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gun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홈 > ARTICLE > 사회
(인생 역전) 트럭커 강윤모, “그러나 야구는 포기할 수 없다.”
글 : 최승호 / gsport11@naver.com
2023.12.22 15:21:5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는 트럭커 야구단

클럽 2부 우승 강윤모 감독의 인생 이야기

 

 

군산시장기클럽야구대회 2부리그 최종 결승전이 벌어진 지난 9월의 월명야구장. 역전과 재역전 끝에 1점 차로 감격의 우승을 차지한 트럭커 야구단’. 강윤모 감독은 이 대회에서 감독과 선수를 병행하며 값진 우승을 만든 주역이었다.

야구는 팀워크가 중요하거든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팀원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뒹굴면서 이루어낸 값진 성과여서 정말로 가슴 벅찼어요. 저는 야구 선수로서 제 갈 길을 못 갔으니 사회인 야구에 이렇게 봉사하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이죠.”

사회인 야구 클럽활동을 하는 게 무엇보다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강윤모 감독.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야구를 즐길 수 있도록 운동장 환경을 개선하고 동호인들이 항상 즐거워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언제나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트럭을 모는 사람들 트럭커로 구성된 선수들과 강 감독은 야구사랑과 역전의 명수 정신을 이어 나가 군산 야구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라고 한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선수로서의 꿈은 제대로 꽃피우지 못했지만, 그 사랑만큼, 열정만큼 야구에 대한 애정이 깊고 큰 야구인 강윤모. ‘운전이 아닌 조종이라고 하는 대형특수화물차로 세상을 질주하는 그는 뚝심 인생그 자체이다.

야구 사랑과 트럭 기사의 삶을 이어가는 야구단 트럭커’. 인생의 전부였던 야구를 접은 것을 두고 실패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기회를 얻은 것이라며, 이들과 함께 사회인 야구의 소박한 꿈을 펼쳐가는 강윤모 감독의 야구 인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트럭커 강윤모 감독의 사회인 야구 인생 첫 번째 목표는 트럭커 야구단과 함께 1부 리그로 올라가는 일이다.

 

야구, 운명적인 만남

 

야구는 한순간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초등학교 2학년 1학기 따뜻한 봄날이었다. 중앙초 야구부에 들어갔던 친형이 포기하면서 나 대신 네가 운동하라.’했던 게 발단이었다.

당시 야구단 인원이 적어서 선수 한 명을 가입시키는 조건이었는데 동생이 형 대신 야구를 시작한 셈이었다. 그게 운명이 될 줄이야.

일단 재밌었다. 적성도 맞는 것 같고, 나름 운동신경도 괜찮았던 모양이다. 매일 즐겁게 야구를 배워나갔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도 뒤처지지 않았다. 포지션도 유격수를 맡았다.

야구 재미에 푹 빠져 공부는 자연스레 소홀해졌다. 전교 상위권 성적이 4학년부터 계속 떨어졌다. 부모님은 당연히 운동을 반대하셨다. 그렇게 야구를 그만두려나 고민과 방황도 꽤 했던 것 같다.

학교 야구부장님이 매일 부모님을 설득하러 오셨어요. 완강했던 아버지가 마음을 돌렸고 결국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설득하는 반전이 일어났어요. 다시 유니폼을 입었을 땐 너무나 행복했고 꿈만 같았죠.”

이렇게 그의 야구 인생이 이어졌다. 체구가 적고 약했던 초등생 강윤모. 아버지의 유별난 야구 사랑과 정성으로 몸에 좋다는 음식과 보약을 일년내내 달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대학교에 진학할 때까지도 키도, 체중도 그대로였다.

초등학교 3학년 전국대회 첫 우승을 경험했다. 6학년 때 출전한 전국대회, 예선 첫 경기가 생방송 중계될 정도로 강팀으로 소문이 났다.

그러나 결과는 오마이갓, 80 콜드패를 당했다. 완패였다. 이때부터 그의 야구 인생에 조금씩 한이 맺히게 된 것 같다.

 

10여 년의 운동선수, 갑자기 닥친 시련

 

군산중 야구부로 진학하여 청룡기 대회 결승에 진출했으나 준우승에 그쳤다. 군산상고 1학년 시절 쟁쟁한 선배들 덕에 2차례 우승을 맛봤다. 3학년 동기들은 타격이 월등했고 무조건 다득점으로 이기는 플레이였다.

3학년 때 출전한 청룡기 전국대회 결승전에서 광주일고를 만났다. 9회 말 동점에서 연장 10회 초 한 점을 득점해 32로 리드했으나 10회 말 이종범 선수에게 역전타를 맞고 악송구가 이어져 43.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가 역전패를 당했다.

난리가 났다. 주전선수로 뛰었던 첫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에 그쳤고 졸업한 선배들로부터 무거운 벌과 쓴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부상까지 당해가며 우승을 꿈꾸었던 대회에서 패해 야구에 대한 설움과 한이 더 커졌다.

원광대에 진학했는데 기술적으로는 뒤지지 않았으나 약한 신체조건과 부상으로 체력이 밀렸거든요. 군산상고 3학년 청룡기 대회 8강 경기에서 당했던 허리부상이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열심히 운동했거든요.”

그는 결국 2학년까지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10여 년 동안의 야구 생활을 접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사랑했던 야구를 떠난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못했던 그였다. 한동안 방황했다. 부모님도 힘들어하셨다.

야구에 대한 한과 쓰라린 기억으로 군대 생활도 순탄치는 않았다. 돌이켜보니 야구 없는 인생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았으나 오히려 홀가분한 부분도 있었다.

 

새로운 사업의 시작과 불운, 그리고 또 다른 도전

 

제대 후 냉동식품과 경양식당 식자재를 수입하여 업소에 공급하는 사업을 벌였다. 초짜였으나 이상할 정도로 순풍에 돛을 단 듯 했다. 6년 동안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오래 가진 않았다.

먼저 수입하고 외상으로 시장에 공급하는 사업 구조였다. 외상 수금이 계속 누적되었다. IMF 사태가 터지자 환율 상승 등 여러 가지로 악재가 겹치면서 한 마디로 망했다.

일본으로 건너갈 기회가 생겨 2년 정도 많은 경험과 인생 공부를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 유명한 강경의 젓갈 시장에서 점원 일을 시작했다. 14년 동안 열심히 일을 배우며 성실히 생활했다.

우리나라 젓갈 시장의 70% 정도를 강경에서 공급한다. 그 나머지를 곰소, 광천, 소래 등지에서 유통한다. 그만큼 강경의 규모는 엄청났다.

젓갈을 배우고 판매하면서 터득했던 지식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일하던 가게의 최종 관리자까지 올라간 후 내 사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성격적으로 일을 벌이면 크게 하는 편이라 많은 투자를 했고, 그만큼 사업에 대한 자신감도 강했다.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나자 성공의 꿈을 품고 하루하루 열심히 일했다. 믿어줬던 많은 사람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상품을 제대로 팔았다. 장사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나갔고 강경에서도 제법 소문이 났다. 하루하루가 보람차고 즐거웠다.

 

한순간에 날아간 사업, 그리고 좌절

 

고객을 소개받아 상담했다. 돌려보냈던 일이 빌미가 되어 당시 모 방송사의 먹거리 고발 프로그램에 그의 강경 젓갈 가게가 나오게 되었다. 평생 처음으로 그는 여섯 차례 검찰조사를 받았다.

너무나 억울하여 해당 사건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젓갈협회도 그를 믿고 인정했으나 사태를 해결할 만한 방도가 없었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결말은 정해져 있었고 결국 강경 젓갈 시장의 상인들로부터 원수 아닌 원수가 돼버렸어요. 그들의 원성과 금전적 손해가 물밀듯이 몰려왔고 다른 도리가 없었지요.”

방송에 나왔다는 것이 전부였다. 전국적인 이슈가 된 마당에 강경 젓갈 시장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됐다. 당시 강경의 200곳 젓갈 집 중 무려 120곳이 벌금을 맞았다.

저는 벌금을 단 1원도 맞지 않았어요. 사실이 아님이 증명된 것이죠. 그러나 결과는 같았어요. 사실이 아닌 기획된 덧에 걸린 것 같았고 하루하루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거든요.”

최종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었고 방송국 관계자들로부터 정정보도를 약속받았다. 결국 정정보도도 나오지 않았고 모든 것을 털고 정리할 수 밖에 없었다. 한순간에 허망하게 끝나 버렸다.

 

일장춘몽(一場春夢), 방황 그리고 마음을 다시 잡다

 

망하고 나서 군산으로 돌아오는 길은 서럽고 힘들었다. 강경에서 함열을 거쳐 군산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3시간 정도 빙빙 돌아오는 길. 마치 실패하고 돌아오는 애처로운 그의 인생길 같았다.

화창한 봄 어느 날, 푸른 하늘과 예쁜 꽃들이 활짝 핀 길을 차창 밖으로 내다보고 있었죠.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던 길을 잃어버린 채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던 내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 후로 7개월 정도를 방황하며 막걸리를 많이 마셨다. 그리고 추운 겨울날 친한 분의 장례식장을 걸어갔다 오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다짐했다. 사람 구실을 해야겠다. 일을 해야겠다. 이대로 갈 수는 없다는 절박함이 생겼다. 형의 소개로 트럭 운전기사를 만나고 대형면허를 땄다. 10년 전이다.

트럭으로 전국을 다니며 제일 좋았던 건 어디를 가도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패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군산 외항 공단에서 물건을 싣을 때나 서울 등 객지에 도착해서도 아는 척이라도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밤낮으로 혼자 운전에 집중하면서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됐다. 몇 차례의 인생 좌절을 거치던 인간 강윤모에게 거침없이 애정을 퍼붓는 부인도 운전기사 생활 중에 만났다. 아내를 만난 건 행운이다. 모든 게 제자리를 잡아가고 안정돼 갔다.

 

내 인생의 동반자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닫기
댓글 목록
댓글 등록

등록


카피라이터

주소 : (우)54020 전북 군산시 절골3길 16-2 , 출판신고번호 : 제2023-000018호

제작 : 문화공감 사람과 길(휴먼앤로드) 063-445-4700, 인쇄 : (유)정민애드컴 063-253-4207, E-mail : newgunsanews@naver.com

Copyright 2020. MAGAZINE GUNSAN. All Right Reserved.

LOGIN
ID저장

아직 매거진군산 회원이 아니세요?

회원가입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잊으셨나요?

아이디/비밀번호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