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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대곤 수필집_고속버스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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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1 14:11:40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산 너머 산이라고 했던가? 유류파동으로 난로공장이 부도나고 정신없이 헤매다가 재기해 보겠다고 다시 시작한 장사가 무연탄 장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연탄파동이 일어났다. 재벌 놀음도 아니고 개 코딱지만한 가게로 장사동하는 놈이 무슨 파동 핑계가 그리 많은 거냐고 나를 보고 비웃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일 년 전에는 석유가 없어 곤로가 고철이 되더니 이번에는 또 연탄이 비싸서 화덕이 개떡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재수가 없는 나라는 놈은 꼭 파동이 나서 탈이 붙을 쪽만 쫓아다니면서 돈을 벌어 보겠다고 몸살을 앓고 다닌 것이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더라도 조금만 더 참고 공장에 쌓여 있던 석유곤로를 끌어안고 있었으면 큰 이익을 남길 수도 있었을 텐데 한치 앞도 못 보는 나는 급한 마음에 석유제품을 팽개치고 석탄을 쫓아간 것이 화근이었다. 하느님도 내 편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다시 석탄을 품귀  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일 년 전 보문산에서 얼어 죽지 않은 나는 이튿날 새벽 다시 완행열차를 타고 군산으로 돌아왔다. 뭔가 사업을 해서 빚쟁이들의 성화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다시 시작한 것이 무연탄 장사였다. 유류파동으로 연탄 사재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연탄 공급 이 부족할 때였다. 그때 연탄의 합격 열 칼로리는 사천오백 칼로리였는데 원료인   수입탄은 육천 칼로리나 되었다. 할 수 없이 삼천 칼로리 정도의 국내 저질 무연탄을 배합해서 십구공탄을 찍어냈는데 충남 광천 근방에서 생산하는 저질탄을 소규모 연탄공장에 트럭으로 납품하는 영업이었다. 처음에는 어렵게 시작했지만 전에 약장사를 해본 나는 영업쪽엔 이골이 나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공장은 수동식으로 연탄을 찍는 변두리의 형제연탄이었는데 더듬거리고 찾아간 내게 사장은커녕 공원들까지 비웃음을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중개상치고는 나이도 어렸지만 저질탄을 공급하겠다고 연탄공장으로 찾아온 내 몰골이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매고 갔으니 미친 놈 취급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신이 든 나는 다음날, 때 묻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삶은 돼지고기에 소주병을 들고 갔다. 이번에는 웬 미친놈인가 하더니 넉살좋게 덤벼드는 내 술잔을 슬그머니 받아들었다. 우리 는 탄 더미 위에 질펀하게 앉아 체내의 먼지를 삭여 준다는 돼지고기 비계를 씹어대면서 허연 이빨을 내놓고 손가락질로 낄낄댔다. 어느새 나도 그들과 똑같은 깜둥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며칠 전 비웃음으로 나를 대하던 사장까지도 자신의 공원이나 다름없는 나를 싫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더니 급기야는 내게 납품을 허락하고 말았다. 결제 조건도 현금이라는 꿈같은 소리 를 듣고 한달음에 광산으로 달려간 나는 기세 좋게 저질탄 한 트럭을 싣고 달려갔다. 

하지만 나는 하역 작업을 하기도 전에 또 거절당해야 했다. 그날 아침 무연탄 파동 뉴스가 나왔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탄 더미 위에 널브러져 앉은 나는 너무 기가 막혀 울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파동이 나는 쪽만 쫓아다닌 셈인지 참으로 내가 생각해도 한심했다. 무연탄 값이 문제가 아니라 몇 푼 안 되는 트럭 운임 때문에 또 멱살을 잡혀야 할 판이었다. 뿐만 아니라 간신히 회복되어 가고 있던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를 어떻게 벗어날지 난감하기만 했다. 나는 또 외톨이에 술 한잔 값을 걱정하는 거지가 되고 말았다. 술값은 커녕 담뱃값도 없어서 길가의 꽁초라도 주워서 피워야 할 형편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올 때 집사람에게 용돈이라고 천 원짜리 한장을 받아들고 나서면 대문을 등질 때부터 갈등을 느껴야 했다. 담배 한 갑을 통째로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부터 누굴 만날지를 먼저 계산해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 갑을 사고 나면 남은 돈이 칠백 원인데 커피 두 잔 값도 채 못 되는 돈이었다. 우유값은 더 비쌌지만 사나이가 커피 두 잔 값도 없이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 아닌가. 그래도 재수 좋은 날은 괜찮은 친구라도 만나서 넉살 좋게 대포라도 한 잔 얻어 마시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대개는 그 좋아하는 술 한잔 마시지 못하고 맨숭거리다 보니 세상 모든 일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짜증을 삭일 일이 없을까 연구를 하다 생각난 것이 고속버스였다. 무더위까지 기승을 부리는 것이 부아가 치밀어 냉방된 고속버스를 타 보니 한결 시원했다. 그 무렵 고속버스는 호화판이었다. 호남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출발한 고속버스가 비행 기만큼 신기할 때였으니 안내양이 마이크로 차창 밖 풍경을 설명도 해 주고 사탕 따위는 공짜였다. 무더위 속에서 하루 종일 짜증을 부리느니 차라리 고속버스를 타고 시원한 냉방 속에서 잠을 자는 게 편할 듯했다. 아침에 출근하듯 고속버스를 타고 조는 듯 잠을 자다가 동대문 터미널에 내리면 점심때가 된다. 시장 안을 기웃거리다가 허름한 국밥집에서 소주 한 병을 곁들이고 나와서 다시 군산행 버스를 타면 다른 사람들과 맞춰 퇴근할 수 있었다. 엉뚱하게 버스 속에서 난로공장 빚쟁이를 만나서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내가 서울로 돈을 벌러 다니는 줄 알고 열심히 벌어서 자기 돈 먼저 빨리 갚으라고 오히려 격려해 주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표를 사다가 나는 또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일회용 보험이었다. 보험료는 오백 원이었는데 서울까지 가는 동안 사고가 나면 천만 원을 준다고 했다. 처음에는 복권이구나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같이 재수없는 놈은 버스가 뒤집혀 죽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았다. 할 일도 없고 또 앞으로 돈을 벌 자신도 없고 보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어지기도 하면서 죽어 버리면 항상 걱정이던 가족에게 보상이라도 받게 하는 것이 상책 아닌가? 

  

나는 다시 뛰어 내려가 오백 원을 주고 일회용 보험에 가입 했다. 물론 돌아올 때에도 어김없이 가입했을 뿐 아니라 매일매일 보험을 들고 버스를 탔다. 승객이 많은 날은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버스가 뒤집히기를 열심히 기도했다. 하지만 버스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급브레이크 한번 밟지도 않고 시원하게 잘도 달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사라지고 버스여행도 시들해질 무렵이었다. 마지막으로 동대문 시장이나 한바퀴 돌아보고 죽음의 여행을 그만두자고 생각하고 어정거리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를 껴안았다. 고등학교 동창생인 명규였다. 반가운 마음이야 그 녀석보다 더 했지만 내가 피하려고 했던 건 내 주머니 사정 때문이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나를 억지스럽게 껴안더니 나를 불고기 집으로 끌고 들어가는 게 아닌가? 불안해진 나는 연신 땀을 닦는데 소주도 아닌 맥주를 권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잔을 받았지만 갈증이 몹시 났던 나는 앞 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얗게 성에가 낀 맥주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커~. 정말 꿀맛이었다. 더위 따위는 언제냐 싶게 가슴이 시원하게 트였다. ‘에라, 삼수갑산을 간다 한들 이 맛을 버릴 수가 있는가?’ 나는 녀석이 건네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마셨다. 아니 서둘러 내가 잔을 비웠다. 내가 급하게 서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군산행 버스표를 미리 사 놓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한 잔이라도 더 마셔 보겠다고 오줌마저 참으면서 뭉기 적거렸다. “야, 차 시간이 급해서 일어나야겠다.” “그래 임마 너무 서운하다.” 

  

명규도 내 차 시간을 말릴 만큼 여유가 있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서둘러 출발 직전의 버스 에 뛰어올랐다. 

‘아뿔사, 큰일이다.’ 내가 급히 방광을 움켜쥔 것은 버스가 출발하고 오 분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마신 만큼 쏟아내야 하는 맥주의 속성을 모를 리 없었지만 시원한 맥주를 한 잔이라도 더 마시려고 소변 볼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몸부림치는 나를 보다 못한 안내양이 비닐봉지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깟 비닐봉지 따위로 해결될 양이 아니었다. 죽고 싶다는 고통이 어떤 건지 그날 체험했다. 하지만 고통 뒤에 기쁨이라고 참다가 쏟아낸 그때의 시원한 배설감 또한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고속버스 공포증에 걸리고 말았다. 사고로 보험금을 타 먹겠다는 생각 또한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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