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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 옛 이름은 군산도·고군산도 조선 후기 유배자들이 양반문화 전수
글 : 조종안 / chongani@hanmail.net
2016.08.01 15:23:25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종아니의 발길 닿는 대로>

 

선유도 옛 이름은 군산도·고군산도

조선 후기 유배자들이 양반문화 전수

 

 


 

 

군산시 옥도면에 속하는 고군산군도는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야미도, 신시도 등 63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16개가 유인도이며 선유도, 장자도, 무녀도 등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최근 단등교(새만금방조제~무녀도) 개통으로 육지와도 연결됐다. 

 

흔히 선유도로 통칭되는 고군산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에 '군산도(群山島)'라 불렸다. 군산도가 소개된 최초 기록은 고려 인종 원년(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으로 훗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등장한다. 

 

고려는 해상 강국이었다. 하지만, 당시 바닷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서해 중부 바닷길 선유도의 중요성은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긍은 1123년 5월 28일 송나라 명주(지금의 닝보)에서 출발하여 6월 6일 군산도에 정박한다. 그는 군산도에 머물면서 관아를 비롯해 선박, 병사, 망주봉, 군산정, 숭산행궁, 자복사, 오룡묘 등 당시 군산도 모습을 생생하게 담는다.

 

조선 태조 6년(1397) 선유도에 수군만호영이 설치된다. 이 수군진은 세종 때 군산으로 옮긴 후에도 선유도의 군사적 역할은 줄지 않는다. 선조 2년(1569) 망주봉 기슭에 수군기지가 다시 설치된다. 수군기지에는 절제사가 파견되어 임피, 옥구, 만경, 김제, 부안, 고창, 무장, 영광 등 8개 현 해상을 담당했다. 이 수군기지는 임진왜란 때 일시 폐쇄했다가 1600년 진말에 다시 설치한다. 우체국 뒤 산기슭 채소밭이 고군산진이 있던 진터다.   

 

고군산(古群山)이란 명칭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처음 등장한다. 임진왜란이 막바지로 치닫던 선조 30년(1597) 9월 21일 자 일기에 '아침 일찍 출발하여 고군산도에 도착했다'라고 간략하게 적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고군산(선유도)에 열이틀 동안(9월 21일~10월 3일) 머물면서 장계를 작성, 명량해전 승첩을 조정에 보고한다.   

 

김종수 군산대 교수는 “인조 2년(1624년) 군산도에 수군 진(鎭)을 설치하는데, 옥구현 진포에 있던 '군산진(群山鎭)'과 구별하기 위해 '고군산진'으로 부른 것 같다”고 추정한다. 같은 권역에 유사한 이름으로 수군진을 두 개나 설치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로 군산지역의 경제적, 군사적 중요성을 고려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군산이 조선 후기 유배지가 된 이유는?

 

조선 후기에는 고군산도에 많은 유배인이 귀양(謫居)을 살았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각종 사료에서 확인된다. 유배 온 사람 중에는 당쟁의 격화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세력을 잃은 왕족이나 양반층, 혹은 양인으로 5세에서 85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연령층도 다양했다.

 

장희빈이 중전 자리에서 쫓겨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던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갑술환국) 때 이조참의였던 권중경(權重經)이 선유도로 위리안치되는 것을 시작으로 1907년(광무 11) 이종태(李鐘台), 이상현(李商鉉), 김호락(金浩洛)까지 고군산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인물은 1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다.  

 

고군산이 유배지로 처음 지정된 시기는 인조 2년(1624년)으로 전해진다. 유배인이 많았던 이유는 첫째, 당쟁의 격화로 정치범 증가. 둘째, 관수(官守)가 없는 외딴 섬에 죄인을 배정하지 말라는 영조의 엄명(1728년). 셋째, 흉년에 쌀 2600가마를 국가에 기부하는 주민이 나올 정도로 부유했던 섬 등이었다. 이는 선유도가 풍요한 섬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제주도가 유배의 섬으로 양반 후손이 많은 것처럼 선유도 역시 유배인 중에는 가정을 꾸려 후손을 남긴 사람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유배인들은 고군산 원주민에게 학문과 사상, 의례와 절차, 생활 개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반 문화를 전수했을 것이다. '장자도에 가서 인물자랑 하지 말라!'는 풍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군산도에서 귀양살이하면서 글을 남긴 인물은 강직한 성품 때문에 정적이 많았던 이건창(1852~1898)이 유일하다. <명미당집>(明美堂集)과 <벽성기행>(碧城紀行)에 실린 <검소루>(劍嘯樓), <장구>(瘴颶), <노오편>(老烏篇) 등 8편의 한시가 전해진다. 그중 <장구>는 이건창 자신의 당시 심정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구한말 정세를 고군산의 기후에 빗대어 표현한 주옥같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고군산군도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교통 중심지 

 

고군산군도는 금강, 만경강, 동진강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역에 위치하여 삼국시대 이전부터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였다. 고고학에서는 강과 바다를 ‘옛날의 고속도로’라 표현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우리나라와 중국을 이어주는 해상교통로는 세 갈래가 있었다. 첫 번째는 서해 북부 연안 항로, 두 번째는 서해 중부 횡단항로, 세 번째로 서해 남부 사단 항로를 꼽았다. 특히 연안 항로는 한반도 서북쪽 연안과 중국 동북쪽 연안을 따라 항해하기 때문에 해상교통로로 일찍부터 이용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와 남송의 교류가 왕성할 때는 군산도가 국제무역의 거점항구이자 국제외교의 관문으로 큰 번영을 누렸다. 고려 때 군산도 중심지였던 선유도 망주봉 아래에서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선유도 망주봉 주변의 숭산행궁(崧山行宮)을 비롯해 사신을 맞이하던 군산정(群山亭), 바다 신(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오룡묘(五龍廟), 자복사(資福寺), 관아 등 많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왕릉과 숭산행궁은 그 자체만으로 교통의 중심지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망주봉 주변에 순청자, 상감청자 등 최상급의 청자편(片)과 백자편, 중국제 자기편, 기와편이 흩어져 있고, 고려 시대 최상급 청동거울(쌍룡 문경과 선경문경), 중국 송·원대 자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 매장문화재로 신고되어 군산도 해양문화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새만금시대를 앞둔 이때 군산도(선유도)를 중심으로 해양문화를 밝히기 위한 학계의 관심과 행정당국의 지원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원과 연구를 토대로 천혜의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접목해 새만금 국제해양관광단지 조성 등 활용방안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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