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gun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홈 > ARTICLE > 사회
암과 투병하며 동화책 펴낸 할아버지 소설가 라대곤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2.01.01 16:20:02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암과 투병하며 동화책 펴낸 할아버지 소설가

소설가 라대곤(72세).  그는 나이 일흔에 췌장암, 담도암 수술을 연거푸 받았다.  체중도 20kg이나 감소했다.  그렇게 쇠약해진 몸으로 지난 10월 할아버지 할머니와 읽는 동화책 <깜비는 내 친구>(신화출판사)를 발간해서 화제가 되었다.  투병 중인 할아버지가 동화책을 펴냈다는 소식을 듣고 사무실로 찾아갔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화책이 1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6권까지 시리즈로 출간될 예정이라는 것.  그의 창작 의욕과 열정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라대곤은 "동화책 주인공 경아와 민재는 손자·손녀 이름"이라며 "사랑하는 경아와 민재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오래오래 기억해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라고 말했다.

 

▲고향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상념에 잠긴 라대곤 소설가. 그는 한국 소설가협회 중앙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버겁고 험하면서도 화려한 발자취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김제에서 초·중·고를 다닌 라대곤의 발자취는 버겁고 험하면서도 화려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농사꾼으로 시작해서 노숙자, 악극단 단원, 연탄공장 인부, 약장사 행상, 예비 소설가, 그룹과외 강사, 회사원 등을 거치면서 작가와 기업인으로서 기초를 다졌다.  칠전팔기 정신으로 사업에 성공한 라대곤은 1982년 <월간 자동차>에 단편소설 <공범자>를 발표하고 1993년 수필로 등단한다.  당시 그의 주변 사람들은 잘나가는 사업가가 호사를 위한 절차를 밟는 것쯤으로 알았다. 미안하고 창피한 얘기지만, 필자도 마찬가지. 

 

▲청년 시절 소설을 연습했던 원고 뭉치. 

처음 시도한 소설 제목은 요절한 형을 주제로 한 <이별의 아픔>, 그러나 현상금은커녕 잡지사 편집장 휴지통으로 직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전 가리방 원고지에 펜으로 습작한 소설 뭉치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글을 썼던 청년 시절 흔적이라고 했다.  곰팡내가 코끝을 훔치는 색 바랜 원고를 보는 순간, 라대곤을 키워준 자양분이자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54세 늦깎이로 등단한 라대곤은 주변의 조소에도 숨차게 달렸다.  그는 지금까지 수필집 <황홀한 유혹> 외 4권, 소설집 <영혼의 그림자> 외 4권, 장편소설 <망둥어> 외 3권을 발간했다.  더불어 탐미문학상(1998), 전북문학상(1999), 표현문학상(2000), 채만식 문학상(2006) 외 다수의 수상 경력을 쌓았다.

 

2011년 8월 19일 군산대학교(총장 채정룡) 2010학년도 후기 학위 수여식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아 원로 문학인으로서 위상을 정립했다.  그의 학위 증명서는 군산 출신 소설가 채만식(1902~1950), 해방 후 월북한 이근영(1910~?)의 대를 이어가라는 당부와 격려로 받아들여졌다.  <수필과비평> 발행인으로 '신곡문학상'을 제정하여 후배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격려하고 장려해온 라대곤은 집필을 통해 지역의 독창적이고 특성화된 문화 콘텐츠를 알리고, 풍자와 해학으로 사회발전과 인간성 회복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라대곤은 경찰서 유치장, 남한산성으로 불리는 육군교도소, 안양교도소, 군산교도소 등을 거치면서 인생 수업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가시밭길 같은 인생행로가 리얼하게 그려지면서 동시대를 살아온 동병상련의 애틋한 정이 묻어난다. 

 

  

군산대학교 채정룡(우측) 총장이 라대곤(좌측) 소설가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있다.  


▲과제가게 ​팔진당(가운데 기와집)이 있던 군산시 신영동 구시장 입구(1959년 촬영)

 


항구도시 군산에서 태어나 농촌에서 창작 꿈 키워

라대곤은 일제강점기(1940년) 당시 군산에서 이름난 과자공장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영동 구시장(공설시장) 입구에서 팔진당(八眞堂)을 경영했다. 팔진당은 센베이 과자와 알사탕(눈깔사탕)을 만들어 도소매를 하던 과자가게.  작은아버지가 과자를 소매점에 나눠주면서 수금도 했는데, 한동안은 물건이 달릴 정도로 재미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덟 가지 맛을 담고 있다는 센베이 과자와 눈깔사탕을 맘대로 먹어보지도 못하고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 손을 잡고 김제로 이사한다.  

 

김제로 이사한 가장 큰 이유는 해방과 함께 정국이 혼란스러워지고 가게 경기까지 어려워지자 한학에 몰두하면서 <정감록(鄭鑑錄)>의 예언을 믿던 아버지가 난리(전쟁) 나면 시골로 피난을 가야 하니 농사나 짓겠다며 김제읍(김제시) 신곡리로 낙향했기 때문이었다.

 

 


금만평야 한편에 자리한 신곡리의 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솔개산 중턱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며 양지바른 잔디에 누우면 수줍게 얼굴을 내미는 할미꽃 봉오리, 언덕을 연분홍으로 물들이는 진달래, 담장에 걸친 개나리 등 눈에 보이는 모두가 풋풋하고 싱그러웠다.  한국전쟁(1950년)이 터지자 그해 여름방학을 일찍 했고, 피난민들이 마을로 밀려왔다.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왜 우리 편(국군)이 밀리는지 알 바 없는 철부지 라대곤은 피난민 속에 섞여온 해맑은 도회지 여학생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고 회상한다.  유엔군 쌕쌕이(F86)가 굉음을 내면서 폭탄을 쏟아부으면, 처마에 웅크리고 앉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역사(驛舍)가 맞았다느니 학교 건물에 떨어졌다느니 하며 의견이 분분한 어른들을 보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포탄이 학교를 피해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놀이터였던 흥복사(興福寺)는 소나무가 무성한 낮은 구릉들이 어깨동무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봄가을 소풍은 물론 1천 년도 더 되어보이는 느티나무.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던 샘물,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대천왕 등은 어린 라대곤의 창작 감각을 키워주기에 충분했다.  수박이나 참외 서리도 흥복사에 모여 시작했다.  국어 선생이 보기 싫어 백지 동맹을 하자고 모의하던 곳도 흥복사요, 병정놀이와 숨바꼭질을 할 때 숨었던 곳도 흥복사였다.  그래서일까. 밤잠을 설쳐가며 운영하던 난로공장이 유류파동(1973년)으로 부도가 났을 때 잠시 몸을 피했던 곳도 흥복사란다.   

 

 


 

악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라대곤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극장에 갔다.  상영 영화는 '여순사건'(1948)을 다룬 <성벽을 뚫고>였다.  당시 시골 극장에서는 맨땅에 깔아놓은 가마니에 앉아 영화를 관람했고, 낡은 필름이 비치는 스크린은 소나기 쏟아지듯 일렁였다고 회상한다. 

 

그날 이후 라대곤은 영화에 빠진다.  학교에 가는 날보다 극장 앞에서 서성이는 날이 많았다.  그 덕에 첫 직장도 극장 무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서울 구경을 하면서 악극단 '미성'의 단원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갔는데 각색 요원으로 채용되는 행운을 얻었던 것.  시간이 지나자 업무도 늘어났다.  무대 기둥 못질부터 시멘트 포대로 연극 의상 만드는 일, 막이 오르고 내릴 때 알리는 징소리까지 맡아서 했다.  월급이 없어도 재미에 취해 배고픈 줄도 몰랐다.  <호동왕자>를 공연하면서 은박지로 만든 공주의 치마가 벗겨져도 관객은 흥겨워했다.  시골 극장은 분장실이 없으니 옷을 갈아입을 장소가 없는 것은 당연.  여배우들은 이마에 여드름이 만발한 라대곤 앞에서 속옷까지 훌렁훌렁 벗어 던졌다.  놀라는 것도 잠시, 곧 익숙해졌다.  그러나 3개월 후 각색요원 채용이 볼모로 써먹기 위한 꼬드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목포공연이 끝나고 단장이 도망치자 여관 주인의 신고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를 살았다.  죄목은 무전취식.  구류가 끝나고 손에 쥐어진 것은 찢어진 낙랑공주의 치마뿐.  억울한 마음에 단장을 찾아가려다가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라대곤은 그때는 분했지만, 지금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며 허허 웃었다. 




 

"똥통에 빠졌다가 살아났으니 너는 큰놈 될 거다!"

라대곤은 수필집 <취해서 50년>을 펴낼 정도로 애주가다.  삼겹살에 소주 두 병이면 '만사 오케이!'였다는 그는 "어렸을 때는 술을 배고파서 마셨고, 젊어서는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덩이 같은 울분을 삭이기 위해 마셨고, 나이 들어서는 친구가 좋아서 마셨지"라고 말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어. 학교에 갔다가 끝나고 집에 오니까 아무도 없는 거야. 배는 고픈데 부엌의 가마솥도 시렁 위 대바구니도 비어 있더라구. 그때 이상한 향이 코끝을 자극하기에 냄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니까 아랫목에 솜이불로 덮어놓은 항아리가 있더군.  뽀글뽀글 끓는 농주 냄새가 구수해서 맛만 보려고 했는데 배고프니까 입에서 자꾸 당기더군. 몇 모금 더 마시니까 몸이 이상해지고 화난 아버지 얼굴이 그려지면서 어디론가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 후론 모르는데 밭으로 도망쳤다가 똥통에 빠졌던 모양이야."  여덟 살 위인 형이 샘가에서 깨끗이 씻어주었지만, 분뇨냄새로 며칠을 고생했다.  그때부터 마을 어른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 라대곤을 볼 때마다 "똥통에 빠졌다가 살아난 놈이니 훗날 아주 큰놈이 될 거다!"라며 놀려댔다.  제대를 며칠 앞두고 남한산성(육군형무소)과 안양교도소를 오간 것도 따지고 보면 술과 알량한 의리 때문이었다.  부대 앞 술집에 데리고 다녔던 강 중사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의리를 지킨 결과는 말단 공무원 응시자격도 박탈당할 정도로 처참했다.  병참학교를 꼴찌로 졸업하고 전방 사단본부로 배치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강 중사가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그에게 술을 얻어 마시며 명령에 복종하다가 보급품 횡령 공범이 되었던 것.  상처가 커서일까?  50년이 지났지만, 라대곤의 가슴에 강 중사는 영원한 술벗으로 남아 있단다.  1963년 제대한 라대곤은 군산에 정착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토록 원했던 벼슬자리, 즉 공무원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자격도 없거니와 군을 제대한 형이 돌림병으로 요절하는 바람에 8남매의 장자가 된 그에게 당시 공무원 월급은 가족 10명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금액이었다.  

 

라대곤의 처음과 마지막 직장도 술 만드는 회사였다.  1965년 '군산 주정협회' 야간경비로 입사해서 '백화산업' 서무계장(1969년)을 끝으로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 라대곤의 술 이야기는 <취해서 50년> 한 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만식 문학상 수상작 <망둥어>에 비친 인간 라대곤

제3회 채만식 문학상 수상작 <망둥어>는 외환위기(IMF) 이후 기업체 부도로 늘어난 실업자와 노숙자들, 여성 5명이 희생된 군산시 대명동 성매매업소 화재사건(2000년 9월) 등을 소재로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세태 풍자소설이다. 소설에는 위선과 모략으로 혼자만 잘살겠다는 협잡꾼과 집은 있으나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사연 많은 노숙자, 여인숙을 운영하는 아내에게 삥땅을 뜯어 쓰는 건달, 성매매업자, 청와대 직원을 사칭하는 사기꾼 등 우리 사회의 비열한 인간 군상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벌어지는 세상살이를 소설화했다"라고 말하는 라대곤은 서울역에서 노숙자들과 소줏잔을 나누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그들 곁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이런 생생한 체험은 희망을 포기한 채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노숙자들의 심리까지 섬세하게 묘사하는 바탕이 되었다.  라대곤은 "소설에 등장하는 노숙자나 성매매 사건은 우리 사회가 감추려고 하는 어두운 그림자"라며 "이웃과 개인의 정(情)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구술 작업이 끝나고 일어나려는데 그의 마지막 멘트가 가슴을 때렸다.   "이제는 내가 나서는 일은 없을 거야. 지금은 후진들이 나서야 할 때거든. 나 같은 늙은이는 조용히 뒤에서 후배들 창작활동을 돕는 게 옳은 일이지!"

조종안(시민기자)님 기사 더보기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닫기
댓글 목록
댓글 등록

등록


카피라이터

주소 : (우)54020 전북 군산시 절골3길 16-2 , 출판신고번호 : 제2023-000018호

제작 : 문화공감 사람과 길(휴먼앤로드) 063-445-4700, 인쇄 : (유)정민애드컴 063-253-4207, E-mail : newgunsanews@naver.com

Copyright 2020. MAGAZINE GUNSAN. All Right Reserved.

LOGIN
ID저장

아직 매거진군산 회원이 아니세요?

회원가입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잊으셨나요?

아이디/비밀번호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