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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알면 다른 지역 명소도 피부로 느껴져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2.06.01 17:07:12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일제는 평온했던 군산을 반세기 가까이 착취와 수탈을 일삼으며 짓밟았다. 군산으로 부족함을 느낀 일제는 기름진 호남을 짓밟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삼천리 강토를 짓밟았다. (기자 주)

 

 


 

옥구군 북면에 속했던 작은 포구 군산(群山)은 1899년 5월 1일 굳게 닫혀 있던 빗장을 풀었다.  강화도조약(1876) 이후 개방, 즉 국제무역의 필요성을 절감한 대한제국 정부가 개항을 단행한 것.  그러나 비옥한 농지로 둘러싸인 군산은 개항과 함께 일본인이 밀물처럼 몰려왔고, 수탈의 비극은 그때부터 기록되기 시작한다.  다른 항구와 달리 군산은 우리 스스로 문을 열 필요가 있었다.  개항 당시 군산의 일본인 거주자는 77명.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인들은 청국 및 여러 나라 상인들과 함께 서해 연안과 금강 수로를 따라 밀무역을 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그들을 감시하고 규제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당시 법으로 일본인들은 불법거주자였던 것. 

 


 

일본인에 의해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의 도시가 된 군산(群山)

군산IC 관광안내소 원영금(55) 일본어 통역사는 “군산 개항은 무력으로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일본을 방치하면 훗날 ‘전관조계지’로 요구할 것 같으니까, 대한제국 정부가 대비 차원에서 ‘공동조계지’(각국조계지)로 정하는데 당시 국제정세로 볼 때 개항을 해야 할 처지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군산은 일본의 요구로 개항됐다는 의견과 자주적인 개항이었다는 의견으로 갈리는데요, 분명한 것은 대한제국 정부가 결정했다는 것이죠.  물론 개항을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개항하면 물동량이 많아야 하고, 그에 따른 수익이 있어야 하는데 서울과 멀리 떨어진 항구였으니···.  어쨌거나 그냥두면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를 배후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군산의 개항을 일본이 요구할 때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으니까 결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일본인들이 주인 노릇 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았지요.” 

 

대한제국 정부는 국제무역항으로 첫발을 내디딘 군산(옥구)에 감리서와 경무서(경찰서), 재판소, 세관, 우편사(우체국) 등 근대적 행정사무 기관을 설치한다.  모두 개항장을 관리하려는 조치였다.  그러나 새로운 무역과 제국주의의 경제적 수탈방식 등에 무지했던 정부는 미·일 화친조약(1854)을 학습효과로 전략 전술을 갖추고 있던 일본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개항 당시 군산의 조계지 총면적은 572.000m²(약 17만 3천 평)로 지금의 해망동, 영화동, 장미동, 영동, 중동, 중앙로 1가 지역이다. 주거용지는 336.669m²(약 10만 2천 평)이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조계지 밖으로 강제로 이주당하고, 시가지는 운영권과 경매권을 장악한 일인들이 차지한다.  조선 땅에서 일인에 의해 일인을 위한 일인의 도시가 조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와세다 대학 시가(志賀) 교수는 1907년 쓴 <조선여행기>에서 “개항(군산) 이래 조선인들이 낮잠 자는 사이에 일본은 대거 세력을 확장하였다”며 “5월 1일 개항 8주년 기념식을 했는데 일본이 어떻게 장족의 발전을 달성했는가 생각하니 군산항은 금강, 동진강, 만경강 유역에 닿아 있는 30만 정보 대평원의 문전(門前)이었다.  그뿐 아니라 넓은 농경지의 1/10은 이미 일본인 소유가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김중규의 <군산 역사이야기> 205쪽 참고)  땅장사로 배를 불린 일제는 삼남 각지의 기름진 쌀을 빼 가기 위해 군산을 수탈의 전진기지로 삼는다. 이와 함께 기름진 농지와 노동력을 착취하고 내항에서는 ‘부잔교’를 설치하는 축항공사가 1, 2, 3, 4차에 걸쳐 이루어진다.  부잔교는 조수(潮水)의 변화에 따라 오르고 내리고 한다 해서 ‘뜬다리’로도 불리었다.  부두와 철도변에는 가등, 조일, 조선, 화강, 낙합 육석 등 수많은 대형 정미소와 창고를 짓기 시작한다. 따라서 ‘정미소 거리’도 등장한다.  3차 축항공사 기공식(1926년 6월)에 참석, 부두에 산더미처럼 쌓인 쌀을 만족스럽게 바라본 사이토 마사코(齊藤實) 총독의 외마디 탄성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은 일본의 수탈이 절정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치욕적이고 암울한 역사의 흔적이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내항(內港)엔 근대 역사박물관과 진포 해양테마공원이 조성되어 항구의 기능보다 역사문화공간으로, 각종 탐방관광지로 더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대형관광버스가 자주 보이고, 오가는 이들도 카메라를 걸친 외지 방문객이 대부분이다.  주로 일본인을 상대로 군산의 역사와 명소를 안내하는 원영금 통역사는 “군산의 명소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거나 사무실로 찾아오는 국내외 손님을 안내할 때마다 ‘내항’과 ‘구암교회’, ‘동국사’는 빼놓지 않는다”며 “각기 깊은 의미가 담긴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군산 사람은 군산을 알아야 다른 지역 명소도 피부로 느낄 수 있어··.”

하얀 솜털 구름이 평화롭게 떠가는 내항을 뒤로하고 호남 기독교 요람으로 알려지는 ‘구암동산’으로 이동했다.  구암동산에는 1899년 의료선교사 '드루'(A, D, Drew)와 '전킨'(W. M. Junkin)이 호남 최초로 세운 ‘구암교회’와 2008년 개관한 ‘삼일운동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1919년 군산에서 일어난 3·5 만세운동과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기념관에 들어선 원영금 통역사는 지역 역사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 즉 서울의 역사가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으로 배웠고, 경주(慶州)나 전주(全州)만 한국적인 도시로 알았습니다.  군산의 역사를 따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실제로 군산은 석기시대 유물과 무덤이 출토될 정도로 역사가 깊고, 산수가 수려한 아름다운 도시거든요.  그런 뜻에서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삼일운동기념관)도 무척 중요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3·1 운동 때 호남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3월 5일)이 일어났잖아요.

 

얼마 전 시내 중학생들을 안내하면서 이곳도 왔었습니다.  답사란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의 역사를 보고 느끼면서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잖아요.  그런데 가끔 기독교인 중에 동국사를, 불교인 중에는 구암교회를 안 들어오려고 할 때가 있어 안타깝습니다.  특히 군산 사람은 군산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지역 명소도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특히 ‘내 고장의 역사와 의미를 알아야 다른 지역 명소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는 대목은 가슴을 뜨끔하게 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의 관광객 유치경쟁이 치열한 때여서 그런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선인들의 독립운동사, 군산지역 만세운동 약사, 1910년대 사용하던 성경 등 민족사와 선교역사 관련 자료들을 돌아보고 나와 동국사로 방향을 잡았다.

 

 


 

승병장 벽안스님 혼 담긴 일본식 사찰 ‘동국사’

동국사(東國寺)에 도착한 원영금 통역사는 선뜻 경내로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 했다.  말 못할 상황이라도 발생했는지 의아해서 무슨 일 있느냐니까 빙긋이 웃으며 손으로 오른쪽 기둥을 가리켰다.  손길을 따라가니 색 바랜 시멘트 기둥에 음각된 ‘錦江寺’(금강사)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동국사가 언제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잠시 생각해보겠다는 그의 뜻을 읽는 순간 고개가 끄덕여졌다.  처음엔 군산을 끼고 흐르는 ‘금강’을 사찰 이름에 붙였다는 것.  국사는 대한제국이 사법권을 강탈당하던 1909년(기유각서)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우찌다(內田佛觀) 스님이 군산 외국인 거주지 1조 통에 세운 금강선사(금강사)에서 출발한다.  당시 금강사는 '포교소'였다.  우찌다 스님은 1913년 대농장주 구마모토(熊本利平)와 미야자키(宮岐佳太郞) 등 신도 29명의 시줏돈으로 지금 자리에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한다.  관련 기록이 없어 소문만 떠돌았으나 2005년 동국사 스님들이 범종 명문을 탁본해 밝혀냈다.  대웅전(2003년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일본 불교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처마는 한국 사찰에서 흔하게 보는 단청이 없는 게 특징. 일본에서 가져온 기와를 올렸다는 지붕은 왜장의 투구를 연상시켰다.  흑백의 조화가 으스스할 정도로 담백했으며 100년 전 건물임에도 본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사찰 이곳저곳에서 왜색 냄새가 짙게 풍겼다.

 

 


 

원영금 통역사는 “동국사는 지난 2008년 일본 NHK TV 방송에서 생방송을 두 번이나 했고, <아사히신문> 등 다른 매스컴들도 보도했던 사찰이다”며 “방송을 시청한 일본인들이 실제 모습을 보려고 군산을 많이 찾아왔었다”고 소개한 뒤 설명을 이어갔다.  “대웅전 건물은 정면과 옆면에 창문을 달아놓은 게 특이한데요.  비가 올 때 습기를 빨리 내보내야 하는 일본식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대웅전과 요사채가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대체로 스님들 혼인을 허용하는 일본 불교에서는 법당과 승려 가족들의 생활공간이 한울타리 안에 있거든요.  이름을 동국사로 바꾼 후 일인들이 모시던 불상에 절할 수 없다 해서, 김제 금산사 대장전의 ‘삼존불’을 옮겨 모셨죠.  그런데 얼마 후 금산사는 화재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됐고, 동국사 불상들은 오늘까지 안전합니다.  그리고 세 불상의 몸에서 복장유물 333점이 나와 임진왜란 때 승병장 벽안 각성 스님을 종명법사로 모시고 조성했음을 알게 됐습니다.  이렇게 동국사는 겉모습은 일본식이지만, 불상과 정신은 한국을 품고 있는 특별한 사찰입니다.”  원영금 통역사는 “수탈의 도시로 알려진 군산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3·1만세운동이 일어났고, 1920년대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소작쟁의가 일어났던 저항의 도시이기도 하다”며 “치욕의 역사라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근대사 현장을 찾아 뭔가 느끼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떻겠냐?”는 물음으로 두 시간 동안의 안내를 마쳤다. 

 

 

원영금 일어 통역사는 2009년 10월 30일과 31일 함평엑스포공원에서 열린 ‘제4회 전국 문화관광 해설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경력의 소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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