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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감도 속에서 찾은 70년 전 고은 시인 생가-기록으로 보는 고은 시인의 유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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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1 18:12:57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종아니의 발길 닿는대로>

조감도 속에서 찾은 70년 전 고은 시인 생가
기록으로 보는 고은 시인의 유년 시절


 

위는 고은(84) 시인이 태어나서 자란 생가 조감도다. 당사자가 직접 그렸고, 처음 공개되는 조감도여서 흥미를 끈다. 지난 2000년 11월 21일 고은 시인이 이복웅 군산역사문화원장에게 팩스로 보낸 것을 카메라에 담았다. 시기적으로 군산 개항(1899) 100주년 기념사업을 앞두고 고은 시인 문학관(기념관) 건립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감도에는 큰방, 작은방, 구석방, 부엌, 아궁이가 있는 네 칸짜리 초가(본채)와 끝방, 윗방, 큰방, 부엌, 외양간이 있는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본채 뒤편은 대밭이고, 왼편엔 감나무, 우측에 방공호가 표기되어있다. 본채의 마루와 토방, 두 개의 굴뚝, 본채와 멀리 떨어진 뒷간, 사랑채 뒤편의 남새밭도 보이는 등 무척 세밀하고 입체적이다. 정성도 엿보인다.

 

“해방 위 우리 집의 운세는 좀 나아졌다. 소와 쟁기 그리고 네 바퀴가 달린 달구지를 사들였고, 2, 3년 동안의 머슴까지 두어야 할 정도로 논이 늘어났다.”- 고은의 자전적 소설 <나의 山河 나의 삶> <2>에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위 그림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광복 후 생가 모습이라는 것이다. 소설에도 나오듯 일제강점기에는 만주에서 들여온 깻묵도 먹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해서 머슴은 물론 소도, 외양간도, 달구지도 집안에 없었다. 그런데 조감도에 소의 안식처인 외양간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살림이 늘어난 광복 후 생가 모습을 그렸지 않았나 싶다.

 

열흘 전 고은 시인 생가터에 다녀왔다. 안타깝게도 소설에 등장하는 본채와 사랑채, 외양간, 뒷간 등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 속에서도 노력동원(집단학살)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아버지와 함께 피신했던 대밭은 지금도 무성하였고, 100년생 감나무, 방공호 등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는 고은 시인이 태어나 승려가 되기까지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유년시절 
고향을 노래하는 서정시인, 독재에 저항한 저항시인, 이념을 아우르는 민족시인 등으로 평가받는 고은(84) 시인. 그는 1933년 옥구군 미면 미룡리 용둔마을(군산시 미룡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미룡리는 두메 마을이었다. 땅이 비옥하고 물이 넉넉한 고을(沃溝)의 쌀 미(米)가 두 번 겹치는 미면(米面) 미룡리(米龍里)에서 나고 자랐으나 쌀밥 구경은 설날과 추석, 제삿날 혹은 잔칫날에만 가능했다.

 

고은의 집은 네 칸짜리 초가였다. 밤이면 석유 등잔도 없어 접시에 어유(魚油)나 식물 기름을 부어 그것에 심지를 적셔 불을 밝혔다. 그의 어린 시절은 쑥에 대고 부싯돌을 치는 일과 성냥을 그어대는 일이 교차되던 시대였다. 개화기 이후 접시 등불이 없어지고 석유 등잔이 등장했다가 일제말기 전쟁으로 석유가 귀해지자 접시불빛이 되살아났던 것.

 

고은은 어려서부터 자주 앓았다. 몸은 말랐으며 뼈는 제대로 굳어지지 않았고, 무엇하나 제대로 들어 올리는 힘도 없었다. 그래서 항상 혼자였다. 방죽(은파호수공원)이 옆에 있었음에도 헤엄을 배우지 못했다. 매년 수백, 수천 송이씩 피는 연밥만 따먹었다. 배곯은 영향을 받아서인지 1950년 학도병 지원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에서 체중 미달로 탈락한다.

 

코흘리개 고은은 아버지를 따라 군산 시내에 나갔다가 중앙로 거리에서 화려한 3층짜리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과 수많은 2층 건물들을 보면서 도시를 동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집 주변 할미산에 올라 이리(익산)행 기차가 내뿜는 하얀 연기와 금강 건너 장항제련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상상한다. 

 

어린 고은에게 군산은 꿈이었고, 아버지는 희망이었다. 고은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군산에 나갔다가 어느 중국집에서 먹은 짜장면 맛이 한 달이 지난 뒤에도 혓바닥에 남아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에게 책을 처음 선물한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일본어로 된 소년잡지 <킹구(킹)>를 사줬던 것. 그 책에는 일제가 러일전쟁 영웅으로 떠받드는 노기(乃木) 대장 이야기는 있어도 이순신 장군 이야기는 없었다.

 

서당에서 소학, 논어까지 배우고, 아홉 살에 지금의 미룡초등학교에 입학한다. 그해부터 조선어 시간이 없어지고 일본어만 배웠다. 그의 일본식 이름은 다카바야시 도라스케(高林虎助). 장래 희망을 묻는 일본인 교사에게 천황이 되고 싶다고 했다가 퇴학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아버지의 간청으로 퇴학은 면했다. 대신 3개월이라는 노역을 감내해야 했다.

 

만주에서 들여온 콩깻묵으로 연명하던 식민지 시절 가난과 사회 혼란은 광복(1945) 후에도 지속됐다. 입학 전 한글을 깨우친 덕분에 4학년으로 월반한 뒤 새로 부임한 교장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알고 교장을 몰아내기 위한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후일 입학시험 성적이 우수했음에도 군산 사범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사춘기 시절~승려가 되기까지

1947년 군산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다. 아버지는 돼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벌였다. 중학생이 된 고은은 영어와 수학은 신명을 내서 공부했다. 정원사 루더 버뱅크의 얘기 따위는 거의 전문을 외웠다. 특히 지리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함경북도 회령, 평안북도 신의주, 서해 남쪽 목포, 법성포 등 낯선 곳을 찾아 상상세계의 황홀경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광야>를 읽고, 2학년 어느 날 하굣길에서 한아운(한센병 시인) 시집을 주워 집에 가져와 밤새도록 읽고 한아운 같은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1951년 1월, 고은은 아버지를 따라 선유도로 피난을 떠난다. 그가 집을 나서면서 챙긴 물품은 자드락 종이 한 다발과 옥편(玉篇), 지리부도, 이태준의 <문장독본>, 잉크, 철필 등이었다. 한국전쟁은 어린 고은의 꿈까지 바꿔놓았다. 화가가 되겠다는 꿈은 사라지고 시인이 되겠다는 꿈이 크게 익어갔던 것.
 
선유도에 한 달 남짓 머물면서 사귄 섬사람들이 섭섭해 하며 전송해줬다. 그는 선유도 피난생활에서 새로운 눈을 뜬다. 고향에서 오랫동안 핏줄을 대어오며 살아온 사람들이 서로 원수가 됐던 비극 이후에도 얼마든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향의 학살에 대한 악몽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와중에 그에게 문학적으로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외삼촌이 부역 혐의로 감옥에 수감되고 가족 같았던 마을 사람들이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서로 죽이고 죽는 참상을 목도한다. 폭격으로 파손된 비행장 복구 작업에 강제 동원되고 적신착란 증세가 나타나 4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고 방황이 시작된다.

 

청년으로 성장한 고은이 폐허가 된 항구도시의 방랑자로 떠돈 기간은 1년 남짓. 군산 미군비행장 양색시들 편지 대필. 대야 장터 엿장수, 군산 내항 미군항만사령부 운수과 검수원, 개복동 비둘기다방 주방장, 희소관 변사, 북중학교 영어·미술 교사 등을 거쳐 1952년 금강사(동국사) 승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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