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gun 홈페이지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홈 > ARTICLE > 사회
옛 '경포천' 수문과 ‘중동사거리’로 떠나는 시간여행
글 : 조종안 / jay0810@hanmail.net
2016.05.01 16:26:49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종아니의 발길 닿는 대로>

 

'경포천' 수문과 중동사거리로 떠나는 시간여행

 

삭막할 정도로 한가로움이 넘치는 도시 풍경이다. 행정구역상 위치는 군산시 중동 사거리. 일반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나에게는 아련한 추억과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는 사진이다. 직선으로 뻗은 도로는 학교를 오가던 등굣길이었다. 나포, 임피, 함열, 용안, 강경, 논산 등과 이어져 전군도로와 함께 군산의 관문이기도 했다.

 

사거리 왼쪽 길은 아흔아홉 골목으로 일컬었던 중동274번지입구, 오른편은 공설시장(구시장)’ 가는 길, 오른쪽 건물(전북 파이낸스) 자리엔 일제강점기 조성된 공설운동장(일출운동장) 정문이 있었다. 뒷길은 1970년대 후반 매립공사로 형체가 사라진 째보선창과 통하는 길이다. 사진을 촬영한 장소 옆에는 나포, 웅포행 버스가 출발하는 정류소가 있었다.

 

국경일에는 시내 학생들 시가행진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장을 보러 다니던 시골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애환이 서린 길이기도 하다. 1961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계엄령이 내려지자 군인과 경찰들이 좌측통행을 하지 않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을 로터리 중앙에 몇 시간씩 세워두곤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온다.

 

가을이 깊어져 김장철이 되면 동이 트기 전 시골에서 배추와 무를 바리바리 싣고 나오는 소달구지 바퀴와 신작로에 박힌 자갈이 부딪치는 소리가 골목을 타고 들어와 새벽잠에 빠진 나를 깨우기도 했다.

 

금방 간판이 내걸린 건물은 중동방앗간 자리이고, 그 뒤로 만화방, 소금집, 쌀가게, 식당, 양조장, 연탄공장, 벽돌공장, 기와공장, 문공장 등이 있었다. 도로 오른쪽은 공설운동장 시멘트 담이 쭈~욱 뻗어 있었다. 1970년대 후반 공설운동장이 폐쇄되고 그 자리에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담벼락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로 끄트머리 피난민촌 너머에는 바위와 절벽이 있는 돌산(石山)이 있었다. ‘돌산은 당산이 있던 서래산의 다른 이름이다. 꼭대기에 교회가 있는 제법 큰 산이었다. 그러나 100년 가까운 채석작업으로 평지가 되더니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나게 한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설애다리’, ‘물문다리로 불리던 경포교가 있었다.

 

옛 지명 설애가 어원변이 되어 서래라 불리게 됐다고 한다. 소설 <탁류>에서는 스래로 나온다. 동네 어른들도 스래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스래가 친근감이 있고, 향토냄새도 짙게 느껴진다. ‘물문다리는 부근 하천의 관계용수를 가둬두는 보() 역할을 했으며 그곳에 설치된 수문을 의식해 부르지 않았나 싶다.

 

경포천의 보()는 여름에는 아이들의 야외수영장이 됐다. 해마다 여름이면 익사사고가 몇 차례씩 일어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겨울에는 꽁꽁 얼어붙어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다. 천연 스케이트장이 됐던 것. 여름에는 동네 아낙들의 빨래터로 변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물가에서 웃고 떠드는 아낙들의 수다와 빨래방망이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듯하다.

 

경포천은 옥산, 조촌, 경암 들녘의 농수로 물이 모여 지금의 경장동 아흔아홉다리와 경암동 꺼먹다리를 거쳐 물문다리 에서 쉬었다가 금강으로 유입됐다. 주변 논에서 잡은 우렁이는 된장도 제대로 담가먹지 못하던 가난한 시절 여름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를 들고 '용진가'를 합창하며 다녔던 등굣길

 

경포교를 지나 학교에 오갔다. 한겨울에는 귀가 잘려나가는 것처럼 바람이 차가웠다. 여름에 큰 비가 내려 수문을 열었을 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거품은 무지개를 만들며 장관을 이루었다.

 

빠뜨릴 수 없는 추억이 하나 있다. 군인도 아니면서 혁명공약을 외워야했고, 이곳 사거리에 모여 줄을 지어 <용진가>를 부르며 학교를 오갔던 일이다. 그 후 북한을 비판하는 방송에서 평양 학생들이 우리처럼 기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등교하는 것을 보고, 북한과 비슷한 교육을 받았다는 생각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처음엔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잘 다니고 있었는데 5학년이 되던 해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개혁이랍시고 한 게 학구제 개편이었다. 그로 인해 10분이면 갈 수 있는 학교를 놔두고 20분도 넘게 걸리는 지금의 구암초등학교에 다녔다. 시간만 오래 걸리는 게 아니었다. 겨울에는 귓불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칼바람이 불어오는 그런 학교였다.

 

그래도 봄이면 경포교까지 올라온 똑딱선 선원들과 생선 장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벌이는 흥정을 구경하며 다녔고, 여름에는 뜨거운 햇볕을 피해 다이빙 연습과 물고기를 잡아 고무신에 담아 왔다. 가을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들녘 논길을 줄지어 걸으며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던 기억들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학교를 오가는 길이 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었고, 함께 울고 웃던 친구들이 있었기에 춥고도 먼 길임에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면서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졸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길도 변하고 오가는 사람의 옷차림도 달라졌다. 경포천이 매립 된지 오래고, 들녘에는 빌딩과 주택이 들어서 옛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뿐 아니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던 가로수들과 가을의 들녘을 지켜주던 허수아비 아저씨들, 그리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써레질을 하는 아주머니 옆에서 힘차게 돌아가던 호롱기(탈곡기) 소리도 이제는 모두 추억의 소리가 되어 버렸다.

 

욕심 같아서는 지나간 추억들을 되살려보고 싶지만, 그렇게 부질없는 짓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애틋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사라졌다고 아쉬워만할 게 아니라, 마음에서 찾아보는 것도 지혜일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추억은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고 했으니까···.

 

덧붙이는 글: <용진가>는 당시 박정희 군부가 학생들에게 배우게 한 군가이다. 가사는 '백두에 베른 칼이 공중에 번쩍/ 두만에 닦은 용맹 사해에 난다/ 나아가는 우리앞길 누가 막으랴/ 힘차게 용진한다 하나 둘 셋··/ 나가자 앞으로 대한용사들아···'로 기억한다.

 

 

 

조종안님 기사 더보기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닫기
댓글 목록
댓글 등록

등록


카피라이터

주소 : (우)54020 전북 군산시 절골3길 16-2 , 출판신고번호 : 제2023-000018호

제작 : 문화공감 사람과 길(휴먼앤로드) 063-445-4700, 인쇄 : (유)정민애드컴 063-253-4207, E-mail : newgunsanews@naver.com

Copyright 2020. MAGAZINE GUNSAN. All Right Reserved.

LOGIN
ID저장

아직 매거진군산 회원이 아니세요?

회원가입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잊으셨나요?

아이디/비밀번호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