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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돌을 깎아 아련한 그리움과 사랑을 조각하는 황순례교수
글 : 매거진군산 편집부 /
2012.03.01 11:08:0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채만식 문학관을 지나 금강호시민공원의 중앙광장 옆에 높이 17.9m 화강암으로 만든 진포대첩비가 웅장하게 서있다.  군산시가 1999년 개항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것인데 돛을 상징하는 큰 화강암 날개 모양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고 두 조형물이 만나는 가장 높은 곳에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쳐부순 화포가 하늘을 향해 화구를 겨누고 있다.  이 의미 깊은 조형물을 제작한, 스스로 ‘돌쟁이’라 부르는 군산이 자랑하는 황순례(64)교수를 만나봤다.

 

황순례 교수를 만나러 전주로 떠나던 날은 매섭게 추운 날씨였다.  게다가 싸락눈이 내려 더욱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후 안내에 따라 전주를 넘어 완주에 다다르자 주변은 온통 공사판이다.  전주시의 만성동과 중동, 완주군의 이서면 갈산리와 반교리 일원에 진행되고 있는 307만평 광활한 대지에 공공기관 지방이전과 국가균형발전,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진행되고 있다는 ‘혁신도시’ 공사현장이었다.  트럭들이 드나들어서인지 함부로 파헤쳐진 길을 넘어 제법 한적한 샛길로 들어서니 갑자기 멋진 건물이 눈에 확 들어온다.  바로 전주대학교 황순례 교수가 세운 ‘정농미술문화공간’이다.  공사만 아니었다면 한적한 시골에 너무 뜬금없이 세워진 미술관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터.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시는 황교수께 인사를 드리고 미술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2,000여 평의 부지에 세워진 건물은 세련되기 그지없다.  드넓은 마당에 잘 정돈된 잔디 주변에는 그의 작품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고, 지하층은 황교수가 작업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에 다양한 공구와 제작중인 작품들이 놓여 있다.  지상1층은 커다란 갤러리가 깔끔하게 꾸며져 있으며, 2층은 작가가 연구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을 듯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마치 건물의 모든 공간이 그의 작업 사이클에 맞춰져 있는 듯 했다.

 

 

 

건물이 굉장히 아름답다는 칭찬에 “이 건물은 처음에는 창문도 내지 않고 저렴하게 지으려고 했어.  그냥 가건물로 지으려고 했는데, 주위의 이런 저런 이야기들 때문에 이렇게 일이 커져버렸어.  하지만 미래를 생각해보니 최소한 기둥만큼은 튼튼하게 세워야 한다는 마음에 제대로 만들기 시작했지.”라며 웃는다.  1층의 갤러리는 아직까지 정식으로 개장한 상태가 아니라고.  전주대 도시환경미술학과 교수를 퇴임하기 전 2010년 4월에 ‘바람소리’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갤러리 운영에 대한 명확한 계획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활용도가 무척 많을 것 같은 공간인데 하루 빨리 그 역할을 해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차 한 잔을 마주하고 앉자마자 바로 혁신도시가 주제로 떠올랐다.  그는 “아니 겨우겨우 집지어서 이사 들어오자마자 혁신도시 발표가 나는데, 나 미치겠더라고. 혹시 투기 오해를 받을까봐. 주위 사람들이 ‘선생님은 선견지명이 있으세요.’ 이러는데 정말 창피했었어.  우리 집이 혹시 (개발지역에) 걸렸나 겁이 나서 물어도 못 보겠는 거야”라고 했다.  이미 10여 년 전에 대지를 구입하고 어렵사리 건물을 짓기 시작했고, 한 여름에 끙끙대며 이사를 해 놓자마자 발표가 나서 정말 당황했었다고 한다.  “역시 뭘 해도 되는 사람은 되는 거 아닌가요?”라며 농을 건네자 그는 허망한 웃음을 대신한다.  이서면 용서리 근처에는 북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어느 정도 넉넉히 사시던 분들이 피난 와서 이룬 마을인 만큼 주민들은 정직하고 부지런하다고 한다.  정농마을 이름의 유래도 ‘정직한 농사꾼의 마을’이란 뜻을 가진 것 같다고.  그만큼 터가 좋고 아름다운 동네라는 말처럼 들린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빛을 보내던 주민들도 “집 예쁘게 지으세요.”라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그 후 점차 동네사람들과 가슴을 터놓기 시작했다고 한다.

 

 


 

군산시 경암동 572번지는 그의 고향 주소다.  당시 방앗간 집 장녀로써 성장했으나, 현재 그 자리에는 동생이 ‘태창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 어떻게 미술과 인연을 맺게 됐는지 물었더니 “나는 성장과정이 남들과 조금 달라요.  여동생이 태어나자 많이 아팠어.  나는 상대적으로 건강하니까 부모님이 나를 군산에서 30리 떨어진 곳, 할머니와 함께 살게 했지.  너무나 조용했던 할머니와 사는 동안 말을 못하고 살았더니 그 버릇이 들어서 완전히 말이 없는 아이가 되었어.  그런데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 국어교과서에 있던 눈썰매 타는 그림을 본 따서 그림숙제를 냈는데 선생님이 잘 그렸다고 벽에 딱 붙여 놓는 거야.  그 후 주변에서 자꾸 나보고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니까 난 정말 그림 잘 그리는 줄 알았어.  생각해보니 그게 내가 태어나서 처음 들은 칭찬이야.  말없이 항상 조용했던 아이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 온 거지.”라고 회상한다.  원래는 남 앞에 나서는 성격이 아니라 조용하기만 했는데, 미술활동이 있으면 친구들이 자꾸만 불러줘서 더욱 미술에 깊게 연관되게 되었다는 이야기시다.

 

다루기 어려운 돌을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이유를 묻자 “조금 우습게 들리겠지만 처음에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돌을 선택했지.  당시 집에 학생만 6명이 줄줄이 있었어.  오빠가 서울의대, 내가 홍익대, 동생이 숙명여대, 그 밑에 성균관대학 등등 경제적으로 정말 어려웠었어.  작품 재료비를 구하기도 어려웠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한 작품을 오래 작업할 수 있는 재료를 찾게 되었고 돌을 만나게 된 거야.  매일 정으로 조금씩 다듬어야 하니 오래 걸릴 수밖에 없지.  당시 가난한 학생들은 나처럼 돌을 많이 다뤘어.  소재 자체가 오래 지속되는 장점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처럼 예리하지 않은 사람에게 딱 맞았어.  항상 각이 없이 두리뭉실한 곡이 있는, 어쩌면 나처럼 느리고 둔하지만 꾸준한 사람을 위한 소재였어.”

 

그는 제자 여학생들에게 꼭 해주는 말이 있단다. “‘아무개 엄마’라고 불리지 말고, 본인의 이름이 불리도록 하라는 말이야.  여자로 태어나서 자신의 이름이 각인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뜻이야.  좋은 남편을 만나서 그 부인으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을 찾아야 한다는 거야.”라며 “내 이름으로 살까 아니면 누구의 엄마로 살까를 결정하는 건 본인의 몫이야.  예술을 하는 여자들 중에는 결혼을 하면 활동을 멈추는 사람이 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운영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 책임인거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의 책임이 아니라는 거지.  아무리 어려운 시집살이도 본인의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있어.  단 며느리로서, 부인으로서, 어머니로서의 책임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지. 그렇지 않다면 용서가 안된다는걸 알아야 해.  가정사에 피해가 있으면서 자기의 예술이 무슨 소용이겠냐 말이야.”라며 힘주어 말한다.  예술도 중요하지만 가정이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뜻이다.  좋은 인간에게서 나온 좋은 작품만이 좋은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며 “오전 10시에 나가서 작품 활동을 해야 한다면 7시에 일어나면 되는 거지.  다른 핑계는 있을 수 없어.”라고 말한다.

 

 


 

그는 전주대학교에서 32년 6개월을 근무했다.  퇴임서류에 적힌 그 세월을 보고 본인도 놀랬다고 한다.  32년이라니!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의 역할, 한 남자의 아내 역할, 그리고 너무나 오랜 시간이 투자되어야 하는 돌조각을 하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해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가 제작하는 작품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연잎으로 형상화되어지는 바람에 살랑대는 움직임과 주변의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을 많이 다룬다.  연잎을 다루는 이유로 예전에 덕진 연못에 가끔 산책을 갔는데, 어느 날 무수히 피어난 생명체를 보면서 그 움직임에 영감을 받아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어려서 부모님과 떨어져 할머니와 살았던 그 어떤 쌉싸름한  그리움 같은 공허함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다.  연잎의 실제적인 형태나 정확성은 크게 고려하지 않고 그저 감정에 충실한 작업을 한다고 한다.  그의 또 다른 소재인 어린이 주재는 해외연수시절 한국에 두고 온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 만들기 시작했다 말한다.  “예술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야.  자신이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 알고 또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바로 예술이야.  보이지도 않는 달을 따려고, 손에 닿지도 않는 별을 만지려고 하면 절대 예술이 되지 못해”라고 단언한다.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갓 난 아이였을 때 목욕시키며 만졌던 손등, 발등 그리고 엉덩이의 촉감을 상기하면서 만들지.  사실 이 작품들은 해부학적으로 절대 맞지 않아.  아이 손이 저렇게 크지 않잖아(웃음)”  아이들 조각 작품들의 표정들과 통통한 볼을 보니 그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앞으로 정농미술문화공간이 전업 작가들을 위해 올바르게 쓰일 수 있도록 고민하는 일만 남았어.”라고 했다.  헤어지기 아쉬워 갤러리와 작품들을 조금 더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어느덧 싸락눈은 멎어 있었고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그래서 군산으로 돌아오는 길이 편안했다.  정농미술문화공간은 아직 지어지고 있는 미완의 공간이다.  그래서 여전히 황교수의 손길이 많이 필요해 보인다. 

 

 

황순례 교수는 군산출생으로 홍익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미술협회, 한국여류조각회, 홍익조각회, 전북조각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1년 전주대 도시환경미술학과 정년퇴임을 가졌다.

 

정농미술문화공간

전북 완주군 이서면 용서리 546-5 (정농대농길 71) / (063)275-6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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