 잡숴보셔유!"라며 때깔 좋은 홍시 하나를 덥석 집어 준다.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잘 익은 감이어서 얼른 받아먹고 싶지만 “조금 있다가 먹을게요.”라며 사양한다.  윤 할아버지는 시사에도 관심이 많고 해박하며 민족의식도 대단한 것 같았다.  살림이 넉넉해지면서 아이들 입맛도 변해 장사가 안 되는 것이야 그렇다 치지만, 사람들이 단감을 제사상에 올리는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맥군_ 단감을 제사상에 올리면 안 되나요?

그르믄유. 단감은 일본말로 '아끼다마'라고 허는디, 추석 차례를 왜놈 감으로 지내믄 안 되쥬. 토종감 놔두고 왜들 그러는지 몰로겄어유, 알고도 그러는지, 몰로고 그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감을 명절 날 조상님 차례상에 올리는 게 아니쥬! 왜놈 감을 차례상에 올리믄 선조들이 어치께 생각허겄느냐고유.

  

 감독 지켜온 50년 세월, 그래도 후회하지 않아

어렸을 때 지나다니면서 보면 감을 째보선창 젓 탱크처럼 큰 독에서 우려내던데 그 탱크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니까, 껄껄 웃으며 "탱크는 지금도 남어 있지유, 일로 오셔 봐유!"라며 앞장서는 윤 할아버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 한쪽 허름한 창고에 둥그런 비닐통 하나가 놓여있었다.  벽에는 전깃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윤 할아버지가 전선을 이으니까 빨간 글씨로 '26'이 보이고 통의 물도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검은 액정판에 숫자로 표시되는 전자시계를 처음 봤을 때처럼 신기하다.  윤 할아버지는 자신이 만든 기계라고 자랑하듯 알려주며 감 우려내는 과정을 설명해주었다. 

 

"이렇게 전기를 이으믄 26도가 표시되는디, 감을 우릴 때는 조꼼 올려서 36도로 놔요. 그 아래로 내려가믄 자동으로 꺼지면서 감에 들어 있던 떨븐 맛이 빠지쥬. 그리고 서리가 내릴 때쯤 되믄 감도 힘이 빠져서 33도밖에 안 나가니까 그때그때 온도를 적절하게 맞춰서 우려내야 헙니다. 물을 너무 뜨겁게 허믄 감이 익어버리닝게···." 

 

감독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  그때는 시멘트와 블록으로 쌓아 감이 한 트럭도 더 들어가는 대형 탱크에 우려냈는데, 지금 것들은 해방 후에 만들어진 것이며 옛날에 만들어진 대형 탱크는 쓸모가 없어져 덮어버렸다고 한다.  윤 할아버지는 설명을 마치며 "감독을 지켜온 50년 세월을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감장사만 허니께 빡빡허고 답답하다“며 허허롭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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