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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와 투호놀이 하니까 젊어지는 것 같다!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2.02.01 15:14:53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설날 한마당 큰잔치’가 열리는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광장

 

 

임진년(壬辰年) 설날 아침 형님댁에서 차례(茶禮)를 올렸다.  이튿날(24일)에는 ‘설날 한마당 큰잔치’(1월 21~24일)가 열리는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 다녀왔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영하 날씨에도 사람들은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에 흠뻑 빠져 있었다.  어른들은 추억의 떡메치기와 굴렁쇠 굴리기에 도전하며 흥을 돋우었고, 어린이들은 연 만들기, 소원적기, 자치기, 팔방놀이, 굴렁쇠 굴리기, 널뛰기, 제기차기, 고무줄놀이, 투호 던지기 등 다채로운 민속놀이를 즐겼으며, 박물관 측은 준비한 인절미와 한과를 나누어 주었다.  가족이 팀을 이뤄 투호 던지기를 하고 있기에 다가갔다.  군산시 성산면 창오리에 사는 채근평(70세) 어른 가족이었다.  채 어른은 “아내와 젖먹이 손녀까지 여덟이 왔다”며 “며느리와 딸, 사위와 투호놀이를 하니까 젊어지는 것 같다”면서 활짝 웃었다.

 

 


▲ 설날 아침, 차례상 앞에서 절하는 모습.

설날에 가족이 모여 차례를 올리고 밥상에 둘러앉아 밥도 먹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부모에게 세배하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풍요롭다.  한 세대(30년) 전만 해도 흔한 광경이었는데 옛날이야기가 된 것 같아 참으로 유감이다.  설날이 언제 어떻게 전통 명절로 정착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음력 1월 1일을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찢어지게 가난했던 보릿고개를 넘기면서도 고향을 찾아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다니는 등 민족의 명절로 지켜왔다.  한때는 친일했던 대통령이 '절약'과 '이중과세'를 명분으로 설날 아침에 공무원들을 출근시키면서 양력설을 쇠라고 강권했다.  그럼에도 설날이 가까워지면 고향을 찾는 민족의 대이동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무너뜨리려는 음모의 세월이었다.  옛날로 돌아갈 수도, 돌아갈 필요도 없겠지만, 어렵게 지켜온 설날이 국적 없는 상업주의에 밀려 전통과 풍습이 아련한 추억 속에서만 머무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일제강점기에는 섣달그믐 일주일 전부터 떡 방앗간을 열지 못하게 하였고, 군사독재 시절에는 설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고향의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몸이 부모를 찾아뵙는데 그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자랑스럽고 대단한 민족성이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서는 설날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설날에 세배함은 인정 많고 좋은 풍속이니/ 새 옷 차려입고 친척 이웃 서로 찾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삼삼오오 다닐 적에/ 와삭 버석 울긋불긋 옷차림이 화려하다/ 사내아이 연날리기 계집아이 널뛰기요/ 윷놀이 내기하니 소년들 놀이로다/ 사당에 세배하니 떡국에 술 과일이구나. (농가월령가 <정월령>에서)

 

 

다듬이질 소리도 경쾌한 음악처럼 들렸던 ‘설빔’ 준비

 

 

▲ 가족이 모여 설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설날은 무엇보다 풍성한 음식이 으뜸일 것이다.  설이 다가오면 음식을 장만하느라 손길이 바쁘게 오갔고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외숙모와 '난순네 엄니'는 떡과 부침개를, 어머니는 엿기름을 띄워 밤을 새워가며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식혜를 만들었다.  적당히 말린 가래떡 써는 일도 큰일이었다.  떡국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알맞게 굳은 가래떡을 나무 도마에 올려놓고 한석봉 어머니가 떡을 썰듯 가지런히 너무 두텁지 않게 썰었다.  바싹 말린 가래떡을 화로에 구워 조청을 찍어 먹으면 꿀맛이었다.  

시루떡을 앉힐 때는 무를 썰어서 시루 바닥의 동그란 구멍부터 막았다.  그리고 방앗간에서 빻아온 떡가루와 콩고물이나 팥고물 등을 번갈아 층층이 쌓았다.  다음엔 시루를 가마솥에 올려놓고 김이 새지 못하도록 빙 둘러 시루 빈을 붙이는 것으로 마감하였다.  떡시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날 때까지 잘 마른 솔잎으로 불을 지피면 가슴까지 따뜻하게 하는 불꽃이 너울대며 타올랐다.  밖에 함박눈이라도 내려주면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는데, 방구들이 뜨끈뜨끈해서 밖에 나가도 섣달그믐의 찬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 어머니와 누님들 손때 뭍은 재봉틀. 이웃에 초상나면 빌려갔기 때문에 동네 재봉틀이었다. 

 

 

설을 앞두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옷감을 떠나가 풀 먹이고, 말리고, 다듬이질했다. 우리 옷은 사거나 맞췄지만, 아버지와 누님 옷은 직접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누님과 어머니가 마주앉아 하는 다듬이질 소리는 경쾌한 음악처럼 참 듣기 좋았다.  그 옛날 사용하던 재봉틀이 지금도 형님 댁에 보관되어 있는데, 옛날 옷감은 요즘처럼 질이 좋지 않아 고운 빛깔을 내기 위해 삶았다가 빨랫줄에 널어 햇볕에 말리고, 다시 잘 접어서 질근질근 온종일 밟거나 다듬이로 다듬었다.  한 땀 한 땀 지어가는 옷으로 정성이 스며들었다.  화로에 쑤셔놓았던 인두를 꺼내 헝겊에 쓱쓱 문지르고, 소매 깃이나 동정을 맵시 있게 다듬던 모습, 가위로 잘라낸 헝겊 쪼가리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안방 풍경이 빛바랜 영상으로 비쳐진다.  모든 준비가 끝난 섣달그믐이 가장 가슴이 설렜다.  밤하늘의 별들은 아름답게 소곤대고 있는데도 어머니가 준비해준 새 옷과 신발을 머리맡에 두고 행여나 설날 비가 내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뱃돈 주지 않던 부모, 이유를 들어보니 

 

 

▲ 설날 아침 부모에게 세배하는 아이들. 

 

 

설날은 온 가족이 차례를 지내고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가 담긴 떡국으로 시작했다.  소고기와 계란 부침을 가늘게 썰어 넣은 하얀 떡국 위에 솔가지 잔불에 살짝 구워낸 김을 바삭바삭 부숴 넣으면 색과 맛의 조화가 그만이었다.  지금이야 나이 먹는 게 끔찍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떡국을 먹어야 나이가 드는 줄 알고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한꺼번에 세 그릇을 먹기도 했다.  어른이 뭐가 그리 좋다고, 지금 생각해도 우습기만 하다.  떡국을 먹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세배를 올렸다.  그러나 부모님은 세뱃돈을 주지 않았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옷과 밥이면 족하다는 거였다. 다른 부모들은 다 주던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네 점방에서 세뱃돈 까먹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세배 다닐 이웃이 많았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고 부모가 가라고 지명하는 집만 다녀야 했다.  이곳저곳을 다녀야 세뱃돈도 많이 받을 수 있는데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왜 그렇게 막았느냐고 물었더니 실수하지 않을까 조심하느라 그랬다고 했다.

 

철부지 시절 설날의 다채로운 풍경

 

 

▲ 2010년 정월 대보름날 한 시민이 군산 시청 주차장에서 연을 날리고 있다. 

 

거북선을 형상화한 건물이 이채롭다. 

 

설날 아침, 신작로에 나가면 색동저고리 차림의 아이들이 부모 손을 잡고 세배 다니느라 분주하게 오갔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덕담을 주고받으며 새해 인사를 나눴다.  부모와 손잡고 세배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그때가 새롭다.  아이들은 싼 '고리 땡' 바지도 어머니가 사준 거라며 자랑하면서 입고 다녔다.  그런데 새 옷차림으로 나가기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처럼 무섭고 창피했다.  해서 어머니가 '양키시장'에서 맞춰준 새 옷을 구겨 입고서야 대문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온다.  대목을 만난 만화방은 아이들로 북적였고, 판자로 지은 점방에서는 딱지가 불티나게 팔렸다.  동그란 종이를 떼면 뒤에 적힌 번호대로 가져가는 풍선 떼기, 어쩌다 큰 풍선이라도 떼게 되면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은 화약 딱총이었다.  오돌오돌한 종이를 찢어 화약가루를 넣고 방아쇠를 당겼을 때 '빵!' 하고 터지는 소리 크기로 상대방을 제압했다.  딱총은 작으면서 화약을 너무 많이 넣어 손을 다치는 아이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주로 널뛰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팔방놀이 등을 했다.  특히 '다마'(유리구슬) 따먹기, 땅바닥에 다섯 개의 홈을 파놓고 하던 '뎅까'(구슬 놀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불렀던 노래 등은 왜놈들이 남기고 간 놀이문화의 잔재로 여겨진다.  팽이치기, 제기차기, 땅따먹기(사금파리 놀이), 연날리기, 꽁꽁 언 논바닥에서 썰매 타기, 양지에서 모닥불 피우기, 설 특선 영화구경 등 하루가 행복했다.  가난했지만,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설빔과 음식, 돌맹이와 얼음도 놀이기구가 되었던 그때가 그립다.  설이 다가오면 지푸라기에 재를 묻혀 놋그릇을 반들반들하게 닦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만,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항상 사람냄새 나는 설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국의 미학' 고스란히 담긴 '설날 옷차림'  우리의 전통 복식은 최상위 문화의 집결체 

 

 

 

▲ 설날 때때옷의 상징 ‘색동저고리’. 오방색의 천을 이어 소매를 만들었다고 한다. 

 

예부터 우리는 남녀노소가 설날 아침에 입는 새 옷을 '설빔'이라 했다.  <열양세시기> 원일(元日)조는 '세비음(歲庇陰)', 세장(歲粧)이라 적었다.  한해를 시작하는 날 아침에 입는 옷이니 어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겨 있을 수밖에.  가난했던 시절 우리네 어머니들은 아이들 신발도 가을부터 준비했다.  바지, 버선, 색동저고리, 배자, 까치두루마기 등도 만들어 의걸이장에 넣어 두었다가 설날 아침에 꺼내 입혔다.  철모르는 아이들도 옷감에서 풍기는 은은한 냄새에서 어머니 사랑을 흠뻑 느꼈다.  옷을 집에서 만들어 입던 옛날에는 명절옷이라 하여 특별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인 형편과 사정에 따라 장만하였는데, 일반적으로 돌옷을 여유 있게 만들어 두었다가 명절에 입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전통 명절옷 차림의 아이들. 한국의 전통미를 마음껏 뽐내고 있는 듯하다. 

 

위는 '성신여자대학교 박광훈 복식박물관' 자료집(23쪽)에서 캡처한 사진으로 설날 분위기를 한껏 띄워 주고 있다.  남녀 어린이의 우아한 모습에서 한복의 아름다움은 물론 우리네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도 함께 느껴진다.  남자아이가 머리에 쓴 '호건(虎巾)'은 환한 얼굴과 색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어린아이가 씩씩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호랑이의 상을 수놓았으며 거죽은 엷고 가는 검정색 옷감, 안감은 남색 옷감으로 받쳐 만들었단다. 화사한 금박이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오방색(五方色)을 기준으로 하는 '오방장두루마기'에 전복(戰腹)을 덧입은 남자아이 모습이 제법 늠름하게 보인다.  노란색(토), 푸른색(목), 붉은색(화), 흰색(금), 검은색(수)을 의미하는 오방색은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의 다섯 방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오방색은 방위와 색깔뿐 아니라 단맛(토), 신맛(목), 쓴맛(화), 매운맛(금), 짠맛(수)을 나타내며 우리의 소리(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와 곡식(쌀, 보리, 콩, 조, 기장)과도 관련이 있어 음양오행 문화의 뿌리와 조상의 사상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타래버선. 여아는 홍색, 남아는 남색 대님을 맨다고 한다.

 

발에는 어린이용 '타래버선'을 신고 있는데 볼에는 꽃무늬를 수놓았고, 앞 코에는 붉은색 색실 뭉치를 달았다.  겨울용 버선이어서 따뜻하게 솜을 두어 누벼서 만들었다고 한다.  꽃무늬는 늙지 말고 오래오래 살라는 의미이고, 붉은 색실은 영화(榮華)를 상징한단다.  1950년대까지는 남자들도 버선을 신었다.  간혹 양말을 신기도 했는데 여간 잘사는 집 아니면 설에도 새 양말은 엄두도 못 냈다.  양말도 옷처럼 내림으로 물려받아 신었기 때문. 그래서 설이 가까워지면 우리네 어머니와 누님들은 저녁을 먹기 무섭게 등잔을 밝히고 구멍 난 양말을 꿰맸다. 

 

 

▲ 관복의 하나로 남자아이가 입는 전복. 소매를 반으로 줄이거나 생략하기도 한다고. 

 

 

남자아이의 남색 전복은 소매가 없는 옷으로 갑사(甲紗)나 속고사 같은 면직물 종류의 옷감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돌이나 명절 때 두루마기 위에 덧입었으며 붉은 띠를 전대처럼 매거나 수를 놓아 장식한 돌띠를 두르기도 한다고.  마음을 달뜨게 만드는 남색 전복의 깃과 섶 등에는 장선자손(長宣子孫), 효제충신(孝悌忠信), 인의예지(仁義禮智), 수복강녕(壽福康寧) 등을 금박으로 장식해놓아 건강하게 자라서 자손의 번창은 물론 훌륭한 인물이 되어주기를 기원하는 어머니의 소망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 조선시대 왕실이나 양반가에서 저고리 위에 격식을 갖춰 입는 당의 

 

 

당의(唐衣)를 입은 여자아이는 볼수록 귀엽고 복스럽게 느껴진다. 당의는 왕실이나 양반가 여성들이 저고리 위에 격식을 갖춰 입는 예복으로, 일반 저고리보다 세 배 정도 길며, 겨드랑이 아래에서부터 양옆이 트인 형태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여자아이는 방한모 가운데 하나인 조바위를 쓰고 있는데 차림새가 무척 앙증맞다. 머리 부분 양쪽에 금박을 하고, 예쁜 색깔의 색실로 술을 달아놓아 전통미가 더욱 돋보인다. 바느질하고 남은 천을 이용하여 색동을 모아 만드는 '굴레'를 쓰기도 한다고.  연두색 당의와 붉은색 치마는 색과 선의 조화가 화려하면서도 품위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잡귀를 물리친다는 붉은색 치마는 옛날부터 여자아이들이 색동저고리와 함께 입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  조선시대 남자용 신발 태사혜(위)와 여자용 신발 운혜(아래). 

 

 

신발은 남자아이는 비단이나 가죽으로 만든 태사혜(太史鞋)를, 여자아이는 운혜(雲鞋)를 신었다고 한다.  태사혜는 신코와 뒤축에 흰 가죽으로 태사무늬를 장식한 남아용 신발이고, 운혜는 앞부리가 뾰쪽한 여아용 신발로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의 전통 복식을 사진을 통해 보면서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너무도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기법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한 땀 한 땀에 한복의 미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느끼면서 최상위 문화의 집결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오방장두루마기. 격식을 갖추기 위해 의례용이나 방한용으로 입었다고 한다.

 

 

▲ 우리 민족 고유의 웃옷 여성용 ‘저고리’. 여성용 저고리에는 끝동 곁마기를 달기도 했으며, 

길이는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고, 고름의 길이와 너비도 달라졌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자료를 제공해준 (사)한국전통한복문화원 임순옥(67) 군산지부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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