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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역사 자료 더 소멸되기 전에 관심 가져야”
글 : 조종안(시민기자) / chongani@hitel.net
2015.12.01 15:30:42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전북 옥구(군산)에도 최초로 공립학교가 세워진다. 교명은 옥구항공립소학교(沃溝港公立小學校). 대한제국 정부가 광무 3년(1899) 5월 1일 군산을 개항하고 사회경제 변화에 대응할 인재 육성을 위해 소학교를 세우도록 한 것. 옥구 부윤은 소학교 위치를 옥구향교 양사재(養士齋)로 정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향교 재장(齋長) 전준기가 부(副) 교원으로 임용된다.

전북 옥구(군산)에도 최초로 공립학교가 세워진다. 교명은 옥구항공립소학교(沃溝港公立小學校). 대한제국 정부가 광무 3년(1899) 5월 1일 군산을 개항하고 사회경제 변화에 대응할 인재 육성을 위해 소학교를 세우도록 한 것. 옥구 부윤은 소학교 위치를 옥구향교 양사재(養士齋)로 정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향교 재장(齋長) 전준기가 부(副) 교원으로 임용된다.​

명칭은 조선인 학교, 교장은 계속 일본인이 맡아


옥구항공립소학교는 군산지역 근대 교육의 효시로 현 중앙초등학교 모태이다. 개교일은 기록이 없으나 한성사범학교 졸업생 한필수가 교원으로 임용되는 등 지속적으로 운영되다가 1906년 9월 1일 공립학교 지위를 상실한다. 그해 8월 ‘보통학교령’을 공포한 통감부가 대한제국이 설립한 공립소학교를 폐쇄하고 1907년 5월 공립군산보통학교(4년제)를 세운 것.

초대 교장으로 일본인 상도겸삼랑(桑島兼三郞)이 부임한다. 그 후 광복이 되는 1945년 8월까지 일본인 교사 6명이 릴레이 하듯 이어서 교장을 맡는다.(연혁 참고) 이는 일제식민지 시절 재학생이 조선인 자녀들이어서 조선인학교로 알려졌지 실제 운영 주체는 허리에 칼(日本刀)을 찬 일본인 교사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학생들 졸업사진에서도 잘 나타난다.
연혁에 이광래(李匡來)란 이름이 보이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이 안 된다. 다만 일제가 조선을 완전히 병탄할 목적으로 통감부를 설치한 1906년 2월부터 경술국치(1910)까지 군산 지역도 두 관청(옥구부와 이사청)이 양립하여 행정을 집행했던 것으로 미루어 설립 초기 조선인 교장 파견 근무자로 추정된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대한제국 직원록(1908)은 이광래 교장, 상도겸상랑 교감으로 명시하고 있다.

 

1908년 기록에 공립군산보통학교는 6개 학년으로 나타난다. 1906년 8월 공포된 ‘보통학교령’에 따르면 4개 학년만 있어야겠지만 공립군산보통학교가 모태로 하는 군산의숙이 부민(시민)의 높은 교육열을 반영하여 고등과를 설립하고 있었고 이를 쉽게 없앨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 교사들이 학교를 장악하면서 4년제로 단축되고 교육 내용도 변한다.

1908년 5월 이화학당에서 화류회(운동회)가 열렸다. 난생처음 여학교 운동회를 구경한 사람들은 ‘처자들이 정숙하게 발걸음을 같이하는 자태나 경주하는 모습은 진취적 기상으로 가르침의 힘’이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과년한 여자들이 다리를 벌리고 운동을 하다니 말세가 왔다’고 탄식하며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공립군산보통학교는 1909년에 남녀공학이 된다. 교내 운동회도 열린다. 1911년 군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고 1921년 6년제 인가를 받는다. 군산 인구가 늘면서 입학난이 심각해지자 제2 보통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기성회가 조직되고 1929년 4월 개교하면서 군산 제1 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뀐다. 그러나 갈수록 더해지는 가난과 일제의 교묘한 시험제도 시행으로 입학자가 줄어 1934년 제2 보통학교가 폐고 되면서 다시 합병한다.

군산공립보통학교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 정책에 따라 1938년 4월 군산소화공립심상소학교로 바뀌고 1941년 4월 군산소화공립국민학교로 명칭이 변경된다. 광복 후에는 1946년 8월 31일 군산중앙공립국민학교로 개명하여 중앙국민학교로 불리다가 1996년 3월 1일 일제잔재 청산작업의 하나로 군산중앙초등학교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잦은 교명 변경에서 굴곡의 역사 느껴져

 


식민지교육 체제는 경술국치(1910) 이후 더욱 공고해졌다. 일제는 공립군산보통학교에 파견된 일본인 교사들을 통해 학교를 장악해가면서 수업 연한을 단축하고 조선인 자녀들을 일왕에게 순종적인 청년으로 양성하는 교육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군산 지역의 다양한 야학과 학원을 폐쇄하고 군산공립보통학교를 중심으로 황국신민화 교육 체재로 재편해나갔다.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1919년 3월 군산 영명중학교 학생들이 주동한 설애장터 만세운동(3·5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노우에(井上瀀) 교장이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압력을 가하자 재학생 70여 명이 동맹을 맺고 14일 자퇴서를 제출하며 항거한다. 23일에는 교사방화사건으로 건물이 소실된다. 경찰은 학생들을 무더기로 검거 고문하였고, 김수남, 이남율, 권재길 등 10여 명은 소위 방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옥고(1년~10년)를 치른다.
1938년에는 본관 앞동산에 정원이 조성된다. 돌다리와 괴석, 석등, 인공연못 등을 갖춘 일본식 정원이었다. 다람쥐와 칠면조 등을 기르는 동물사육장도 있었다. 정원조성 목적은 학생들 휴식을 위하거나 정서 발달이 아니라 황국신민화 교육의 하나에 불과했다. 연못 옆 돌계단 위에 ‘교육칙어’와 소화 천황 사진이 걸린 ‘봉안전’을 지어놓고 정원 전체를 성지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참배를 강요한 것 등이 사실을 말해준다.

 

1942년 12월에는 특별청년연성소가, 1944년 4월에는 여성청년특별연성소가 교내에 부설된다. 일제는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 연성소를 설치한다고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 세뇌교육을 통해 학생과 군산 부민들을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고, 태평양전쟁에 필요한 가미카제 특공대를 배출하는 군사훈련장 같은 곳이었다.

한국전쟁(1950~1953) 때는 북한군과 유엔군이 교대로 주둔하였고, 전세가 어려워지자 머리띠를 동여맨 군산 지역 학도병(학도의용군) 1000여 명이 집결했던 군산중앙초등학교, 1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시간이라 하지만,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자주 바뀌는 교명과 변천 과정, 사건·사고 등에서 험난했던 굴곡의 역사가 오롯이 느껴진다.

흩어진 옛 자료들 모아 ‘중앙교육 역사관’ 개관
군산시 중앙로 2가에 자리한 군산중앙초등학교(교장 김해선)가 지난 10월 23일 ‘중앙교육 역사관’(아래 역사관)을 개관했다. 앞에서 말했듯 중앙초등학교는 116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김해선 교장은 예산이 없어 고민하던 중 2015학년도 전북도교육청의 100주년 이상 된 학교 역사박물관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고 전한다.

역사관은 3개 전시실과 한 개의 다목적 시청각실로 꾸며졌다. 제1실은 ‘연혁으로 보는 중앙교육의 역사’, 제2실은 ‘사진으로 보는 중앙교육의 역사’ 제3실은 ‘학교를 빛낸 인물과 사건들을 통한 중앙교육의 역사’라는 주제로 전시되고 있다. 현관, 계단, 복도 등에 내걸린 사진과 옛 정원 답사를 통해서도 ‘100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아래는 김 교장이 전하는 교육관 설치 동기이다.  
“2014년 3월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다가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했다.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 때 자료를 모아놓은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학교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흑백사진 60여 점이 퇴색되거나 붉게 변색하여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학교 연혁이 적힌 인쇄물은 손질하면 재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단과 중앙동산(옛 정원)에 널브러져 있는 석조물 조각들과 일본인이 학교를 방문한 흔적, 일본식 한자가 새겨진 돌, 그리고 6.25사변(한국전쟁)으로 다른 학교 강당을 빌려 수업하다가 복교를 기념해 세운 복교비, 50회 졸업기념 비석 등 소중한 자료들이 험상궂은 모습으로 흩어져 있었다.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그때부터 모두를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이 조선인 학교를 성지로 여긴 이유는
김 교장은 역사관을 설치하도록 자신을 부추긴 것은 아직도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선배들의 흔적들과 석조물 조각들, 앞서 말한 100주년 기념행사 자료들, 옛날에 수업하던 흔적들, 남아도는 빈 교실 등이었다고 부연한다. 특히 오래된 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자체가 유물이 되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그는 작업 중 발견한 돌에 새겨진 한자 문구를 소개했다.

鶴及嗊米段備一式/ 聖地參拜記念/ 紀元 二千六百年/ 參拜者 平川榮一 忌憎
(학급홍미단비일식/ 성지참배기념/ 기원 2600년/ 참배자 평천영일 기증)

기원 2600년은 우리가 사용하는 서기 1940년을 가리킨다. 내용은 ‘학교를 방문한 평천영일이 성지(봉안전)를 참배하고 그 기념으로 박제한 학(鶴)을 함에 넣어 기증하다’로 풀이된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일인들이 조선인 자녀가 다니는 학교를 성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정원에 소화 천황 사진이 내걸린 봉안전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의 초대 진무 천황은 기원전 660년에 즉위한다. 이를 기점으로 하면 1940년이 이른바 ‘황기(皇紀)’ 2600년이 된다. 일제는 이 해를 기념하기 위해 몇 해 전부터 각종 행사를 계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군산에서도 1940년 6월 16일 부민(시민) 체육대회가 열린다. 경기 종목은 원반던지기, 투포환, 초등부, 중등부, 일반부 100m 달리기, 400m 계주, 연식 야구 등 다양했다. 1938년 7월 조선체육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각종 모임을 금지한 일제가 전시체제에 체육대회를 개최한 것은 부민들의 친목과 건강증진이 아니라 황기 2600년을 맞아 일본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고 황국사관을 뿌리내리기 위한 주입식 행사에 불과했다.

“학교 역사 기록하고 보존해서 후대에 전승해야”


김 교장은 “대부분 학교는 공간도 없고, 자료도 그때그때 폐기해서 보관이 어렵지만, 중앙초등학교는 원도심권 공동화로 학생 수가 급감하면서 잉여교실이 많아 교육관을 설치할 수 있었다”며 “갈수록 사라지는 학교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보존하여 후대에 전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중한 자료들이 더 사멸되기 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장은 “역사관을 통해 학생들에게 교육의 가치와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고 역사인식 능력과 품성을 길러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군산시가 구도심 지역 활성화 방안으로 추진하고 있는 체험학습 코스에도 한 축을 담당, 군산을 찾는 학생들이 일제강점기 초등교육 실체를 견학할 수 있는 체험의 장으로 꾸미고 싶다고 말한다. 이어 희망 사항도 내비쳤다.

“중앙교육 역사관은 과거를 통해 오늘을 배우고 미래를 내다보는 체험공간이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과도 연계, 역사관과 옛 정원, 서관 건물 등을 체험코스로 개발하여 재학생은 물론 외지인들도 투어를 통해 106년 역사에 빛나는 초등교육의 산실을 보고 느끼면서 자신의 학창시절을 연상하고 동심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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