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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는 쌀 창고, 해방 후에는 비밀 댄스홀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2.05.01 12:28:14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성산, 임피, 대야 등지에서 군산항 ‘뜬다리’(부잔교) 구경하러 나온 노인들이 부두에 정박한 1만 톤급 화물선을 보고 놀라면서 “쇠는 쇤디 워째 물에 동동 뜬다냐!”라고 했다는 말이 우스개로 회자되던 시절 찍어두었던 사진에 담긴 이야기. 

 

1974년 12월 어느 날 고향집 골목 입구에서 촬영한 사진. 지금도 형님이 살고 있다. 

 

위 사진은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1974년 겨울 어느 날 필자가 자란 고향동네 골목 풍경으로 서울, 인천, 충남 광천에서 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왔던 손님들이 장항선 열차를 타기 위해 군산-장항 나루터(도선장) 배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는 장면이다.  

 

일제 수탈의 흔적 느껴져

38년 전 골목 풍경이지만, 사진에 담긴 사연은 무궁무진하다.  정면과 좌측의 벽돌 건물은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여 부두에 쌀가마가 산더미처럼 쌓이던 시절(1932)에 지어진 가등정미소(加藤精米所) 쌀 창고로, 뼈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비옥한 농지와 노동력을 일제에 착취당했던 조선 백성의 땀과 피눈물이 배인 건물이기도 하다.  삼남 각지에서 실려 온 쌀을 저장했던 창고는 이곳을 기점으로 째보선창, 죽성동, 장미동을 거쳐 월명공원 아래 금동까지 태백산맥 줄기처럼 뻗어 나갔다.  훗날 술 원료인 주정과 플라스틱, 최루탄 원료를 만드는 공장 외에도 1950~1960년대에는 비밀 댄스홀, 태권도 도장, 강냉이와 밀가루 배급소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니 소설 한 권 분량의 사연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일제 때 골목동네 명칭은 ‘일출정(日出町)’이었고 ‘일출동(日出洞)’으로도 불리다가 해방 이후(1946년) ‘금암동(錦岩洞)’으로 바뀌었다. 오른쪽 집들이 대부분 정미소 직원 사택이었으니 한때는 ‘게다짝’(왜나막신) 소리가 요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마다 안방에 설치되어 있던 ‘오시이래’ 비슷한 벽장이 일본인 직원들이 살았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정미소 직원은 거의 일본인이었으며 조선인 노동자나 ‘미선공’(쌀에서 이물질을 고르는 여공)들은 부근 산꼭대기나 중동(스래)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중앙초등학교 운동회(1946). 
멀리 보이는 가등정미소 건물도 운동장도 흔적 없이 사라져 추억을 더욱 그립게 한다. 

 

사진을 찍은 자리에서 몸을 돌리면 공설운동장이고, 건너에는 피난민촌과 돌산(石山)이 있었다.  국경일 행사, 운동회, 축구경기, 영화, 서커스 등 다양한 행사와 공연이 자주 열려 ‘종합예술의 전당’으로 불리던 공설운동장은 철길을 경계로 공설시장(구시장)과 이웃하고 있었다.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있는 창고이지만, 여름에는 효자 노릇을 했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더위를 피했기 때문이었다.  째보선창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은 최고의 자연풍이었으며 대나무 평상에서 된장에 비벼 먹는 꽁보리밥은 꿀맛이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주정 원료로 쓰이는 고구마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드나들었고, 창고가 모자랄 때는 공설운동장에 미로게임장처럼 쌓아놓아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배고플 때는 고구마 찌는 냄새가 얼마나 달콤하고 고소했는지 모른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가등정미소(한국주정 시절). 굴뚝 좌측으로 움푹 파인 곳이 째보선창이다. 

 

 

한때는 비밀 댄스홀이었던 쌀 창고  

마주 보이는 창고 아래층은 1960년대 초 미국의 원조로 들어온 잉여농산물을 나눠주던 배급소였다. 도로공사 등에 나가서 일하면 일명 ‘딱지’를 나눠주었고, 그 딱지를 모았다가 밀가루와 강냉이 등을 타 먹었다.  밀가루를 뒤로 빼돌리다 교도소 신세를 졌던 강씨 아저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창문이 달린 2층은 바닥에 타일이 깔려 비밀 댄스홀로 이용되기도 했다.  밤이면 양복·양장 차림의 춤꾼들이 짙은 향수 냄새를 풍겼는데, 정비석의 소설과 영화로도 만들어진 <자유부인>으로 떠들썩했던 50년대 중반 사회상을 축소해서 옮겨놓은 듯했다.  여름에는 갈 데 없는 건달들이 초저녁부터 춤 연습을 하거나 창문에 걸터앉아 노닥거렸다.  하루는 18세 꽃순이였던 셋째 누님이 빨래하는 마당을 향해 휘파람을 불어대다 아버지에게 된통 혼나기도 했는데 마담이 찾아와 잘못을 비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양복을 걸친 아저씨가 유성기(축음기) 가방을 들고 오가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홀 천정에는 색색의 불빛을 발하는 둥그런 샹들리에가 돌아갔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불빛을 보려고 계단을 살금살금 올라가다가 마담에게 들켜 혼나던 기억도 새롭다.  늦은 밤에는 골목에서 댄스홀 마담과 제비(?)들이 다투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곤 했는데 항상 마담의 승리로 끝났다.  얼추 꼽아보니 카리스마가 넘치던 미인 마담도 지금쯤은 손자, 손녀 재롱을 지켜보며 세월을 낚는 팔순 꼬부랑 할머니가 됐을 것 같다.  아~ 옛날이여!

 

 

최근까지 있었던 정문과 경비실(우측). 가등정미소 시절부터 정문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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