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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사무장 홍성호 씨가 들려주는 우리 고장 천주교 이야기
글 : 오성렬 /
2016.11.01 14:04:46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변호사 사무장 홍성호 씨가 들려주는
우리 고장 천주교 이야기

글 오성렬(主幹)

 

 

군산 조촌동 소재 소정운, 이세나 법률사무소 사무장인 홍성호 씨는 고조부 때 받아들인 천주교 신앙이 자신의 자녀에까지 6대 째 이어질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둔율동성당에서 유아 세례도 받았던 그는 현재 성당의 홍보부장 직을 맡고 있기도 한데 오래전부터 조상의 발자취를 더듬다가 자연스레 천주교의 역사와 만나게 되었고, 학구적 호기심으로 천착하다보니 이제는 관련해서 책의 출간을 준비할 정도로 많은 자료를 축적하게 되었다. 본래 어려서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 사학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취업 전망 때문에 경영학을 택했던 홍 사무장은 이후 직장인으로 살아오면서도 역사에 대한 탐구심을 떨칠 수 없었고 지금도 시간이 날 때면 우리 고장은 물론 타 지역의 역사적 유적지나 흔적을 찾아 답사를 다닐 정도로 열혈 민간 사학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천주교와의 만남
그의 집안과 천주교와의 만남은 18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홍 사무장의 고조부께서는 개성에서 거주했는데 부인과 사별하게 되자 며느리의 소개로 새로 맞은 후실은 30대 처녀로서 천주 신앙을 가진 여성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천주 신앙을 접함으로써 신자가 되었고 이듬해 증조부가 출생한다. 그 때는 병인박해 끝 무렵으로서 그 여파가 개성에까지 미치게 되자 이를 모면하고자 고조부는 개성에 남고 고조모가 아들만 안고 배 편으로 안면도 누동리 교우촌으로 피난길에 올라 안면도에 정착한 뒤 옹기가마 업자의 뒷돈을 대주는 거상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다가 1885년 조·불(朝佛)수교의 체결로 천주교가 공인되자 다시 개성으로 귀환했다가 1900년도에 셋째 이하 자식들만 데리고 군산으로 이주, 일제 강점기 초인 1913년 증조모 명의로 영동에 상가를 구입하며 정착하게 되는데 당시로서는 신문물이랄 수 있는 맞춤옷 전문점인 안선상회를 개업, 장안의 멋쟁이들은 포목상이던 개성상회에서 천을 구입하여 안선상회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교우촌과 공소
180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고장엔 임피 산곡리 교우촌을 중심으로 15개소, 옥구 1개소, 함열 9개소 등의 교우촌이 산재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주민이 많은 곳은 40여 호 이상이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교우촌은 교인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이룬 마을로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이것이 그대로 공소로 발전하게 된다. 공소는 신부가 주재하지 않고 순회 미사를 갖는 경당으로 이들은 한국식 천주교 문화 형성에 근간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일 지역의 성당 설립에 초석으로 작용한다. 1900년대 천주교에서 발행하는 월간 경향잡지 및 신부들의 일기, 보고서 등에 따르면 문헌상 최초의 공소는 1882년 설립된 사옥개 공소를 필두로 1887년 세동공소, 이듬해 흥법공소, 1891년 서당골 공소, 1895년 창감 공소가 설립되었고, 1896년 성산면 산곡리에 주택을 구입, 개설한 산곡리 공소는 교우 집에 개설된 이전까지의 형태와 달리 군산지역 최초의 현대적 의미의 공소라 할 수 있다. 1900년에는 서수의 옥하 공소와 마룡 공소, 축동 공소가 설립되며 이후 1920년 경 주교 몇 분이 군산을 방문, 옛 신영동사무소 자리에 건물을 마련, 군산항 공소가 개설된다.


군산본당 설립
또한 1897년 뮈텔 주교가 전라도 북부지역(군산)과 남부지역(목포)에 성당 설립 의지를 가지고  신부들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북부지역 담당인 베르모렐 신부는 군산이 개항 이전이고 규모도 작아 불가하다고 보고 대신 강경에 성당을 설립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어려움이 있자 나바위에 성당을 설립하고 군산지역을 나바위 성당 관할로 편입하였다. 군산항 개항 직후인 1900년 군산에 성당을 설립하고자 공베르 신부를 파견하였으나 당시 군산항 지역에 신자가 1가구만 있어 부여 금사리성당 설립으로 계획이 변경된다. 이후 1920년경 나바위 본당 카닥스 주임신부는 군산본당이 설립되면 조선인과 일본인 약 800여 명의 교우들이 모일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1911년도에 신설된 대구대목구는 군산본당을 신설할 재정적 어려움을 들어 다시 무산되고 만다. 이후 1925년 나바위 성당 보좌신부 겸 군산 신설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김영구 신부는 나바위 성당과 군산 공소에 머물면서 군산본당 설립에 박차를 가하여 1930년 교구 지원금 천원과 신자들의 모금 등 3,500원에 군산시 둔율동 156번지 대성원을 매입하고 그 부속 건물을 사제관으로 개수하게 되는데 이로써 본당 설립의 물꼬를 튼 셈이다.

 

당시 군산본당의 교우는 약 200명으로 산하 공소의 400명까지 전체 600여명과 일본인 신자도 약 60명이 있었고 대지 약 240평에 15칸의 건물로 출발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 구옥을 철거하고 새 건물을 짓게 되는데 공사비 3천원을 투입해 54평의 화양식 목조건물로 성당을 신축, 김양홍 교구장 주례로 낙성식을 갖고 사용하게 된다. 이후 1944년 성당 옆의 야산(현재의 본당 건물, 사무실동, 가톨릭회관, 성모동산 부지)을 매입, 1955년 8월17일 현재의 성당을 준공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토록 오랜 난관 끝에 설립의 빛을 본 둔율동성당을 시작으로 시세(市勢)가 확장되면서 익산 남부지역(옛 이리)지역의 성당과 대야 및 월명, 오룡, 팔마, 조촌, 옥봉, 미룡, 나운, 축동, 소룡, 지곡, 수송 등(군산지역 13곳)의 성당이 설립됨으로써 가톨릭 신앙의 요람으로 자리하게 된다.

 

 

 

변호사 소정운·이세나 법률사무소
사무장 홍성호
063)452-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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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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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7 18:10:45) rec(346) nrec(367)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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