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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대곤 수필집_천국은 얼마나 따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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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1 17:07:4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술은 참 이상한 음식이다.  배가 고파서 먹는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술이 없는 세상을 무슨 맛으로 사냐고 술에 대해 예찬까지 한다.  어디 그뿐인가?  술을 마시고 하는 행동은 비록 그것이 망나니짓이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준다.  이를테면 상가에서 상주가 밥을 우적거리면서 먹고 있으면 볼썽사납다고 수군거릴 사람들도 상주가 술을 마시고 있으면 슬픔을 달래는 모습으로 생각하고 처연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술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말하자면 인생의 희로애락과 함께하는 셈인데 하물며 일의 매듭이 풀리지 않고 답답할 때는 오죽하랴?

 

1972년경 내 형편이 그랬다. 그때 나는 신신기업이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게 아니고 하루 종일 돈을 쫓아다니며 숨바꼭질하는 형국이었다.  눈을 뜨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오직 생각하는 건 돈이었는데 막아도 끊임없이 돌아오는 수표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은행 마감 시간이 많이 남은 오전 중에는 길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악수라도 하고 헤어질 만큼 여유가 있지만, 오후가 되면서 마감시간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조급해지다가, 4시가 넘으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오신다고 해도 반가워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는 팔목의 시계 초침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수표를 막아줄 테니 간첩 질을 하라고 하면 거절할 수 없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라고 해도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심정이 되고 만다.  전당포에서 헌 바지까지 담보로 하고 어찌어찌 그날의 부도를 막아내고 나면 그 순간부터 허탈감과 함께 공복감이 몰려오면서 속까지 쓰려온다.  생각해 보면 아침은커녕 하루 종일 물 한 컵 제대로 마시지 못한 적이 다반사였다.  돈을 빌리려고 이 사람 저 사람 다방에서 만나다 보면 하루 종일 커피만 겨우 마시게 된다.  그러면 속도 모르는 사람들은 우유라도 마시지 무슨 멋으로 커피를 마시고 속 쓰리다고 하느냐고 하겠지만 빈속에 우유를 마시면 울컥거려 넘어가지 않으니 도리 없이 애꿎은 커피만 마셔댈 수밖에.  어쨌든 비위가 상할 정도의 빈속에 그나마 넘어가는 건 커피와 술뿐이었다.  애써 속을 달래 보려고 억지로 밥 수저를 들어보지만 또 내일 돌아올 수료를 생각하면 입맛이 싹 달아나 깔깔한 입속에서 모래알 같은 밥알이 씹힐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수저를 던져 버리고 술병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 무렵은 술도 기분이 좋아지려고 마신 게 아니라 숫제 목으로 넘길 수 있는 게 오직 술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술도 주로 막걸리를 마실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막걸리는 어느 정도의 공복감도 달래 주었기 때문에 일거양득이어서 다행이었다.  몇 달을 그렇게 수표에 매달려 쫓아다니다 보니 어이없게도 그때 내 주식은 막걸리이고 부식은 밥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계속 돈만 쫓아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내가 그때 전혀 소생할 수 없는 사업에 매달려 죽기 살기로 돈을 쫓아다닌 건 순전히 내 잘못 만은 아니었다.  물론 약장사하여 몇 푼 번 돈으로 시작한 내 첫 사업에 대한 애착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예측하지 못한 정부의 정책 때문이기도 했다.  석유파동이 있기 전 내 곤로공장은 물건을 생산하지 못해서  못 팔정도로 호황이었다.  비록 공장은 조그만 창고를 빌려서 프레스 한 대에 공구 몇 개뿐인 소규모였지만 만들기가 바쁘게 불티나게 잘도 팔려나갔다.  아궁이도 연탄이었고 여름이면 아궁이마저 뜨거워 화덕을 쓸 때였으니 석유곤로는 혼숫감의 필수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런 만큼 수지도 맞았는데 칠백 원의 원가를 들여서 월부로 육천 원을 받으면 월부 계약금만 받아도 본전을 하는 장사였으니 나는 기고만장할 수밖에 없었다.

 

만드는 대로 돈이었으니 한 대라도 더 만들어 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건 당연했다.  철판을 많이 사기 위해 당좌수표를 끊어대기 시작했다.  까짓 기일 수표야 깔아 놓은 월부대금을 수금해서 막으면 그만이었다.  잘 나가는 판에 엉뚱하게 유류파동이 난 것이다.  석유가 없는 곤로를 어디에 쓰겠는가?  기를 쓰고 만든 내 공장의 곤로들은 하루아침에 고철덩이가 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팔려나간 곤로까지 반품이 되어 돌아왔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게 분명했다.  나는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하지만 정부정책이 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판에 무작정 부도를 낼 수 없어서 외상으로 사들인 철판 대금의 수표를 막느라고 동분서주한 것이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은 부도가 나고 말았는데 야박한 것이 주변 인심이었다.  난로가 잘 팔릴 땐 ‘싸가지’있는 젊은 사업가라고 입에 침이 마르던 사람들이 어느새 돌변해서 경멸과 질시의 눈으로 쳐다볼 뿐만 아니라 젊은 놈이 겁도 없이 날뛰더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비웃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일부러 찾아와서 억지로 돈을 맡기면서 제살이라도 베어 먹일 듯이 곰살맞게 굴던 사람들이 어느새 야수로 변해서 멱살을 잡고 늘어지는 비정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순간 나는 만사가 귀찮아졌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악다구니 속 같은 빚쟁이 속에서 벗어나고 싶어 무작정 완행열차에 올랐는데 자정 무렵 내린 곳이 대전이었다.  대전에 내린 무슨 특별한 볼일이 있는 건 아니었고 아마 서울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 만 원짜리 석장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역전 광진 여관에서 오천 원을 주고 정말 꿀 같은 잠을 갔다.  자도 깨지 않을 듯싶은 깊은 잠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게 일어나 막걸리 한 되와 해장국 한 그릇을 먹고 또 잤다.  머리가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행복도 삼 일을 넘기지 못했다.  주머니에 남아있던 삼만 원은 벌써 간곳이 없고 잠자리는커녕 막걸리 한 되 값도 없어진 나는 또 돈에 쫓겼다.  나는 무작정 거리를 방황했다.  차마 비럭질은 할 수가 없고 허기진 뱃속에 술 냄새는 코를 찔렀다.  나는 일부러 대폿집 간판이 붙어 있는 길을 피해서 걷기도 했다.  팔목의 시계도 잡혀먹고 양복 윗저고리까지 팔아먹고 나니 마지막으로 남은 구두를 노점상과 바꾸어 신고 이천 원을 받았을 때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마지막 이 돈으로 무얼 사 먹을까’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순간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가는 간절한 욕망이 있었다.  꿀꺽 목으로 침부터 넘어갔다.  새우젓을 듬뿍 찍은 순대였다.  왜 그 순간에 순대가 떠올랐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그 길로 시장으로 달려가 순대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보문산으로 올라갔다.  차마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보문산의 석양이 아름다운 것 따위는 아예 관심도 없었고 느낄 수도 없었다.  인적이 드문 숲속을 찾아 허위허위 달려갔다.  주변을 두리번거릴 틈도 없이 큰 소나무 아래 주저앉아 이빨로 병마개를 물어 뜯어내고 소주 한 모금을 꿀꺽 삼키고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순대 한 점을 입 안에 우겨넣었다.  커~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술과 안주가 또 있을까?  환하게 눈이 밝아져 오는 듯싶었다.  가슴이 훈훈해지면서 몸이 따뜻해져 오고 있었다.  스르르 졸음이 밀려왔다.  나도 관심이 없었지만 지나가는 행인 누구 한 사람 내게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으스스 한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내 몰골을 내려다보니 윗저고리까지 팔아먹고 때 묻은 와이셔츠 한 장 걸친 채 해진 운동화를 접어신고 있는 영락없는 거지였다.  깡통만 젊어지면 거지가 분명했지만 지금 그딴 것에 신경을 슬 수가 없었던 것은 밀려오는 한기 때문이었다.

 

손으로 목이며 어깨를 비벼 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냉기는 더욱 살아 올라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뛰는 것도 잠시, 숨이 가빠 와서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천천히 걸어서 공원을 돌기 시작했다.  얼어 죽지 않으려면 밤이 새도록 쉬지 않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걷다가 한기가 더 몰려오면 보건체조를 하듯 두 손을 들어서 흔들기도 하고 굳어가는 무릎이며 볼을 비벼대면서 끝없이 걸었다.  졸다가 걷고 또 졸고 새벽녘쯤에는 각기병이 걸린 듯 두 다리가 퉁퉁 부어 올라왔지만 나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천국은 얼마나 따뜻할까?’ 아궁이에 연탄불이 벌겋게 지펴진 판잣집이 너무나 그리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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