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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대곤 수필집_그때 그 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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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1 10:45:27 zoom out zoom zoom in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나는 딱 한 번 봉급생활을 한 적 있다. 처음 시작은 주정협회였는데 끝은 백화산업이라는 주정공장이었다. 그러니까 술 협회에서 시작해서 술 공장으로 끝이 난 셈이다. 지금은 백화산업이라는 공장 자체도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우리나라 청주 생산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던 백화 수복의 자매회사로 하루에 소주 원료인 주정을 20드럼 쯤 생산하는 아주 알뜰한 공장이었다. 수학이라면 빵점이었던 내가 화학인들 잘할 리가 없었다. 메틸인지 에틸인지 알코올의 용도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내가 주정 공장의 생산부에 취직했다는 것 자체가 격이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제대하고 줄곧 실업자로 빈둥댄 터라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어렵사리 취직이 확정된 전날 밤 묘한 설레임과 흥분으로 뜬눈으로 날을 새우고 새벽부터 출근을 서둘렀다. 울렁거리는 가슴으로 얼쩡거리던 나는 내 생선 처음 보는 웅장한 공장의 증류탑에 그만 넋을 잃었다. 아무 ‘빽’도 없는 내가 어떻게 하면 공장에서 쫓겨나지 않고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슴이 떨려 오기조차 했다. 그때 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결심했다. 비록 내가 보증인 하나 없는 처지라 한들 회사에서 믿음만 주면 죽도록 일해서 공장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두 주먹까지 쥐었다. 출근하고 보니 다행히 내 업무는 술 생산 업무가 아니라 원료 구매담당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몰라서 두려워했던 화학이나 수학과는 아무관계가 없었다. 술 공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기술자만 필요한건 아니었는데도 지레 겁을 먹은 순지한 내 자신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나는 업무상 공장에 출근하는 날보다 밖으로 출장 나가는 일이 더 많았는데 주업무는 농협이나 현지에 주정 원료인 고구마를 수매하는 일이었다. 생고구마는 철이 지나면 썩어 버리기 때문에 생산철에 한가마니라도 더 사들이기 위해 정신없이 현장을 쫓아다녀야 했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사들이기 위해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당연히 또 술판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농협 직원을 만나는 것도 맨숭거리는 얼굴보다는 한잔 술로 대화를 부드럽게 할 수 있었고 고구마를 생산하는 산지의 농민들을 만나는 데도 술병이 따라야 말이 통했다. 술 공장 사람이니 예의로라도 술을 갖고 오는 것이 우리네 인심이고 술 공장의 흔한 술쯤은 공짜로 얻어먹는 것 또한 당연한 것 아니냐고 농민들도 당연시했다. 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핑계거리가 없어 못 마시는 난데 오죽이나 잘된 일인가? 나는 출장길에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소주를 몇 병씩 들고 나갔다. 안주야 날고구마 껍질을 벗겨서 한 조각씩 씹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내가 나가는 고구마밭 이랑에는 아저씨들뿐만 아니라 아주머니들까지 술자리가 질펀했다. 나는 신이 나서 다 씹히지도 않은 날고구마 안주를 침과 함께 튀기면서 넉살좋게 떠들어 대면 몇 잔 술에 함께 취한 마을 아저씨가 가마니에 정 무게보다 몇 kg씩 더 넣는 것이 시골 인심이어서 내가 공장에서 퍼내 오는 술값보다 몇 배는 이득을 보았다.  

 

어느새 눈이 내리고 내 고구마 수매기 술도 이골이 날 무렵 회사에서 이번에는 전남 보성으로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사실 그 곳 출장은 모두 기피할 정도로 어렵고 고달픈 일이었기 때문에 차일피일하다가 내게로 밀려 떨어졌는데 나는 가지 못하겠다고 거부할 이유도 배짱도 없었다. 그때 공장은 원료 부족으로 증류탑이 멈춰야 할 판이었다. 전남 보성 농협에 있는 절간 고구마 만 가마니를 구매했는데 수송하는 화물차를 배정받을 수가 없어 애를 먹고 있던 상황 이었다. 회사에서는 내게 출장 명령을 내리면서 어떤 일이 있 어도 연말 안에 수송을 완료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한편으로는 내 능력을 인정해 주는 듯싶어 기분이 괜찮기도 했지만 기일 안에 수송하지 못하면 회사에서 쫓겨나야 할 판이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불안감 속에 전라선 태극호에 올랐다. 낯선 보성에서 무슨 수로 화물차를 얻어 기일 안에 수송한 단 말인가. 태산 같은 걱정이 앞선 나는 또 강생회 소주를 한병 사서 마셨다 아니나 다를까 언제나처럼 마음이 조금씩 진정 되면서 오기가 생겨났다. ‘까짓거 잘못된다 한들 실업자밖에 더 될까?’ 나는 또 한 병의 소주 덕분에 취한 기분으로 야간 열차에서 단잠까지 잘 수 있었다. 늦은 밤 생전 처음 보는 보성역에서 내려 숙소를 정하려고 두리번거리던 나는 픽 하니 어이없는 웃음을 웃고 말았다. 네온사인에 번쩍거리는 간판이 ‘그때 그 여관’ 이라는 간판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지었는지 꽤나 재미있는 이름이었다. 나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보성역에서 처음 본 ‘그때 그 여관’ 으로 들어갔다. 여관에 붙어 있는 다방도 ‘그때 그 다방’ 과 한 집이었다. 

 

밤 이 늦었는데 기차 손님을 기다리는지 그때까지 다방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분위기도 볼 겸 다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하품을 해대는 마담에게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한쪽에서 혼자 신문을 보고 있는 아저씨에게도 커피를 권했다. 나는 그저 보성에서 누군가를 사귀고 싶어서 커피를 권했는데 우연히도 그분은 그 여관과 다방 주인이었다. 기분 좋게 내 커피를 마신 아저씨는 이번에는 불문곡직 자기가 술을 사겠다고 나를 끌고 다방 앞 대폿집으로 갔다. 어지간히 술을 좋아하는 그분은 내가 권하는 몇 잔 술에 취해,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초면인 그날 밤은 주로 간판 이야기였는데 자신이 ‘그때 그 여관’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도 했고, 이름을 붙이게 된 다른 동기가 있다고도 했다. 어느 날 그 여관에서 하숙을 하던 기관장이 보성에서 임기가 끝나 서울로 갔는데 어느 여자가 기관장에게 ‘그때 그 여관’ 에 놀러 오시라고 했단다. 전화 옆에서 ‘그때 그 여관’ 이란 말을 엿들은 기관장 부인이 엄청 오해해서 부부싸움을 했는데 결국 보성까지 찾아와서 간판을 보고서야 오해가 풀렸다는 이야기 따위였다. 몇 잔 술에 우리는 연령과 관계없이 금세 친해졌다. 그 순간부터 내 보성 출장은 행운으로 바뀌게 되었다. 화물차 걱정을 하는 내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그딴 건 걱정도 말라더니 기차역 화물 주임을 불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는 엉거주춤 나를 자신의 조카라고 소개해 버렸다. 

 

“이봐,인사드리라고.”  얼떨결에 일어선 내게 여관 주인이 아주 오래된 가족처럼 나를 소개했다. “누구시더라.” “야 임마,내 조카야.” “내가 처음 보는 조카도 있었나.”

“군산 술 공장에 있는데 내일 아침 화물차 한 칸 줘야겠다.” “뭐하게?” “농협 고구마를 실어야 한다.”

“미친 놈 화물차가 내 주머니에 들어 있냐?” “임마, 너 순천 철도국에 매부 두었다가 어디다 쓸 요량이냐?” “허허허. 네 놈은 언제나 철이 들거냐?”  “아저씨,제 술 한잔 받으십시오.” 졸지에 기차역 화물 주임을 아저씨로 모신 나는 마음속에서 부터 미어져 오는 행운의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자식,네 놈이 공짜 술을 살 리가 없지.....”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두 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올렸다. “젊은 친구가 제법 술을 마시는구먼.” 화물 주임은 별로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너털웃음을 웃어대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희뿌연 먼동이 트면서 나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설마 했던 화물차 한 칸이 거짓말처럼 내 앞에 멎어 있는 게 아닌가? 그때 그 황홀했던 기분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러나 그 황홀함도 공장 직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를 어거지로 출장을 보내 놓고 아무 대책도 없었던 공장에서는 그야말로 환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춤을 추고 야단법석을 벌인 것도 잠시,잘했다 칭찬할 틈도 없이 다음 화물차를 독촉해 대고 있었다. 하지만 보성역 기차 화물 주임을 ‘빽’으로 갖고 있는 나는 그딴 걸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핑계 겸 보성 시내 술을 다 마실 듯 화물 주임과 ‘그때 그 여관’ 주인을 모시고 다녔다. 처음에는 양탕집도 가고 추어탕 집에도 가면서 식사 정도나 대접하던 나는 화차를 자꾸 배정받게 되면서 기고만장해졌다. 점차 간이 부어올라 겁도 없이 고급 술집에도 가고 농협 숙직실에서 삼봉이며 쌍박이라는 화투장에도 손을 대면서 어느새 공금을 축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계산이 흐린 나이지만 까짓 몇 푼 안 되는 공금 정도는 업무를 수행하는 공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손익을 따져볼 때 한 해 겨울 내내 수송을 해도 다 해내지 못할 물량을 내가 한 달 안에 실어 나르고 있으니 그 비용이며 조기 생산으로 얻어지는 이익만 해도 얼마인가? 그 정도면 아무리 회사의 공금이긴 하지만 그 비용을 좀 여유 있게 쓴다 해서 양심의 가책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경비가 조금 많이 난 것은 회사에서도 인정하겠지, 지레짐작한 나는 수송을 끝내고 너무도 당당하게 귀사 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내게 기다리는 것은 칭찬보다는 과도하게 지출된 경비 결산의 추궁이었다. 조기 수송의 공로야 인정이 되지만 그딴 건 능력일 뿐이고, 사칙에 나와 있는 출장 경비 때에는 단 한 푼도 경비 지출을 초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허용된 출장비는 여인숙비와 백반값 그리고 기차 삼등칸의 비용이 전부였다. 초과된 경비는 당연히 공금 횡령이기 때문에 급히 변상하지 않으면 영창으로 끌려갈 판이었다. 항변을 했지만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사정사정해서 내 월급에 가불을 달아 놓고 보니 너무나 허탈했다. 그때부터 나는 거의 매달 빈 봉투였다. 가불이 없어도 허기진 봉급인데 그마저 빈 봉투이고 보니 나는 회사에 근무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갔디. 생각할수록 분통까지 터져오는 것은 그래도 내 딴에는 그 어려움 속에서 오직 회사만을 위해서 충성을 다했는데 내게 돌아온 건 질책과 빈 봉투이고 보니 도무지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얻은 게 없지도 않았다. 작은 칭찬에 분별없이 거들먹거린 내 모습도 우습지만 남보다 앞서가려는 허욕이 얼마나 위험스럽다는 것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서서히 세상살이에 대해서도 조금씩 눈이 떠지면서 보성역 ‘그때 그 여관’ 과 화물 주임 아저씨들의 훈훈한 정이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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