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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의 이 짜릿함을 아느뇨...참외서리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2.08.01 15:53:47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여름이 되면 질펀하게 펼쳐지는 갯벌과 참외밭, 동네 노인들이 시조를 읊던 원두막을 하루도 빠짐없이 보고 자랐다. 그래서 ‘참외밭’과 ‘서리’는 코흘리개 시절의 정겨운 장면이 가장 많이 보관된 추억의 앨범이자 창고이기도 하다.  

 

‘중동 경마장’으로 불리던 참외밭. 옛날에는 강둑보다 훨씬 낮았는데 흙으로 돋우었다.

 

태어나서 자란 고향 군산시 중동에는 강둑을 경계로 한쪽은 질펀하게 펼쳐지는 금강의 갯벌, 한쪽에는 동대문운동장보다 넓은 경작지(밭)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군산경찰서 기마대가 훈련받던 곳으로 해방(1945년) 후에는 사람들이 여름엔 참외와 수박을 가을에는 김장 채소를 가꿔 먹었다. ‘중동 경마장’으로 불리던 경작지는 강냉이죽과 보리죽으로도 배를 채우기 어려웠던 동네 아이들에게 하늘이 내려준 축복의 장소였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이틀이 멀다고 놀러다녔던 갯벌과 이웃하고 있어 서리에 최적지였기 때문. 서리하다 들키면 갯벌로 도망가 강으로 뛰어들었다. 서리는 항상 아랫도리를 벗고 시작했다. 밭에는 인분을 가득 담아놓은 거름통(똥통)이 몇 곳 있었는데 이제는 코를 찌르던 인분 냄새도 원두막의 운치와 함께 추억의 향기로 변했다.
 

 

70년대 원두막에서. 배경은 군산시 성산면 오성산 아래 ‘성덕마을’

 

동네 정자 노릇도 했던 원두막 

당시 농사꾼의 일터 참외밭은 넉넉한 인심이 묻어났다. 특히 원두막은 동네 어른들이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대화를 나누며 삼복더위를 피하는 장소였다. 기둥 4개를 세워 보릿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올리고, 판자나 통나무로 높게 바닥을 만든 원두막은 사방으로 트여 시원하기가 그만이었다. 참외밭을 지키는 초소였던 원두막은 동네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이 장기를 두거나 시조를 읊는 정자 노릇도 하였다. 

 

우리는 갯벌에서 놀다가 허기를 느끼면 서리에 나섰다. 단 냄새를 풍기는 참외는 꼭지를 따서 릴레이 할 때 바통을 넘겨주는 식으로 갯벌로 옮겼다. 숨어서 망을 보던 아이들은 성공을 확인하고 달려와 참외 잔치를 벌였는데 성취감이 더해져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친구들 나이는 열두서너 살로, 잘 익은 참외와 수박을 찾겠다고 밭을 헤집고 다니면 남의 농사를 망친다는 것쯤은 알았다. 주인에게 들키면 담뱃대로 맞거나 아버지에게 연락되어 혼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성공했을 때의 쾌감과 달콤한 맛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달밤에 하는 참외 서리는 스릴 만점이었다. 보름달이 뜨면 시원한 강둑에 모여 서리를 모의했는데 경비조, 연락조, 서리조 등 제법 체계가 있었다. 동네 ‘깽바리’(꼬마) 대장은 나보다 여섯 살 많은 ‘동선이형’. 서리를 할 때마다 참여해서 지휘봉을 잡았던 그는 거름통과 잘 익은 참외가 어느 근방에 많이 있는지 꿰고 있었다. 경비조는 망을 보면서 주변의 낌새를 살폈고, 연락조는 양쪽을 오가며 긴급 상황이나 참외를 따면 어디로 가져오라는 등 경비조의 말을 전달했다. 참외밭 주인이 원두막에 있어 큰소리를 치지 못하기 때문에 쉿속말, 아니면 손짓 발짓으로 통했다. 바람이 풀잎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는 고요한 밤이어서 더욱 조심해야 했다. 서리조는 글자 그대로 행동대원으로 얼굴에 개흙을 바르고 훈련병이 낮은 포복을 하는 폼으로 강둑 아래로 내려갔다. 전장으로 떠나는 용사들처럼. 나도 동선이형을 따라 항상 서리조에 끼었다. 거름통에 빠질 것을 대비해서 팬티도 입지 않았는데, 생각할수록 넉넉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추억들이다. 

 

서리 얘기가 나오면 마음에 걸리는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수박서리를 할 때인데 깨 보면 안 익었고, 또 따서 깨뜨려보면 안 익었고 해서 그날 밤 버린 수박만 해도 다섯 개는 되었다. 혼자도 아니고 6~7명이 헤집고 다녔으니 수박밭이 성할 리 없었기 때문. 도둑도 양심이 있다지 않은가.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오는 추억도 있다. 서리하다가 주인에게 들키자 모두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을 쳤다. 그런데 몸이 굼떠 평소에는 경비조로 망이나 봐주던 옆집 친구가 서리에 참여했다가 들키자 뒤를 돌아보며 도망치다 거름통에 빠졌던 것. 그때는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늦가을부터 봄까지는 집집을 다니며 인분을 거둬다가 밭고랑 사이에 파놓은 구덩이에 담아놓았다. 빠지면 ‘똥독’이 오른다며 무서워했던 구덩이에 빠졌으니 모두 집에서 치도곤을 당한 것은 물론 며칠은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지금도 귓전을 맴도는 말“느떨이 어치게 익은 참외를 찾겄냐….” 

당시 참외는 순수 토종으로 껍질이 녹색이었다. 익으면 속이 짙은 황토색으로 변했고, 달콤한 냄새가 진동했다. 개구리참외도 녹색이었는데 크기가 작고 수박처럼 껍질에 선이 그어져 일반 참외와 구분되었다. 당시에도 간혹 노란 참외가 보였는데 어른들은 ‘김막가’(왜놈 참외), 혹은 ‘나이롱 참외’라고 했다. 서리하다가 붙잡힌 우리를 원두막 아래에 앉혀놓고 “느떨이 어치게 익은 놈을 찾겄냐, 참외밭 망치지 말고 먹고 잡으믄 원두막으로 와서 말을 혀라, 그르믄 내가 먹을 만치 따다 줄팅게···”라며 혀를 차던 아저씨의 주름진 얼굴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서리를 하다가 들켜 혼쭐이 나면 며칠 동안 자숙하며 지냈는데, 낭패감으로 서리할 용기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었다고 하는 게 바른 표현일 것 같다. 며칠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희희덕거리며 다시 모였으니까. 

 

 

먹음직스러운 토종 참외

 

여름방학이 끝나는 8월 중순쯤. 무더위가 고개를 숙이면, 김장 배추와 무를 심으려고 여름 농작물을 거두었다. 그때도 어김없이 참외밭을 찾았다. 퇴비로 사용할 줄기를 옮기다 보면 작지만 빨갛게 익은 참외와 수박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삼복(三伏)더위가 기승을 부리니 서리하러 다니던 고향 친구들이 더욱 그립다. 지금쯤은 모두 손자·손녀 재롱을 보며 행복해하는 할아버지가 되었을 터. 원두막도, 참외밭도, 똥구덩이도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강둑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시원한 강바람을 가슴에 품으며 거닐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강둑에서 바라본 금강의 갯벌, 갈대숲이 모두 사라져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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